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lyLee's Life Magazine 21. 도쿄일기 4일째. 진보쵸 고서점 탐방과 겨울의 우에노 동물원

in #kr6 years ago

LilyLee's Life Magazine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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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일기 4일째.


2017년 12월 5일 화요일 맑음.

진보쵸에 가기로 했다. 10시쯤 진보쵸에 도착했는데, 역에서 내려 가다보니 슈에이샤나 카도카와쇼텐 같은 대형 출판사들의 멋진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고서점 뿐만 아니라 유명 출판사들도 이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와서야 알았다. 한창 만화를 열심히 보던 어린 시절 자주 접하던 이름난 출판사의 건물들을 직접 보니 왠지 신기한 기분이었다.

도토루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P양을 만나 서점을 구경했다. 고서점은 조용하고 (당연하게도) 책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잡지와 사진집 등을 주로 파는 magnif라는 가게에서는 잡지를 하나 샀다. 독일인가 유럽 쪽의 잡지였는데 레이아웃이나 실려있는 작품들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가벼웠다. P양은 오래된 잡지를 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잡지들도 몇십년 지나면 고서점에서 팔릴 수 있을까? 근데 그 때까지 가지고 있을 것 같진 않다.


진보쵸의 어느 고서점

11시 30분이 조금 넘어 일찍 점심을 먹기로 하고 카츠카레가 맛있다는 근처 밥집을 가기로 했는데, 가게 앞엔 벌써 직장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어쩔까 하다 일단 줄을 섰는데 생각보다 회전이 빠르고 우리 뒤에도 사람들이 많이 서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여러 메뉴가 있었는데 카츠카레가 유명한 것 같아 카츠카레를 시켰다. 정식 장사를 주로 하는 일본의 밥집이라 좁은 자리에 합석은 기본이었다. 부부로 보이는 커플의 맞은 편에 나란히 앉아 카츠카레를 주문하고 앉아 있었다. 금방 식사가 나왔는데, 이곳의 카레는 매우 진한 색이었다. 정말 카레는 집집마다 다 다르다. 하이라이스가 생각날 정도로 검은 빛이었다. 위에 올라간 돈까스도 제법 두툼했다. 그 사이 맞은 편의 사람은 넥타이를 맨 남자 직장인 둘로 바뀌었다. 한 명은 말랐고 한 명은 뚱뚱했는데, 곱빼기 두 그릇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메뉴를 고민하던 직장인

P양은 돈까스만 다 먹고 밥은 거의 먹지 않았는데, 나는 밥알 한 톨 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유난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는데, 남편과만 식사를 하다가 이렇게 다른 사람과 밥을 먹어보면 평소에 얼마나 많이 먹는지를 새삼스레 깨닫는다. 아무튼 괜찮은 가게였다. 진보쵸에 있다면 들러서 먹어볼만한 곳.



까만 카레를 얹은 카츠카레. 맞은 편의 손들은 모르는 사람

전쟁같은 식사를 하고 나와서 고서점 몇 군데를 더 들렀다. 우키요에 같은 것들도 많았는데, 하나같이 비쌌다. 그나마 저렴한 건 3천 엔 정도였는데, 조금 고민하긴 했지만 사지는 않았다.

가장 좋았던 곳은 문구점이었다. 분포도(문방당)이라는 가게였는데 눈이 돌아가는 예쁜 문구류가 많았다. 좋아하는 문구 브랜드 '아이우에오'+의 노트를 사고 폴라로이드를 붙일 마그넷을 샀다. 그림을 그리는 P양은 펜을 샀다.



우리 집 부엌 마그네틱 보드에는 우리 집을 다녀간 사람들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붙어 있다. 나는 좀 어려서 결혼을 한 편이었고 캠퍼스 커플이었던 탓에 겹치는 친구도 많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홈파티를 열고 그랬었다. 당시엔 논현동에 살았기 때문에, 집에서 술먹다가 삘 받으면 클럽에도 가고 그랬다. 그래서 마그네팃 보드는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빼곡하다. 개중에는 이제는 헤어져 볼 수 없는 커플의 사진도 많다. 영원히 볼 수 없는 조합이다.



스타벅스 안에 앉아 바라본 바깥

피곤해서 스타벅스에 앉아 쉬기로 했다. 어제 보기만 했던 텀블러를 하나 샀다. 핑크색의 루돌프 텀블러인데, 일본에만 파는 것이다. 텀블러를 정말 오랜만에 사는 것이어서 아직도 '텀블러 사면 음료 하나 무료' 쿠폰이 있는지 잘 몰랐는데, 점원이 아무 말 않길래 물어봤더니 쿠폰을 준다고 해서 차가운 유자차를 공짜로 마셨다. 모르면 그냥 넘어갈 뻔 했다. 유자차는 적당히 달고 상큼한 것이 맛이 좋았다. 앉아서 영수증을 정리하고 P양이 산 펜을 써보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했다.

우에노 미술관을 같이 가려고 했는데 피곤하기도 해서 동물원만 가기로 했다. 역으로 가는 길은 노란 은행나무가 많았다. 키가 큰 그 아이들은 풍성한 노란잎을 온몸에 두르고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내리는 노란비가 예뻤다. 우리도 지나가던 사람들도 다들 고개를 들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은행비가 내리던 거리

진보쵸에서 우에노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타는데, 3개 노선의 역이 마주치는 곳이었다. 재미있는 건 역 이름이 다 다르다는 거였다. 치요다선은 신오챠노미즈역, 신주쿠선은 오가와마치역, 마루노우치선은 아와지쵸역이었다. 도쿄는 정말 복잡한 동네다.



우에노 동물원은 거의 십년만에 오는 것 같았다. 마침 판다가 새끼를 낳았다는데, 우리가 떠나고 나서부터 공개가 된다고 했다. 판다는 평생 배우자를 하나만 두고, 교미도 1년에 두어번 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새끼를 낳기 매우 어려운 생물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우에노 동물원에서도 판다가 새끼를 낳은 것은 대단한 경사라고 했다.

우에노 동물원 뒤편으로 들어가니 바로 펭귄이 나왔다. 펭귄은 참 귀여운 녀석들이다. 굿즈샵이 또 바로 보여 열심히 굿즈 구경을 했다. 신세를 지고 있는 H언니를 위해 귀여운 판다 틴 케이스에 들어있는 고프레를 샀다.



귀여운 펭귄



독수리 모양 보자기로 귀엽게 장식한 크래커

겨울이라 그런지 많은 동물들이 실내에 있었다. 하마는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이게 또 장관이었다.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으면 사육사가 파란 양동이에서 먹을 것을 퍼서 하마의 입에 넣어줬다. 하마의 이빨 사이가 거무튀튀했는데, 동물들은 양치질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그렇다면 인간이란 얼마나 많은 보살핌이 존재하는 나약하고 귀찮은 생물이란 말인가! 뭐, 원시인은 양치질 같은 거 하지 않았다고?



밥먹는 하마

개구리들과 거북이를 구경했다. 푸른빛을 띠는 개구리는 신비로웠고 거북이는 여전히 좋았다. 개구리도 거북이도 좋아한다. 특히 여름밤의 개구리 우는 소리가 좋다.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이 지난 후 들리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캠핑을 가면 자주 듣곤 했는데 강릉으로 이사온 지금은 집에서도 들을 수 있다.

거북이는 어렸을 때 집에서 키웠었는데, 그 당시엔 집에서 거북이를 키우는 게 유행이었다. 눈 옆에 붉은 무늬가 있는 '미시시피강 붉은귀 거북'. 그 때 미시시피강이 어딘지 아빠한테 물어보고 그랬었다. 처음엔 세 마리를 키웠었는데 몇 마리는 도망가고 죽고 해서 마당에 묻어줬더랬다. 한 마리는 외로우니까 또 사고 죽고 또 사고 해서 몇 년 동안 계속 키운 것은 두 마리였다. 최종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친척 집에 갖다줬는데 그 후로도 거기 놀러가면 수족관 속에서 눈을 꿈벅거리고 있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보이지 않게 됐다.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인지 아쿠아리움에 가도 늘 바다거북을 찾았다. 마이애미 아쿠아리움에서 받은 거북이 인형은 지금도 소중하다. 어느 인형도 소중하지만.



갈라파고스 거북이

늦게 입장한 탓인지 주위가 어둑해지는 데다 퇴장시간이 가까워 왔길래 서둘러 북극곰을 보았다. 북극곰은 퇴근 시간이 다 돼서 흥분했는지 우리 안에서 날뛰고 있었다. '아 얘 퇴근하고 싶은가봐'하면서 낄낄댔다.

기린을 보고는 조금 슬퍼졌다. 목이 길고 키가 큰 기린이 좁은 우리에서 목을 쭉 뻗고 있었는데, 정말 답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물원에 가지 않으면 동물을 볼 수 없으니까, 동물원은 좋다. 슬퍼서 못 가는 수준은 아닌 게다.



빨리 퇴근하고 싶어 안달이 난 북극곰

돈키호테에서 살 것이 있어서 우에노 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우에노 동물원에서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 주위는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나오는 길에 예쁜 루미나리에를 보고, 호수 근처 신사에서는 뭔가 하고 있길래 가서 구경을 해봤다. 친구는 오미쿠지를 뽑았다. 오미쿠지는 100엔 정도를 내고 뽑아보는 오늘의 운세다. 틀림없이.. 얼마 전 큐슈에서 100엔을 주고 뽑았는데 도쿄는 200엔이었다. 동영상을 찍었는데 재밌었다. 요즘은 동영상을 많이 찍게 됐다. 그래봤자 예전에 비해서 많이 찍는 거라, 어딘가 갔을 때 한 두 개 찍는 정도지만.



걸어가다 발견한 신사. 앞에서 야키소바며 닭꼬치도 팔고 그랬다

어렸을 때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즈음이었던 것 같다. 신문에 나오는 이동진의 영화 칼럼을 보며 영화의 미학을 알았다. 장 뤽 고다르, 허우 샤오시엔, 코엔 형제 같은 이름을 그 때 알았다. 당시엔 크리스토퍼 놀란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예 감독이었다. 물론 영화감독이 되려고 노력한 적은 없다. 그냥 나는 안 될 것 같아서 '하면 좋겠다' 정도로만 끝난 꿈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편집 툴 같은 걸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시작하지 않는다. 하다 말 것 같아서 그냥 안 한다.

하다 말 것 같아서 안 한 것들이 많다. 하다가 그만둔 것도 많다. 기타는 결국 4년 정도 하다가 요즘은 손 놓고 있는데 정말 좋아했던 곡 같은 건 지금도 칠 수는 있다. 음악은 좋아하지만 음악적인 재능은 없는 것 같다. 기타도 늘 동경만 했었다. 밴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멤버는 언제나 기타리스트였다. 하지만 역시 치다가 그만둘 거라고 생각해 하지 않고 있었는데 우연히 노엘 갤러거가 이렇게 말한 걸 보게 됐다.



그렇다. 기타는 방 구석탱이에 세워놓기만 해도 멋진 것이다. 물론 오브제 용도로 쓰기엔 비싸긴 하지만.. 뭐 어떤가. 아무튼 나는 4년 넘게 기타를 쳤고 실력은 지지부진하고 지금은 쉬고 있지만 다시 칠 거다. 정말로.

(갑작스런 화제 전환이지만) 저녁식사는 H언니를 만나 고깃집엘 갔다. 다들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원래 가려던 집은 사람이 많아 못 가고 근처 다른 고깃집엘 갔는데 점원은 중앙아시아 계열 사람이었고 인테리어는 완벽한 한국식이었다. 일본의 '야키니쿠집'은 거의 다 한국식이라 한국식 냉면도 팔고 김치도 있다. 여기는 한국에서 공수해온 듯한 드럼통 모양 둥근 의자에 원목무늬에 창이 달린 수저통까지, 완벽한 한국식이었다. 갈비, 로스 같은 살코기와 대창, 양 같은 내장류를 골고루 주문해 먹었다. 사진이 있어 내장이 정확히 어느 부위인지 짐작으로 시켜먹었는데, 내장은 우리나라보다 좀 더 세밀하게 분류해서 파는 것 같았다. 역시 나는 대창보다 양이 좋다. 별로 많이 안 먹었는데 여자 셋이서 먹고 1만 엔이 넘게 나왔던 것 같다. 역시 일본의 고깃집은 비싸다.



야키니쿠집 전경



맛있어서 더 시켜먹은 두툼한 (아마도)로스

집에 들어가는 길에 미니스톱에 들러 과자랑 컵라면 같은 것들을 사고 벨기에 초코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원래 초코 아이스크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진한 초콜릿 맛이 나서 맛있었다.

집에 들어가서는 컵라면을 해먹고 무알코올 맥주를 마셨다. 치즈 칠리 컵라면은 도저히 내가 먹을 수 없는 맛이었는데 여기서도 세 사람의 호불호가 드러나서 재밌었다.

배부르게 먹고 넷째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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