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6)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6)
카이사르는 넘버 1과 넘버 2 모두에게 빨대를 꽂는
세계적인 넘버 3가 됨으로써 1인자로 발돋움을 했다.
넘버 1과 넘버 2가 다툴 경우 넘버 3는 둘의 싸움을 더 부추겨 어부지리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 작전이다. 넘버 3였던 카이사르는 넘버 1인 폼페이우스와 넘버 2인 크라수스를 화해시키는 상식 밖의 전술을 택했다. 그는 두 사람을 쌍두마차로 묶은 다음 자신이 마차를 능수능란하게 조종하는 마부 역할을 맡아야 더 빠르고 힘차게 제국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번에도 카토만이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 카토의 예상대로 로마 공화정의 종말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불화가 싹튼 날이 아니라 우정이 맺어진 날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의 지지와 크라수스의 후원은 카이사르라는 호랑이에게 양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았다. 집정관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집정관에 선출된 그는 민중 호민관이 추진할 법한 토지 관련 법안들을 서슴없이 밀어붙였다. 원로원은 당연히 반대했고, 이에 카이사르는 민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폼페이우스는 군사력을 동원해 카이사르를 뒷받침했는데 그는 귀족들의 반감을 자초하는 거친 언사와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지려는 목적으로 딸인 율리아를 아버지뻘 되는 나이인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냈다. 카토는 정략결혼을 통해 정치권력을 주고받는 세태를 개탄했다.
카이사르의 오랜 정적인 카토는 물론이고 동료 집정관인 비불루스 또한 카이사르의 급진적인 토지개혁정책을 격렬히 성토했으나 카이사르의 독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불루스는 자택에 칩거했고, 카토는 지방근무의 형식으로 이탈리아 바깥으로 쫓겨났다.
카이사르는 키케로 축출 공작을 원활하게 진행하고자 클로디우스를 호민관 자리에 밀어 올렸다. 카이사르의 전처와 불미스러운 추문에 휩싸였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는 쥐만 잡을 수 있다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가리지 않았다. 민중은 카이사르에게 알프스 양편의 두 갈리아 지방과 일리리쿰을 관할지역으로 주는 것으로 보답했다. 임지로 떠나는 카이시르에게는 총 4개 군단의 병력이 배정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원정을 카이사르의 인생 1막과 2막이 나뉘는 분기점으로 평가했다. 1막에서의 카이사르는 교활한 정치꾼의 배역만 주어졌다. 그는 2막에 들어서야 비로소 위대한 정치가의 역할을 맡게 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보여준 업적과 지도력이 그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왜냐면 수많은 무시무시한 야만인들로 가득 찬 넓고 거친 갈리아 땅을 카이사르는 채 10년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 안에 로마의 발아래 완전히 무릎 꿇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원정은 현대의 인도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는 인종청소라고 부를 수 있는 엄청난 파괴와 무자비한 학살을 불러왔다. 카이사르의 원정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갈리아인들의 숫자가 무려 3백만 명을 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구수를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명 피해였다.
-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6)
카이사르는 넘버 1과 넘버 2 모두에게 빨대를 꽂는
세계적인 넘버 3가 됨으로써 1인자로 발돋움을 했다.
넘버 1과 넘버 2가 다툴 경우 넘버 3는 둘의 싸움을 더 부추겨 어부지리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 작전이다. 넘버 3였던 카이사르는 넘버 1인 폼페이우스와 넘버 2인 크라수스를 화해시키는 상식 밖의 전술을 택했다. 그는 두 사람을 쌍두마차로 묶은 다음 자신이 마차를 능수능란하게 조종하는 마부 역할을 맡아야 더 빠르고 힘차게 제국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번에도 카토만이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 카토의 예상대로 로마 공화정의 종말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불화가 싹튼 날이 아니라 우정이 맺어진 날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의 지지와 크라수스의 후원은 카이사르라는 호랑이에게 양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았다. 집정관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집정관에 선출된 그는 민중 호민관이 추진할 법한 토지 관련 법안들을 서슴없이 밀어붙였다. 원로원은 당연히 반대했고, 이에 카이사르는 민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폼페이우스는 군사력을 동원해 카이사르를 뒷받침했는데 그는 귀족들의 반감을 자초하는 거친 언사와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지려는 목적으로 딸인 율리아를 아버지뻘 되는 나이인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냈다. 카토는 정략결혼을 통해 정치권력을 주고받는 세태를 개탄했다.
카이사르의 오랜 정적인 카토는 물론이고 동료 집정관인 비불루스 또한 카이사르의 급진적인 토지개혁정책을 격렬히 성토했으나 카이사르의 독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불루스는 자택에 칩거했고, 카토는 지방근무의 형식으로 이탈리아 바깥으로 쫓겨났다.
카이사르는 키케로 축출 공작을 원활하게 진행하고자 클로디우스를 호민관 자리에 밀어 올렸다. 카이사르의 전처와 불미스러운 추문에 휩싸였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는 쥐만 잡을 수 있다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가리지 않았다. 민중은 카이사르에게 알프스 양편의 두 갈리아 지방과 일리리쿰을 관할지역으로 주는 것으로 보답했다. 임지로 떠나는 카이시르에게는 총 4개 군단의 병력이 배정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원정을 카이사르의 인생 1막과 2막이 나뉘는 분기점으로 평가했다. 1막에서의 카이사르는 교활한 정치꾼의 배역만 주어졌다. 그는 2막에 들어서야 비로소 위대한 정치가의 역할을 맡게 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보여준 업적과 지도력이 그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왜냐면 수많은 무시무시한 야만인들로 가득 찬 넓고 거친 갈리아 땅을 카이사르는 채 10년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 안에 로마의 발아래 완전히 무릎 꿇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원정은 현대의 인도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는 인종청소라고 부를 수 있는 엄청난 파괴와 무자비한 학살을 불러왔다. 카이사르의 원정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갈리아인들의 숫자가 무려 3백만 명을 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구수를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명 피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