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호압사>

in #kr7 years ago (edited)


어린 나에게 어른들은 늘 '말 안 들으면 호랑이가 온다.' 하셨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호랑이가 당장이라도 입을 벌려 '아흥' 하고 달려들까 무서워 아버지 손을 꼭 잡곤 했다.

75년 전 소녀시절 때 아버지는 휴일이면 감수성 깊은 나와 다섯 살 아래인 남동생을 데리고 서울 근교 산을 다니셨다. 일제하에 북한산이라 이름 지은 삼각산(三角山)인 백운봉(白雲峰), 인수봉(仁壽峰), 노적봉(露積峰)을 광화문통에서 코스를 바꾸어 가며 전차를 타고 돈암동 종점, 효자동 종점, 영천 종점까지 가서 산을 올랐다. 처음으로 남쪽인 관악산(冠岳山)인 호압사 (虎押寺)에 간 날이다.

아버지는 '이곳은 호랑이를 모신 절이란다.'고 말씀 하셨다. 호압사가 자리한 호암산은 관악산의 한 줄기이며 숲보다 바위가 많은 산이다. 산사 위에 있은 커다란 바위는 홉사 호랑이가 누어있는 모습이어서 산 이름도 호암산이 되었다.
가파른 바위산을 땀을 닦으며 오르느라 숨이 차는데 호랑이가 떠올라 따라오면 어쩌나 싶은 무서운 생각에 미끄러져 손수건이 흥건하도록 피를 흘리고 무릎을 다쳤다. 그 후 나는 공부 한다는 핑계로 다시는 산행을 따라가지 않았다..

강산이 여덟 번 변하고 오늘, 아들하고 개발된 주택가를 지그재그로 한참 올라가니 초여름의 울창한 잣나무 숲의 송진 내음 물씬한 산등성이 보였다. 아들 손을 꼭 잡고 계단을 한발 한발 조심스레 오르니 속세(俗世)의 범뇌를 떨쳐 버리는 경계지점이라는 일주문 (一柱門) 이 보였다.
앞마당 경내에는 일찍부터 서둘러 공양하는 중생이 북적 거렸고 새롭게 말끔히 단청한 약사전(藥師殿) 이 이절의 규모를 말 하는 듯 아담하였다. 단아한 약사전 불단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오래전부터 내려온 옛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간 어쩌면 일제시대와 6. 25 동란을 겪었으련만 의연하게 목탁 소리에 귀 기우리며 초연한 미소를 지며 가부좌 틀고 앉아 있었다.

호압사 창건에는 호랑이가 주요 케릭터로 등장하는데, 조선을 건국한 1392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지(都邑地)를 옮겨 정한 태조는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범 바위가 누워 있는 산의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다'하는 방책으로 이곳에 절을 짓고, 호랑이를 누르는 곳이라고 해서 호압사 라고 이름 지었다.
호랑이는 고양이과에 딸린 금유동물이며 맹수(猛獸)다. 시베리아 유라시아지역 아무르호랑이, 중국 동남아, 백두산호랑이등 눈이 많은 혹독한 추운 지역에서 동물의 제왕답게 최상위 포식자로서 생태계의 균형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범은 착하고도 효성스러우며 아름다운 광채가 나고 싸움을 잘 한다. 인자하고 슬기롭고도 어질다. 씩씩하고도 세차고도 사납다.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인 연암(燕岩) 박지원이 쓴 '호질'(虎帙)이라는 소설의 첫 부분이다. 고대소설의 주인공으로 우리 조상들의 친숙한 동물로 수천년 영물(靈物)이자 산신령의 수호신으로 사랑을 받았다.

19세기 말경 조선 땅을 여행했던 영국인 이사벨라 비숍은 이런 말을 남겼다.
"조선 사람은 일년의 반을 호랑이 쫓느라고 보내고, 일년의 나어지 반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 문상을 가느라 보낸다."이렇게 우리네 일상생활에 끼친 영향이 엄청 났다는 것 그 호환(虎患)을 막기 위해 나라에서는 무시무시한 호랑이을 전담하는 군대 착호군(捉虎軍)도 만들었다.
대표적인 민화로는 '까치 호랑이'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 권력자와 민초(民草)의 관계를 풍자와 해학으로 멋지게 표현한 보희(報喜)풍, 즉 기쁨을 전하는 신비스런 창의력이 돋보인다.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에 '담배 피는 호랑이' 그림이 있는데 호랑이는 긴 장죽을 물고 있고 옆에서는 토기가 거들고 있다. 해학적이고 익살스런 민화로 '먼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들과 절에 다녀온 날 밤 뒤척이다 새벽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올해 장마가 지구 온난화로 일찍 온다 하더니 영 소식이 없다가,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는 천지의 운행을 따라 어김없이 찾아와서 반갑고 시원스레 마음을 적셔 준다. 구십 나이를 바라보는 내가 반백인 아들 손을 잡고, 어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르던 호암산을 다녀 온 뒤 새삼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리는 새벽이다.

                                             2017. 7. 8.![](https://steemitimages.com/DQmWBSSbuTAfDA2F5BZxGmNVNhD4pLCg3pQ9y9uubNj98xN/image.png)![](https://steemitimages.com/DQmWBSSbuTAfDA2F5BZxGmNVNhD4pLCg3pQ9y9uubNj98xN/image.png)![](https://steemitimages.com/DQmWBSSbuTAfDA2F5BZxGmNVNhD4pLCg3pQ9y9uubNj98xN/imag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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