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건축 멜랑콜리아 : 현학, 또 현학, 그런데 재밌어
건축 멜랑콜리아 - 이세영
한마디로 굉장히 현학적인 책이다. 말로만 듣던 유하의 시가 비수가 되어 글을 서늘하게 만들고, 역사·건축·철학·사회학 사조의 알 수 없는 개념어가 남태평양 다랑어 마냥 책 전반에 날뛴다. 이 속에 한국 현대 건축사 속 진귀한 여러 흥미로운 사실들이 어수선하게 조화를 이룬다.
여의도 밥 먹은 지 벌써 7년 차인데, 뻔질나게 드나들던 동여의도에 국회의사당 처마 높이를 기준으로 한 건축물고도제한이 걸려있는지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그런데 웃긴 건 국회 바로 몇 백 미터 앞 서여의도에는 그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소개하면 광화문, 시청, 을지로를 잇는 지하통로가 1970년에 완공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계획에서 준공, 개통까지 채 3개월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경천동지할 일이다.
이런 정보를 담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정말로 변태적일 정도로 편집광임을 증명한다. 한 기업이 발간한 사보(대림산업)는 물론 국토정책 brief까지 뒤져보면서 이 책을 써냈다. 그리고 그것을 인용문 따서 소개해주는 깐깐한 섬세함까지 돋보인다.
고속도로는 연결된 지역에 60% 정도 거리 단축효과를 가져다 주었다(국토정책 Brief). 이는 도로망에서 배제된 지역에 그만큼의 거리를 이격한 것이기도 했다.
이 두 문장에 작가의 감수성이 투영된 이 책의 캐릭터가 배태되어있다. 여러 현학적 오브제와 함께, 주변에 대한 관심, 따뜻함, 섬세함, 철저한 자료조사까지... 건축, 역사, 종교, 문학, 정치학을 넘나드는 정보와 이를 엮는 작가의 창조적이고 진보편향의 해석이 돋보인다. (진보편향이라 싫다는 뜻, 절대 아니다.)
작가는 사실 굉장히 빨간 사상을 가졌던 사람이 맞다. 책 곳곳에는 작가의 단단한 사상의 기초가 움트고 있다. 처음 읽을 때는 이 기자(작가는 현직 기자다)는 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등장한다. 일단 그가 주로 인용하는 사람들부터 그렇다. 마르크스와 베버는 아주 진부한 축에 속한다. 대부분 사회학/인류학/철학/정치학에서 좌파의 본류와 지천을 다 훑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래도 좀 유명한 사람이다. 폴 비릴리오가 등장하면, ‘대체 뭥미’ 한다. 이 책의 작가가 이들 모두를 당연히 읽었고, 본인의 기초로 체득하여 내면화시켜냈다는 사실은 그 인용구의 맥락을 보면 다 이해될 수 있다.
이 아저씨가 폴 비릴리오라고 한다. 기술사상가이자 예술평론가라고 하는데, 첨 들어봤다.
이 현학적이고 서울 건축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의 1부는 고도발전기 한국의 건축가들과 건축주들의 메시지, 주로 진보적인 관점에서 무엇인지를 전달한다. 역사 속에서 건축가가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 했고, 그 메시지와 시대가 조응하는 현장을 매혹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제반 조건과 그 조건 속에서 행위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며 어떤 조화 혹은 부조화가 발생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질곡 속 이미 유명해진 몇몇 건축물도 있고, 그렇지 않고 생판 그 앞을 지나가며 생판 몰랐던 건축물도 있으며, 몇몇 건축물들은 아마 대부분 알고는 있었으나 그런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것이었을 것이다. 특히 주목하고 재밋는 부분이 이 3번째 카테고리이고, 이 책의 유용성 역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연대 학생회관, 국방부 건물, 자유총연맹본관이 그것이다.
기억에 남는 건축에 관한 이야기 2개만 남기면, 국방부 구청사, 유진상가 순이다. 국방부 구청사와의 글에서 작가의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역사가 역진하지 않으리라는 경험칙이다”. 16년 10월 14일이 1쇄이니, 이 책이 출간이 딱 2주 후 JTBC가 최순실에 관해 첫 보도를 하였고, 그 3달 후 대통령이 탄핵되었고, 대통령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렀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는 듯이, 날카롭게 글을 써내려 갔다.
종로구에서 은평구로 혹은 은평구에서 종로구로 넘어가는 고개, 무악재에 위치한 유진상가 이야기도 흥미롭다.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이란 책을 읽으며 서울시의 공간에 대한 이해가 생긴 바, 은평구 개발의 아픈 역사를 다시금 이 유진상가로부터 느끼게 된다. 사실 원래 강남개발계획은 없었다. 늘어나는 서울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공간을 찾게 되었고, 무악재만 넘으면 바로 너른 대지가 나오는 은평구에 구체적인 계획까지 만들었지만, 지금의 서울을 재창조한 김윤옥 시장(준장 출신)께서는 전쟁 시 그 많은 인구를 한강 이남으로 옮기지 못할 것이라며 강남으로 단 번에 틀어버렸다고 한다. 뭐 꼭 그 대신 세워진 건물은 아니지만, 이런 역사속 에피스드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건물이 유진상가이다. 유진상가는 지금으로 치면 IFC나 롯데타워 쯤 되는 최신식 호텔+주거+상업시설이 포함된 건물이었다. 근데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 길 위에 세웠다. 왜 이렇게 지었나? 건물자체를 유사시 방어용으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그 길이 북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최단거리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1년에 한 번 씩 이런 재밌는 역사책을 읽게 된다. 15년에 박흥수 기관사의 철도사, 16년에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17년에는 주경철 교수의 서양근대,중세인물사...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였지만, 전공으로서의 역사와 흥미로서의 역사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책은 이전에 읽었던 역사책과는 다른 구석이 매우 많이 존재한다. 단순히 건축과 역사로만 구분 지을 수 없는 철학, 사회학, 정치학은 물론 언어학 등 어떤 규정할 수 없는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에 의한 측면이 강하다.
광주시민회관의 모습
그래서 이 책은 매우 먹물들이 좋아할 만하다. 아니 먹물들이 아니면 쉽게 이 책의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책이다. 문장도 어렵고, 개념도 어렵고, 인용하는 사람들도 어렵고, 내용도 어렵다. 결코 쉽게 쓴 책, 독자에게 친절함을 염두에 둔 책, 대중적인 교양서로 포지셔닝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즐거워하고 재미를 찾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스스로 양가적인 감성이 피어난다. 나 역시 먹물의 반영에 이르렀다는 자신(자만)이 하나라면, 그 먹물이란 때가 매번 좋은 감정으로만 남지는 않기 때문이다. 공부만 하는 샌님이라는 느낌적인 느낌, 세상 물정 모르는 백면서생의 이미지... 먹물이란 어휘에 포함되어 있는 ‘양가성’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본인이 먹물이라고 생각이 들면 한 번 읽어보시라.
이 책의 한 문장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사라진다” - 마르크스
“말 그대로 그 것은 난입이었다. 난입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 자격이나 근거도 갖추지 않은채 장에 뛰어드는 정치적 행동’을 가리킨다. 날품팔이, 부랑자, 구두닦이, 노동자… 애초부터 필드로 난입하지 않으면 목소리를 낼 기회 자체가 박탈된 사람들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역사의 그라운드 한복판에 총을 들고 난입한 것이다. 오랜 차별과 야만적 국가폭력에 노출된 지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킨 것은 19년 전 반란군 탱크에 짓밟혀 비명횡사한 ‘시민’이라는 이름이었다.” - 광주를 기억하며.
“남영동의 원형 철제 계단과 공간 사옥의 원형 계단
공간 사옥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흥분과 신비감을 느꼈지만
남영동 분실에 징발된 사람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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