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래의 인문학 강의[009]: 제1장 역사 ||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1
제1장 역사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 그렇다면 오늘날, 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 이유
▶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1 : 현재가 바뀌면 역사도 바뀐다
▷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2 : 소결론에서 끌어낸 세 가지 진리
▷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3 :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항해하는 오디세우스
▷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4 : 카의 블랙유머--고대사 픽션이 부러워요
현재가 변하면 역사도 변한다
이야기는 역사에 대해 극단적으로 다른 인식을 가졌던 두 사람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됩니다. 영국에서 대략 60년 간격을 두고 두 번 있었던 『케임브리지 근대사』 간행 책임자의 글이었어요. 하나는 절정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대영제국 시절(1902년)에, 뒤엣것은 그 자신감을 거의 상실했던 시기(1956년)에 쓴 것입니다.
제가 강의할 때면 늘 강조하는 것인데 모든 연도를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중요한 연도는 기억해두거나 연표를 참고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따로 알게 된 정보가 연결되면서 좀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거든요. 위의 글 역시 잘 이해하려면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근대의 영국은 대영제국이라고 불렸어요. 그 시기는 대충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1783년에서부터 인도가 독립한 1947년까지[1]로 봅니다. 그 시기에서 가장 번영했던 시절이 빅토리아 시대인데 그게 1837년부터 1901년까지예요. 빅토리아 여왕이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시기가 1883년이었고, “우리에게 패배는 없다”고 말했던 게 1889년입니다. 19세기말은 대영제국의 절정기였던 겁니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대영제국이라고 하면 그저 식민지를 ‘좀 가진’ 시절이 있었던 영국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지도(이미지 11)를 보기 바랍니다. 이 지도는 영국이 침략한 적이 있는 국가들을 표시한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침략한 국가를 식민지로 만들지 못한 경우라고 해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말하자면 전 세계를 지배한 적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 덕분에 영어가 세계공용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미지 11
바로 그 시기에 영국의 권위 있는 한 역사가(액턴 경)가 그랬다는 겁니다. ‘우리는 구하지 못할 정보가 없고 문제가 있다면 뭐든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젠가 완전한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글쓴이 요약) 그런데 대영제국에 해가 진 1947년에서 10년이 지난 뒤, 말하자면 자신감이 폭삭 사그라들던 시절 영국의 또 다른 역사가(조지 클라크 경)는 60년 전의 액턴 경의 말을 언급한 다음,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런 기대를 조금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객관적인 역사적 진리 같은 것은 없다는 교리를 들먹입니다.
만일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의 변화를 안다면 역사에 대해 저토록 다른 인식을 가진 이유가 시대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카도 곧바로 그런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런 두 역사학자의 생각 차이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이런 차이를 만든 시대의 변화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카는 한참 뒤에 가서야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습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사실’이라는 낱말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재 모습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는 것을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으면 헷갈릴 수 있으니까요. 이 장에서 끊임없이 사용되는 ‘사실facts’이라는 낱말이 가진 다양한 개념은 나중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카의 설명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액턴 경이 그렇게 낙천적이고 자신만만하게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사실들이 대체로 만족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불변의 사실’로 취급해도 충분히 행복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지요.[2] 그랬으니 쓸데없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영제국의 영광이 사라지면서 늘 맞닥뜨리는 ‘사실’들이 마뜩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현재의 표면적 사실만이 아니라 이면적 사실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만족스럽지 않은 현실을 만든 역사(과거)에서 무엇인가 배워야 만족스러운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는 거지요. 현재의 사실이 불변의 상황은 아니며, 그것은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면 좀더 만족스러운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교훈을 얻으리라는 진보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역사란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 있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며 역사가의 관점으로 재구성된 것이라는(또는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소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 다음 이런 결론에 담긴 중요한 세 가지 ‘진리’를 정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