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옥은 나의 고향>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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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은 나의 고향

추석이 지나고 썰렁한 가을바람이 옷깃에 스며들 때면 어머님은 나에게 낙엽 진 단풍잎과 은행잎을 주워오라 하셨다.

1930년대 지금은 허물어진 중앙청 가로수는 은행나무였고 세종로 거리는 어른 손바닥만큼 넓적한 푸르른 플라타너스가 심어져 있었다. 방과 후 가회동에 사는 친구와 삼청공원으로 가서 단풍잎을 주워오곤 했다. 며칠 동안 책갈피에 반듯하게 끼워 화려한 오색 단풍잎이 납작해지면 자랑스레 어머님께 보여 드렸다.

광화문통(신문로 1가) 우리 동네는 초가 지붕이 태반이고 큰 길가에 이층 양옥이 몇 집 밖에 없었다. 우리 집은 서민이 사는 검이불루, 즉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는 소박한 모양새를 갖춘 한옥 마을에 있었다.

다가 오는 겨울 추위에 대비해서 연중행사로 어머님은 행랑에 사는 아저씨 내외와 문짝들을 떼어내어 일 년 묵은 먼지를 닦아내고 새하얀 한지로 말끔히 도배를 하셨다. 방마다 안 쪽 문과 덧문짝들이 달려 있으니 앞뜰과 뒷마당에 쭉 늘어 놓은 문짝들이 저마다 청명한 햇살을 받아 솔솔 가을바람과 밀고 당기는 팽팽한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루 동안 말린 문짝이 제자리에 들어 가면 어머님은 내가 말린 단풍잎과 은행잎을 가지고 오라 하시며 그 단풍잎으로 문짝에다 아기자기 문양을 장식하시고는 “아가, 예쁘지.” 하고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석양 빛에 물들어 화사해진 단풍잎을 바라 보시던 어머님의 눈빛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당시 어수선한 일제의 감시 하에 아버님은 늘 집을 떠나 계시는 때가 많았다. 팔도의 친구분을 찾아 몸을 피하시면서도 우리들을 위해 그 지방 특산물을 인편에 챙겨 따뜻한 사랑 담아 보내셨다. 어느 해인가는 내가 근시라고 동태 눈 말린 것을, 어떤 때는 메뚜기 볶은 것을 한 푸대 보내셔서 겨우내 간식거리가 되기도 했다.

학교에 다녀오니 문풍지를 마무리하시는 어머님 곁에서 새 창호지 바른 것을 남동생이 손으로 퉁기며 찢어 놓아 혼나고 있었다. 치기 어린 이 장난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문창살 작업이 끝나면 벽지 바르는 일이 있고 다음은 방바닥 도배를 한다. 처음에 초배지를 바르는데 반듯하게 다져진 진흙 바닥에 초배지 두 겹을 바르고 며칠을 말린 후 기름 먹인 샛노란 장판지를 바른다. 이 작업은 도배장이 아저씨가 와서 도와주지만 끝나고 나면 잠시 앉을 틈 없이 어머님은 매일 들기름을 묻힌 마른 걸레로 정성스레 반질반질 윤이 나게 길들이며 문지르고 계셨다.

선조들의 지혜로 이뤄진 한옥 민가의 특징은 웅장하지 않고 조촐하다는 것이다. 한지를 바른 창살문은 통풍은 물론 시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운치와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해 준다. 한옥의 중심인 굵은 서까래가 육중하게 받치고 있는 대청마루는 그 기품과 질서를 성주신의 기가 흐르는 신성한 공간이라 우리 조상은 믿고 있었다.

추위에 움추렸던 겨울이 지나고 사랑방 뜨락에 매화꽃 순이 뾰족이 올라오고 들썩들썩 땅의 움틈이 있다. 양기의 봄기운을 받아 집안의 문들이 활짝 열리며 봄맞이 하느라 부산해진다. 여름의 햇볕이 열기를 몰고 오면 대청마루에 고운 대발을 쳐 사통팔방 앞뜰 뒷마루 할 것 없이 시원한 바람을 넘나들게 한다. 장대 같은 장맛비가 오는 날은 물기 머금은 한옥 지붕의 기왓장이 촉촉하게 빛나고 차양 없는 처마에서 고르게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숨을 죽이며 귀 기울이고 있었다. 빗물이 섬돌 앞 흙 마당에 작은 물결을 내어 댓돌을 지나 마당 한가운데 꽃밭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쫓으며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파초, 그 둘레에 봉선화, 백일홍, 옥잠화등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랑방의 동창에도 여름이면 고운 발이 쳐 있어 아버님이 안 계시는 날에는 썰렁하고 고즈넉하게 흐르는 적막 속에서 독서 삼매경으로 나를 인도하였다. 세계문학전집과 푸른색으로 작고 예쁘게 장정된 이와나미 문고의 셰익스피어 전집 등 한쪽 벽의 책장은 어린 날의 마음의 안식처였다. 드높은 가을 하늘을 보며 흰 구름에 실리어 저 끝은 어디일까 하고 미지의 세계에 꿈의 나래를 피우곤 했다.

안방의 아랫목은 어머님의 향기가 그득한 자리다. 별로 담 밖 나들이를 하지 않으셨던 어머님은 당시 드물게 일본 월간지인 <주부의 벗>을 보셨다. 싱거 미싱은 시집 와서 할부로 장만하셔 늘 책 부록을 보시며 바느질이나 뜨개질로 멋지고 예쁜 옷을 만들어 주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구들장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온기와 놋화로 잿더미 속의 불씨 위에 손을 비비며 추위를 녹였다. 그러나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오는 겨울이 길어 몸이 시리도록 추운 기억들이다.

일설에 따르면 육식을 하는 서양 사람에 비해 채식을 하는 한국 사람이 창자의 길이가 길어 체내 혈액이 대부분 상체에 모여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하체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따뜻한 바닥에 앉아 생활하는 두한족열 방식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온돌이라 한다.

전통적인 온돌의 구들장은 방구들이라고도 한다. 황토를 으깨어 구들 돌이 받치고 있어 아궁이에 불울 지펴 돌을 달구면 뜨거운 열기가 방바닥에 깔린 구들장을 지나면서 오랜 시간 머물게 하는 원리다. 기본적인 구조는 아궁이, 불목, 구들개자리, 구들장, 굴뚝으로 구성되어 있어 우리 선조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지금도 몸이 으스스 한기가 도는 겨울이면 온돌의 뜨끈한 구들장에 앉아 오순도순 몸을 녹이던 어린 날의 정겨운 추억이 생각난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열 번째 세계문화유산에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의 양동마을이 ‘한국의 역사마을’로 등재되었다.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인정받는 것이 기쁘고 향후 우리가 더욱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 할 과제이다.

                                                   201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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