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작리뷰] <증인>, 우리는 '증명하려' 사는 것이 아니다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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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작에 대한 단상 22

<증인> 우리는 '증명하려' 사는 것이 아니다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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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오가는 무수한 설전과 증거들은 모두 '이해'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사진 : 다음 영화 <증인>(2019)

<증인>은 한 사망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 ‘자폐아’였다는 설정도 관심을 끌지만, 무엇보다 그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이해’로 점철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의 장이다. 다만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주인공 순호(정우성 분)가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만나는 것 역시 그 시작은 의뢰인을 이해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리는 각자가 처한 상황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표면에 드러난 데이터만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재판 역시 증거재판주의다. 모든 사실은 ‘드러난’ 증거에 입각해 해석된다. 변호사와 검사가 법정에서 재판에서 한 사안을 두고 싸우는 것도 결국은 ‘누가 더 드러난 것을 자신의 주장에 맞게 펼치는가’의 싸움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증거를 만드는데 너무 골몰하느라 본질을 잊어버리는데 있다.

영화 속에서도 이 문제는 점점 덩치를 키우며 드러나기 시작한다. 처음 변호사 순호와 검사 희중(이규형 분)이 다퉜던 쟁점도 노인이 살해당했느냐, 아니면 자살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그러나 유일한 목격자 지우(김향기 분)가 증인으로 채택되면서 문제는 지우의 증언능력이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 더 나아가서는 자폐아가 정상인과 같을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변질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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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포기하고 출세를 향해 달려가는 순호. 그러나 그런 포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진 : 다음 영화 <증인>(2019)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증거가 본질을 흐리는 일’이 꼭 자폐아 지우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거다. 주인공 순호 역시 질환에 걸린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아야하는 자신의 사정이 있지만 겉으로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표면’은 그저 이상을 포기하고 이익으로 돌아선 속물, 변절자로, 나이 때문에 사랑조차도 포기한 인간으로 비춰질 뿐이며 그 스스로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해’는, 이익을 위해서만 추구된다. 순호의 이상, 타인을 돕고 헌신한다는 그의 이상, 즉, 민변에서의 경험 역시 로펌의 이미지 세탁 용도로 쓰인다. 그의 본질은 겉을 꾸미는 화려한 경력에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순호가 지우를 이해하려는 것도 처음엔 모두 승소라는 이익을 위해서 시작된다. 사건의 해결이 아닌, 단지 법정에서 이기기 위한 재료로써 말이다. 영화 속에서 자주 묘사되는 ‘표정’역시 그렇다. 본래 표정은 감정을 표현하는데 쓰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감정을 숨기는데 쓰인다.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겉으로 드러난 증거가 그 본질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자신을 증거하는 일에 서툰, 아니, 불가능한 지우로 인해 균열이 생기고 만다.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정상’인 우리는 이상해지고, 자폐아 지우는 정상처럼 보인다. 지우는 자신의 생각을 잘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걸러내지 않은 생각과 감정을 마구 뱉어낸다. 우리는 우리를 증거하는 외연에만 집중해 이 사실이 낯설게만 다가온다.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지우에게 순호가 ‘상대방의 말을 다 듣고 전화를 끊는 거야’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통화를 하는 이유는 상대와 대화하기 위해서지,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우는 지우의 방식대로 상대와 효과적으로 교감하고 있는 셈인데, 순호는 지우를 공부하면서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이 어딘가 이상해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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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증명을 강요 받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무엇을 위한 증명일까? *사진 : 다음 영화 <증인>(2019)

실로 우리의 삶도 그렇다. 열심히 살기는 하는데, 행복하려고 사는데, 어느새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져간다. 죽도록 돈을 버는데 정말 죽겠다. 돈을 벌려고 살아가는 것인가, 살기위해 돈을 버는 것인가 그 경계도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나는 왜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도달하고 만다.

“자폐아가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요.”
“자폐아가 아니면 지우가 아니잖아요.”

<증인>은 여기에 꽤 세련된 해답을 내놓는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우리를 정의하는 외피 때문이 아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행복을 찾으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고 증명하는 방법을 배웠을 뿐,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경쟁, 승부, 승리의 가치에 집착하면서 개인의 행복을 도외시하게 만드는 사회의 시스템이 절대적이라고, 현실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본질은 껍데기가 아니다. 출세를 못하면 어떤가. 변호사가 아니면 어떤가. 나이가 많으면 어떤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혼녀고 딸이 있으면 어떤가. 나는 행복한가, 사랑하는가, 즐거운가. 우리가 정작 질문해야할 질문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영화 속에서 지우가 말하는 ‘좋다’의 의미는 중의적이다. 실로 지우의 질문은 당신이 ‘좋은’ 사람인지,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지 상대에게 묻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증인>은 시종일관 우리가 진짜 질문해야할 방향이 어디인지 우리 자신에게 깨우쳐준다. 그리고 그 질문의 방향을 잘 잡았다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도 알려준다. 가까운 행복도 찾지 못하면서 저 멀리 떨어진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증거는 해답을 위해 필요할 뿐, 우리는 우리에게 산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영화 <증인>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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