아버지의 돌아보기 3 - 옥자누나의 죽음 , 다시 만주로

in #kr3 years ago

옥자 누나의 죽음, 그리고 다시 만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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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아버지의 기록을 제가 정리하고 덧붙인 것이며 여기서 '나'는 제 아버지입니다... 글 중 ‘아버지’는 제 할아버지일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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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왔다. 일본 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목사가 되어 남양교회에 부임하게 된 것이다. 두만강가의 시골에서 일본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중년의 (나이 마흔을 넘겼으니) 목사의 귀환은 요즘 말로 ‘아이돌’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남양 근방에서는 꽤 화제가 될 만한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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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쯤 됐던 내 보기에 아버지는 그럴 수 없는 멋쟁이 신사였다. 그 후 학교에서 배웠던 ‘영국 신사’의 전형은 내게 서양인이 아니라 당시 위풍당당하게 돌아온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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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실크햇을 단정히 쓰고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카이젤 수염’이라고 하면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 ‘카이젤’ 수염은 과거 1차대전을 일으킨 독일 제국의 황제, 그들 말로 ‘카이저’였던 빌헬름 2세의 수염 스타일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일제 강점기에 꽤 오래 유행을 탔던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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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이나 몽양 여운형 선생, 그리고 김좌진 장군이나 아버지가 따라다녔던 홍범도 장군도 비슷한 수염을 하고 다녔다. 단정한 양복에 하늘로 솟은 실크햇, 그리고 멋드러진 카이젤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는 아버지는 한동안 남양 읍내의 화제였는데 패션의 완성은 따로 있었다. 지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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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조선 제품은 아닌 확실히 아닌 고급 지팡이를 영국 신사 우산 다루듯 능숙하게 돌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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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내가 덩달아 신난 것은 아버지가 일본에서 가져온 자전거였다. 이때만 해도 자전거는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요즘 해운대 도로를 오가는 흔해빠진 벤츠 자동차보다는 당시의 자전거가 훨씬 귀한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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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는 폴 뉴먼이 캐더린 로스를 자전고 앞에 태우고 경쾌하게 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버지의 자전거의 앞자리는 나의 독차지였다. 아버지는 즐겨 나를 자전거 앞에 태우고 동네 곳곳을 달렸다. 아버지의 자전거 위에서 입을 귀에 걸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그 얼굴로 두만강 강바람을 가르던 시간은 지금도 어린 시절 기억의 으뜸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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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신나게 자전거를 타다가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맞아주었던 것은 바쁜 어머니 대신 야무지게 집안 살림을 돕던 옥자 누나였다. 우리 집의 맏딸이었던 옥자 누나는 나의 또 하나의 자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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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생으로 국민학교를 마칠 정도의 나이였던 옥자 누나는 남양에서 소문날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몇 번이고 돌아볼 만큼 예뻤다. 운동도 잘해서 운동회 때마다 단골로 릴레이 선수로 뛰었고 언젠가 릴레이에서 옥자 누나가 대역전극을 연출할 때에는 학교 교장과 교감이 같이 뛰면서 이 기특하고 촉망되는 제자를 격려할 정도였다. “김 목사네는 아들 셋보다 딸 하나가 더 낫다.”는 말이 들릴 정도였으니 여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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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옥자 누나는 오래 살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숱한 조선 사람을 쓰러뜨렸던 폐결핵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결핵은 무서운 병이었다. 한 해에도 수만 명의 조선인들이 결핵으로 죽었다. 인터넷에서 간단한 검색만 해 봐도 춘원 이광수, <벙어리 삼룡이>의 나도향, <날개>의 이상, 영화 감독 나운규 등 쟁쟁한 인물들이 결핵으로 유명을 달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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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건강하고 명석했던 옥자 누나도 단번에 시들어 버렸다. 옥자 누나가 죽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렇게 슬퍼하는 부모님을 처음 보았거니와 어린 나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해 주었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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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언젠가 어머니는 손자 형민에게 이때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나는 상여를 가로막고 우리 누나 데려가지 말라고, 우리 누나 곧 일어날 거라고 발버둥치며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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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오면서 옥자 누나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병을 이겨 내고 살았더라면 ‘3형제 묶어 세워도 그 누나 못 당하는’ 총명하고 야무졌던 누나는 우리 집에 큰 기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본인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누나’들에 대한 추억은 당시 어린이들에게 많았던 모양이다. 그즈음, 그리고 이후 내 또래들이 부르게 되는 노래들에는 ‘누나’가 빈번히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옥자 누나에 마음이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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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빛
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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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이라는 병의 가장 큰 적은 만성적인 영양 결핍이라고 들었다. 즉 못 먹고 배고픈 사람들일수록 결핵균의 먹이가 되기 쉽다는 뜻이겠다. 생활력 강한 어머니가 웬만큼 생활 터전을 닦아 놓았지만 당시 우리 가족은 배고픔에 허덕였다. 아니 우리 가족 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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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조선에서는 배급 경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배급량은 너무 적어서 배를 곯기가 일쑤였고, ‘두병과’(콩기를 짜고 난뒤 찌꺼기)나 무 밥등으로 주린 배를 달래야 했던 것이다. 나는 막내로서 그 끼니나마 거르지 않았지만 옥자 누나는 그렇지도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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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을 알 리 없던 철없는 막내는 밥투정이 심했다. 별안간 형편없이 떨어진 밥의 양과 질을 참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는 밥할 줄도 모르는 바보야?”하고 밥상을 걷어차 버리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남쪽의 ‘양반집’ 자식이라면 천하의 불효자식으로 혼찌검이 나도 여러 번 났을 일이겠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나에게는 그렇게 엄하지 아니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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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뻔질나게 밥투정을 하며 날뛰는 막내를 두고 고민이 많으셨을 것이다. 두 형은 얌전히 주는 대로 먹고 하라는 대로 하는데 이 막내 녀석은 끼니 때마다 난리니 머리가 어찌 아프지 않으셨을까. 거기다가 결핵으로 애지중지하던 맏딸까지 잃었으니 부모님의 마음 또한 싱숭생숭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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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또 한 번 결단을 내린다. “조선 땅에 있다가는 배 곯다가 죽을지도 모르니 다시 만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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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주는 식민지 조선보다는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땅이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태어난 아버지로서는 조선보다는 더 낯익은 곳이었다. 몇 년 전 두만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했던 일본 순사의 서슬 (1편을 보시오) 을 생각하면 도문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만주는 넓고 조선 사람들도 많았다. 아버지의 선택은 만주 길림성 화룡에 있는 이도구(二道溝)였다. 내 기억으로는 중국어를 섞어서 ‘얼또구’라고 불렀다. 중국어로 ‘이’(二)는 ‘얼’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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