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의 위선과 진정한 효심

in #kr7 years ago


연전에 온라인상에서 글을 읽다가 욱!한 기억이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세종의 그릇이 남다르단 찬사를 본 것인데요. 물론 세종은 성군으로 추앙받는 분이지만, 제 개인적으론 세종의 치적을 굳이 주자학과 결부시켜 평가하고 싶진 않습니다.

子曰 父在 觀其志 父沒 觀其行 三年 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그 뜻을 살피고 돌아가시면 그 행동을 본받아 3년 동안 아버지의 뜻을 바꾸지 않아야만 효라 할 수 있으리라.”

아시다시피 세종의 장인인 심온은 박은, 유정현 등의 참소에 의해 명나라에 태종의 즉위를 알리는 사은주문사로 파견됐다 돌아오는 길에 의주부에서 체포되고 얼마 후 사사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겉으로 들어난 팩트일 뿐, 실상은 외척의 발호를 견제하기 위한 태종의 책략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진실’입니다.

세종은 즉위 후 장인의 원수인 박은, 유정현 등을 벌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세종의 그릇의 크기가 남다르단 것입니다.

비록 이 땅의 유학자들을 모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주자의 허깨비에 집단 세뇌당한 좀비 사대부의 나라 조선은 그렇다 치고, 이 고린내 나는 구절을 이 시대까지 들먹이며 인간판단 기준의 잣대로 삼는 소위 오늘날 유학자들의 선비정신이 마냥 기특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가증스런 위선보다는 차라리 화끈하게 어머니의 복수를 자기 손에 직접 피를 묻혀가며 시행한 연산군이 도리어 개인적으론 공감 가는 인물입니다. 아버지 말씀이니 삼 년이니 되뇌는 것 보다, 내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복수심이 한결 더 인간적이고 솔직한 효심의 표출 아니겠습니까.

세종의 결정을 과연 정치적 포용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조선은 근본적으로 사대부의 나라이며 설령 왕이라도 독단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것은 고사하고 자잘한 정책결정에 이르기까지 신하들의 치열한 간섭과 견제를 받는 정치형태인 상황에서 갓 즉위한 젊은 세종이 본심 그대로 장인의 원수를 처단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편 세종과 대비되는 인물인 연산군의 실패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즉위 당시 갖은 사회적 폐단의 근원인 훈구파를 숙청하고 이어 훈구파의 반대세력인 사림까지 억압하여 결국 그의 보호막이 되어줄 세력을 양성하는데 소홀히 한 까닭이었습니다.

반면 세종이 성공한 이유는 장인인 심온의 복수를 자제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현명한 정치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란 것에 이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세종의 통치 시엔 아직 붕당정치가 일반화되기 이전이었음을(도리어 국법으로 엄금했습니다) 감안하더라도, 태종의 시퍼런 서슬을 본 지 얼마 안 된 시기라 세종 역시 의외의 강단을 보여 심온을 죽음에 이르게 한 유정현을 능지처참 했더라면 - 물론 이후 신하들에 대한 관용과 선정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하지만 - 도리어 신하들이 더욱 경외심을 품고 세종을 대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종대왕 어진]

왜냐하면 지도자는, 더욱이 봉건군주는 오늘날 취미 동호회의 회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조선을 그 500년의 존속 기간 내내 무기력한 은둔의 나라로 전락시킨 원흉은 바로 주자입니다. 썩어빠진 관념적 유희에 불과하단 비난을 면치 못할 성리학적 세계관을 사회지도층의 뇌리에 DNA로 뿌리내리게 한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저작 중 특히 논어집주는 현재까지도 이 땅의 유학자들이 무슨 경전처럼 떠받드는 책인데 전 이 책이야말로 공자가 원래 설파하려했던 참뜻을 주자가 제 입맛에 맞게 왜곡, 편집한 악서요 흉서라 생각합니다.

흔히 유학자라 하면 고리타분한 학창의에 정자관을 쓰고 제사축문이나 읽는 고리타분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본래 공자는 유학을 현재 우리나라에서 근근이 구태를 이어가고 있는 예법위주 의전(儀典)절차의 일환으로 생각하여 그 체계를 세운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였습니다.

제자인 자하가

巧笑倩 眉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시경에 '예쁜 미소 고운 눈매여. 하얀 눈자위로 눈부시게 하네' 는 무엇을 이름입니까?”

묻자 공자는

繪事後素“그림을 그린 뒤 하얗게 채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자하가

禮後乎“예는 다음이란 말씀이시지요?”

확인하자 비로소 공자는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나를 일깨워 주는 사람이 바로 상(자하)이로구나. 너와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다."

라고 칭찬합니다.

현대 수채화는 대개 먼저 바탕을 칠하고 이후 세밀한 부분을 색칠하는데 반하여 옛날 중국의 회화기법은 세밀한 부분을 먼저 칠한 후 마지막으로 바탕을 칠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대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란 본질에 대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입니다.

임방이란 제자가 예의 근본에 대해 질문했을 때는

“예는 사치함보다 차라리 검소해야 하고, 상을 당하면 형식을 갖추기보다는 진심으로 슬퍼해야 한다.”

고 대답했으며 심지어는

“나는 제사를 지냄에 있어 이미 강신주를 땅에 부은 이후부터는 보고 싶지 않다.”

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예절, 형식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이 우선이고 알파요 오메가란 뜻입니다.


[공자 초상]

이렇듯 주자는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유학에 대한 폐단이 몽땅 공자에 있는 것처럼 오도한 장본인이며, 성리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과 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봉건적 이상(理想)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유학의 정신을 이기론(理氣論)적 우주관에 함몰된 관념적 공리공론으로 절하시킨 원흉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돌아가신 부모의 뜻을 받들고 효도를 다하는 것인지를 나타내는 극명한 예가 있습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진선공 재위 시에 위주란 맹장이 있었는데 그는 조희라는 애첩을 무척 아꼈습니다. 그래서 생전에 항상 두 아들에게   “내가 죽거든 조희를 다른 곳에 개가시켜주도록 하라!”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병이 들어 목숨이 경각에 이르자 위주는 말을 바꿔 무서운 유언을 합니다.

“내가 죽거든 조희를 죽여 나와 함께 순장토록 해다오!”

위주가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인 위기는 유언에 따라 조희를 죽이려 했으나 형인 위과는 동생을 말리며 말합니다.

“유언은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말씀하신 것에 불과하니 우리는 마땅히 평소에 당부하신대로 따르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두 형제는 평소 부친의 뜻대로 조희를 개가시켰습니다.

이윽고 세월이 흘러 진(晉)나라는 진(秦)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형 위과가 총사로, 동생 위기는 부장으로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진(秦)의 선봉장은 두회란 장수였는데 워낙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라 위과 형제는 연전연패합니다.

어느 날, 위과는 막사에서 두회를 대적할 전술을 고심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청초파, 청초파...”

문득 잠에서 깬 그가 기이해하고 있는데 마침 동생 위기가 막사로 들어오며 말합니다.

“형님. 참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들어본 즉 동생도 위과와 같은 꿈을 꾼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에도 위과는 꿈을 꿨는데 이번엔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나는 섭공이란 사람으로 조희의 아비입니다. 장군이 제 여식에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고자하니 내일 두회와 전투가 벌어지면 그를 청초파로 유인하소서.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나이다.”

그는 즉시 동생을 불러 꿈 얘기를 하자 동생이 외쳤습니다.

“청초파!”

형제는 즉시 척후를 보내 청초파의 위치를 파악하고 비밀리에 군사를 이동시켜 매복시켰습니다.

이튿날, 전투가 벌어지자 위기는 일지군(一枝軍)을 이끌고 두회에게 싸움을 걸어 한편으론 싸우고, 불리하면 퇴각하는 것을 반복하여 점차 두회를 청초파로 유인했습니다.

청초파(靑草坡)는 이름대로 푸른 풀이 무성한 구릉지였는데 두회가 이에 접어들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물론 이는 두 형제에게만 보이는 광경이었는데, 하얀 옷을 입고 백발을 길게 풀어 헤친 노인이 적장 두회가 발을 옮길 때마다 푸른 풀을 한 움큼 잡아 그의 발목을 붙들어 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발, 또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두회는 비틀거리다 마침내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이에 진군(晉軍)은 개미떼처럼 쓰러진 그에게 달려들어 어지러이 창으로 찔러 시살하니 싸움은 진군(晉軍)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날 밤 그 노인은 다시 두 형제의 꿈속에 현신하여 인사합니다.

“미천한 몸이 이제야 풀을 엮어 두 장군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보답했으니 이제 구천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게 됐나이다.”



이상이 사자성어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유래입니다.

진정으로 부모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란, 명분에 함몰되어 잘못된 판단이라도 이를 바꾸지 않고 구태의연하게 따라 더 큰 화를 초래하거나 도약과 발전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과, 비록 부모의 뜻이라도 잘못된 것은 과감히 버리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 중 어느 것을 일컫는 것인지, 어떤 선택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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