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정신현상학 1>을 읽고
독일이 배출한 천재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대표적인 저서는 <정신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옮긴이인 임석진은 헤겔의 ‘절대지’ 또는 ‘절대적 자기인식’은 실로 근대 서양이 낳은 합리주의 정신의 절정을 이룬 것임에 틀림없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에게 이 헤겔 특유의 변증법적 전환의 논리에 담긴 사변성의 극치는 단지 인류의 정신문화를 찬연히 빛내준 ‘사유의 영웅’을 대표한다는 데서 그칠 문제만도 아니라고 한다. 그보다도 오히려 여기서 미래를 향한 심대한 함축적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는지를 눈여겨봐야만 하겠다는 것이다.
<정신현상학>은 상당히 방대한 분량의 책인데 내가 읽은 1권의 경우 의식, 자기의식, 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1>의 33쪽에서 철학이란 그 본질상 특수적인 것을 내포하는 보편성을 지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다른 어떤 학문의 경우보다도 목적이나 최종 결론 속에서 사태 자체가 완전무결하게 표현될 수 있으니, 실제적인 전개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잘못된 생각이 다른 어떤 학문에서보다 더 심하게 제기되곤 한다고 쓴다. 예컨대 철학이 아닌 해부학의 경우라면 신체의 각 부분을 생명 없는 물체로 다루듯해서는 학문의 내용이 되는 문제의 핵심을 잡아냈다고 할 수 없으므로, 누구나가 이보다 더 나아가서 특수한 각 부분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한다. 어찌되었든 적법하게 학문이라는 이름을 걸칠 수 없는 해부학과 같은 잡다한 지식의 취합물일 경우에는 목적에 대해서와 같은 일반적인 논의와 신경이나 근육에 대해서와 같은 내용 자체에 관한 기술적이고 몰개념적인 논의가 서로 구별되어 있지 않은 것이 보통이라는 게 헤겔의 생각이다. 그러나 철학의 경우에는 총론과 각론 사이에 격차가 있게 마련이어서, 물론 각론도 제시되어야 하지만 이것으로 진리가 포착될 수는 없다는 것은 철학 자체에 의해서 명시된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렇듯 철학과 학문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일관하며 책을 써 나가는데,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철학이 별로 쓸모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요즘엔 ‘철학’,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책들이 많고 교양 강좌도 많이 열리고 있어서 철학이 마치 ‘교양’정도로 치부되는 현실이다. 그러나 철학은 여유 있는 자가 누릴 수 있는 교양 정도의 지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05쪽에 의하면 학문, 예술, 기능, 수작업 등과 같은 경우에는 흔히 이를 터득하는 데 다방면의 노력을 수반하는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하면서도 철학에 대해서는 엉뚱한 편견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즉 눈과 손가락이 있고 거기에 가죽과 도구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구두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듯, 이성에만 의존하여 이를 철학의 척도로 삼는다고 해서 누구나 거리낌없이 철학을 하거나 철학을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마치 밭만 있으면 누구나 구두장이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더 나아가 이는 지식이나 연구가 결여되어 있어야만 비로소 철학이 획득될 수 있고 지식이나 연구가 시작되면 이미 철학은 끝난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헤겔은 본래의 철학에서는 정신이 오랜 교양의 도정을 거치며 심오하고도 활력적인 운동 속에서 자기의 지에 도달하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의 직접적인 계시라거나 본래적인 철학의 지(知)나 철학 이외의 지도 갖추지 않은 건전한 상식이라는 것을 내세워 이를 장구한 교양의 도정을 송두리째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등가물로 간주하는 나머지, 마치 치커리가 커피의 대용품인 양 치켜세워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유한다고 자처하면서도 추상적인 명제나 더욱이 명제들 사이의 연관성을 투시할 만큼의 사유도 행하지 못하는 무지 속에서 형식도 품위도 갖추지 않은 저속한 무리들이 자신들이야말로 사상의 자유로움과 관용을 터득한 천재라는 따위의 장담이나 하고 다니는 풍이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라고 헤겔은 이 책에서 ‘얼치기 지식인’들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하는데, 요즘 현실과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37쪽에서는 교양을 쌓아가려는 출발단계에서 의식주와 같은 실생활을 벗어나려면 언제나 보편적인 원칙이나 관점에 따라 지식을 획득하고 우선 사태 전반을 사유할 수 있을 만큼의 훈련을 거듭하고 난 다음 근거를 제시하고 문제의 가부를 판정함으로써 구체적이고 내용이 충만한 대상의 성질을 명확히 파악하여 이를 제대로 터득했다고 할 만한 진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진리가 현존하는 참다운 형태로는 오직 학문적 체계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 물론 헤겔의 이러한 확고한 믿음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싶기는 하다. 진리는 예술의 형태로도 얼마든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우선 접어놓고 헤겔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보도록 하겠다. 헤겔은 철학이 학문의 형식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 말하자면 철학의 진의라고 할 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떨쳐버리고 현실적인 지를 목표로 하여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헤겔이 지향하는 것이다. 지가 학문으로 승화되어야만 할 내적 필연성은 지의 본성 속에 깃들어 있는데,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은 오직 철학 그 자체의 서술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헤겔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신현상학 1>의 핵심 개념인 이성이란 무엇인가. 278쪽에 의하면 이성이란 존재는 곧 자기의 것이라는 데 대한 의식이다. 사념이나 지각의 대상이었던 사물을 개념으로서 포착하는 것, 다시 말하면 사물을 사물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사물의 의식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이성이 지향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이성은 세계 전체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성은 자기가 세계 속에 현존해 있다는 것, 또는 세계의 현재가 이성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1>은 깊이와 내용이 방대하여 언제 읽어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철학의 매력과 헤겔 철학의 진수를 맛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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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정신병리학 책에도 참 많이 인용되더라구요. 나중에 꼭 정독해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