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23)
반추反芻 (23) - 운희의 죽음
태식이 눈을 떴을 땐 유리창을 두드리며 비가 오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이미 뉴스에서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 올 줄은 몰랐었다.
태식은 문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태식이 누웠던 자리 쪽으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하얀 젖가슴이 얇은 천에 반쯤 덮여진 채 드러나 있었다. 태식은 침대의 시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마음속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태식은 일어서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비오는 산속의 아침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주었다. 말끔히 씻겨 진 풀잎들과 나뭇잎들이 생생한 냄새를 풍기는 듯 했다.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는 태식의 등 뒤에 문희가 다가서며 껴안았다. 무심히 시선을 내리던 태식은 문희의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에 머리가 아찔해짐을 느꼈다.
“잘 잤어?”
그녀는 여전히 태식의 등에 얼굴을 기댄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어젯밤…”
“아무 일 없었어!”
태식이 무언가 말을 하려 하자 문희는 얼른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그의 허리를 휘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1층 로비 옆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을 한 문희와 태식은 호텔 로비에서 우산을 빌려 나왔다.
그리고는 산 위쪽으로 손을 잡고 걸었다.
후두둑 우산을 때리던 굵은 빗방울이 어느새 그들을 감싸 안고 까마득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태식은 우산을 접었다. 문희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위에서 유리알처럼 부서진 빗방울이 가슴속으로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그들은 산이었다. 그들은 바위였다. 그리고 그들은 풀잎이었다. 폭포처럼 비를 쏟아 내리는 캄캄한 하늘아래 그들은 그저 보이지 않을 작은 점일 뿐이었다. 피하지 못할 비에 자신들의 온 몸을 맡겨둔 채 마주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눈에서 빗물이 흐르고 입술은 풀잎처럼 파리하게 떨리고 있었다.
호텔방으로 돌아 온 그들은 젖은 옷을 입은 채로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누구도 방해 받지 않을 자신들만의 공간을 가득히 채워가듯 몇 시간을 천정만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점심때가 훨씬 넘어서야 그들은 일어나 자신들의 옷을 벗어 꼭 쥐어짜서 다시 입고는 호텔을 나왔다. 로비에서 안내하던 남자가 태식과 문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식과 문희는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타자마자 사방 유리창은 뿌옇게 변해 있었고 그들의 머리에서는 뚝뚝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닦아요.”
문희가 내민 것은 그녀의 빨간색 손수건이었다.
태식은 문희의 손수건을 받아 문희의 얼굴을 닦아준 후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빗줄기가 부딪치는 운전석 유리창을 내렸다.
“넌 여기 있어!”
태식은 문희와 자신의 얼굴을 닦은 빨간색 손수건을 유리창 밖으로 내 던졌다.
공중으로 쏟아 오른 손수건은 깃발처럼 펄럭이다 강한 빗줄기에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빙긋 웃었다.
태식은 손바닥으로 앞 유리창을 대충 닦아내고는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좁은 차 안에는 문희와 태식의 몸에서 나는 살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빗속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비좁은 국도는 마치 태식과 문희를 위해 방금 포장해 놓은 듯 비에 깨끗이 씻겨 있었고 앞뒤로 어떤 차도 보이지 않았다.
K시에 접어들자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있었고 차는 어느새 K시 문막동 사거리 쪽을 향해 지나고 있었다.
“나 잊지 않을 거지?”
“……”
“내일 짐 꾸려서 엄마가 있는 곳으로 내려 갈 거야.”
“그만!”
“……”
태식은 소리쳤다.
“그렇게 말 하지 마! 영원히 떠날 것처럼 말 하지 말란 말이야.”
“태식씨.”
집이 가까워 올수록 그들의 이별도 가까워지는 것 같았고 빗방울은 다시 굵어지며 앞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광인교를 건너자 문막동 사거리가 눈앞에 보였다.
태식은 문막동 사거리에서 미연동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기 위해 운전대 틀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버스가 우회전하기 위해 중앙선을 넘어 달려들었고 태식은 순간적으로 운전대를 완전히 꺾어 돌렸다.
태식의 차가 미끄러지며 횡단보도를 막 지나며 인도로 올라탔고 인도 맞은편에서는 태식의 차에 놀란 아주머니가 주춤거리며 서 있었다. 태식은 아주머니를 피해 다시 핸들을 돌렸고 차는 휘청거리며 차 왼쪽 면으로 가로수를 들이받고 천변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태식씨-”
문희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태식의 귓가에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태식은 눈을 뜨고 먼저 문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악”
자신의 다리가 운전대와 시트사이에 걸려 나오지 않았고 이내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엄습했다.
“문희야! 문희야!”
그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위로 빨간 손수건이 덮여 있는 듯 했고 얼굴에서는 빗줄기처럼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태식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그리고는 피가 흘러나오는 이마 위쪽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그녀의 뜨거운 피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듯 흘러내리고 이내 태식은 몽롱해짐을 느꼈다.
“아니야… 이건… 꿈 일거야…”
희미해지는 태식의 눈에 누군가 창밖에서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