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버닝
보이지 않는다해도 실존하고 있으며
보인다해서 다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벤에게 해미는 그저 태워야할 쓰레기다. 극 중에서 말하는 비닐하우스.
벤은 "눈물이 안났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고 한다.
벤에게는 증거와 보이는 것들, 즉 기표화 될 수 있는 화려함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돈과 좋은 차, 좋은 집이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모든 것이자 존재 이유다. 즉 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지배하는 세계관이다. 보여져야 살아남는다. 벤은 많은것을 집어삼키는 세계라 끝없이 여자들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색칠한다. 극 마지막 쯤 여자를 화장시켜주는 장면도 그걸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해미와 우리들은 그러한 세계관이 틀린 것을 알면서도 휘둘린다. 본질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도 많이 소유한 벤 앞에서 작아진다. 종수와 만날 때, 보이지 않는 귤과 고양이와 우물을 사랑한 해미는 결국 벤을 만나고부터 종수를 완벽히 배제하기 시작한다. 해미는 종종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냥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건 도피적이다.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고 또 추면서도 결국 클럽에서 자신을 놓아버리는 해미는 무엇이 진정한 자아인지 알면서도 스스로 헤맨다.
그러나 해미가 완전히 주저 앉은건 벤같은 세계관을 이 사회가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벤이 표상하는 세계관이 그만큼 강력하고 매력적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종수는 보이지 않지만 실존하는 사람이다.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서툴다. 어렸을 적 어미의 옷을 태우며 스스로를 종속시키지만 벤을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억압되어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없는 것에도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 보이지 않으나 분명 실존하는 것을 믿어주는 사람이다. 즉 기표와 관계없이 기의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그런 종수는 해미에게 하나뿐인 지지자이자 지향적 세계관이다. 해미의 가족조차 믿어주지 않은 우물을 종수는 믿는다.
벤과 부딪히고 나서야 종수는 알을 깨기 시작한다.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내가 누군지, 당신은 누군지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는 종수지만, 벤이 틀렸다는 것만은 안다.
엄마의 옷을 태우면서 갇혀버렸던 종수는 벤을 태우면서 비로소 주체성을 지니고 실존을 증명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답게 은유가 많고 자아에 대한 탐구가 많다. 몇몇 영화 후기에서 고양이는 뭘 의미하고 귤은 뭘 의미한다 는 등의 '정답찾기'가 보이는데 별 의미없는거 같다. 은유의 영화는 내 생각대로 색이 입혀지기 때문에 그냥 각자가 느낀 모든게 정답이니까.
끝까지 달리고 이름을 불러주며,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믿으며 주체성을 지킬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쓸모가 없는것' 이라는 세계관에 색칠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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