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 검사내전 - 아이에게 화해를 강요하지 마라
네이버 웹툰에 가본 적이 있는가? 절대 다수의 만화가 '왕따'를 중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다.
왤까? 그만큼 왕따가 흔하면서도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흔하고 심각한 문제에 대해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학폭위라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학폭위가 실제로 왕따를 해결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웅 부장검사가 쓴 <검사내전>은 3년쯤 내에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강렬하고 인상적이며 큰 가르침을 준 책이다. 부장 검사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느낌을 받겠지만 이 책은 '빵빵' 터지는 책이다. 웃기다. 현웃 터진다. 하지만 이 책을 추천하는건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이 책의 한 챕터가 유난히 나를 사로잡았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챕터만큼은 꼭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화해를 강요하지 마라'
(책 내용을 마구 무단인용할 예정인데..김웅 검사님께서 부디 이 글을 못 보고 넘어가시거나 보더라도 이 녀석이 좋은 뜻으로 나의 명저를 인용했구나 라고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고, 절대 저작권 문제로 고소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굽신굽신. 이하 인용부는 <>꺽쇠처리 하도록 하겠다.)
<2011년 12월, 대구에서 두명의 친구들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당하던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 아이는 온갖 폭력과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 안에서 섧게 눈물을 훔치던 모습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나뿐 아니라 많은 검사들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당시 소년검사를 하던 김웅 검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학교폭력 문제에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 이전이라고 해서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겠지만 본인의 일처럼 뼈저리게 와닿은 것은 이 사건 때문인 것 같다.
<학교 폭력이 이토록 처참하게 악화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쟁 위주의 교육을 학교폭력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또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조심스럽지만 일관되게 피해자의 유별난 성격도 한몫을 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학교폭력의 원인을 일방적으로 사회에 돌리고, 피해자의 탓으로 모는 것은 비과학적인 무지의 소산이다.>
대부분의 문제가 그렇듯이 어떤 문제가 악화되는 것은 힘센 사람 혹은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문제의 원인을 찾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이 이렇게 악화된 원인도 마찬가지다.
<청소년 폭력의 원인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대표적인 학설이 정립되어 있다. '일반 긴장 이론'과 '범죄의 일반이론'이 그것이다. (중략) '범죄의 일반이론' 범죄나 그와 유사한 일탈행위가 모두 자아통제를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아통제 부족'을 모든 범죄의 '일반적인 원인'으로 꼽기 때문에 일반이론이라고 불린다. 자아통제가 낮은 원인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는데, 흔히 말하는 사회적인 원인이나 제도 때문이 아니라 어린 시절 부모나 보호자가 자녀의 행위를 주의깊게 감독하지 않고 그 행위에 대해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아통제에 대한 사회적인 영향은 매우 미미하다는 것이다. >
사회적인 제도가 문제라면 왜 왕따 시키는 아이는 자기보다 약한 아이만 왕따시킬까?
<흔히 범죄나 청소년 범죄를 사회 탓으로 돌린다. 경쟁 위주의 입시 등으로 원인을 돌리는 것은 여러모로 편리하고 저항도 덜 받는다. 모두에게 책임을 돌리게 되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문제라는 피상적인 말잔치로 포장되는 것이다. (중략) 실제 우리 주변을 둘러보더라도 입시경쟁이 주된 원인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학교폭력은 고등학교보다 중학교에서 더 심하고, 중학교에서도 3학년이 아닌 2학년 때 극성을 부린다는 사실은 그 주장의 신뢰성을 무너뜨린다. 입시부담이 없는 실업계 학교에서도 학교폭력은 상존한다. 따라서 경쟁과 입시만이 학교폭력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당파적이다. >
여기까지는 깔아둔 것이고 김웅 검사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바로 다음에 나온다.
<학교폭력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그 정도가 심해진 원인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어른들이 보인 행태 때문이다.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가해자 편을 들어 조용히 끝내기를 강요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학생들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되었다. 대부분의 학교 폭력 문제는 강요된 피해자의 용서나 전학으로 해결되었다. 피해자만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가장 간단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해자들은 사라졌고, 가해자들은 승리했으며, 학교폭력은 더욱 악랄해지고 한층 은밀해졌다. 아이들은 이제 남을 괴롭히지 않으면 언제 그 먹이사슬의 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가장 약하고 낮은 학생들을 경쟁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피해를 입으면 입을 다무는 것이 더 큰 피해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폭력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학교를 떠나는 것이었다. 학교도 사회도 인권전문가들도 모두 그것을 원했다.
피해자가 떠나고 나면 학교는 평온을 찾았다고 믿지만, 그것은 피해자가 평생에 걸쳐 지고 가야 하는 정신적 외상의 대가일 뿐이다.>
'가만히 있으라'가 대표하는 우리나라의 문화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강자와 약자로 사람을 구분해 약자에게 불리함을 강요했다. '너도 책임이 있다'는 비겁한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있나? 설사 피해자가 책임이 있다 해도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려 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아이들은 학교와 우리 사회에서 한가지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 큰 피해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아무도 피해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고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지만, 피해자는 더 큰 보복과 따돌림을 당한다. 가해자들을 지원하는 사람들과 보호하는 절차는 겹겹이 쌓여 있지만, 피해자를 위한 관심과 보호의 손길은 턱없이 부족하다. >
가해한 아이는 어떻게든 지켜야 된다는 사람들은 정작 진짜 지켜야할 피해 아이에게는 무관심하다. 이게 정상인가? 옳은 일인가?
<많은 학교폭력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학교와 가해자 부모들의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학교폭력이란 어려서 누구나 한 번씩 겪는 일이고, 유난 떨지 않는다면 그냥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폭력을 가했다기 보다는 쌍방 과실인 것이고, 피해자의 유별난 기행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나오면 일부 교사들은 반색을 하고 기뻐한다. 자신들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문제를 조용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오히려 피해자에게 화해와 용서를 강요한다. 사회가 한통속이 되어 자아통제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가해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피해자는 전학을 가게 된다. 우리 아이들은 그 과정을 모두 본다. 그리고 폭력과 잘못에 침묵하는 생존법을 배우게 된다. 일부 언론에서 말하는 화해와 용서의 실상은 이런 것이다. 여전히 윽박지르는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무릎꿇으며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항상 하는 얘기가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모든 문제의 끝에 이승만의 '반민특위 해체'가 있다는 얘기다. 이 문제 또한 그렇다. 해방 후의 조국에서 독립운동가가 매국 고문 경찰에게 굴욕을 당하던 모습과 어쩌면 이렇게 닮아있을까? 힘의 논리에 의해 문제를 해결할 것 같으면 법은 왜 필요한가?
<소년 사건을 전담하고 있다는 판사가 갑자기 '이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안아준 적이 있느냐'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면 아이들이 진심으로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꽤나 감동적인 연설이었고 모두들 박수를 치면서 아이들에게 좀 더 정성과 사랑을 기울이자는 아름다운 결론을 내리며 자연스럽게 회의는 끝났다. 추악했고 황량했다. (중략) 내가 만난 학교폭력 가해자들 중에 프리허그로 교화될 수 있는 아이들은 없었다. 검찰청이나 법원까지 오는 길은 우연히 잘못 들르게 되는 길이 아니다. 특히 소년 법원까지 가는 아이들에게는 대게 많은 기회와 관심이 부여된다. 저 멀리 높은 법대 위에서 내려다보는 판사도 느꼈던 측은지심을 바로 옆에서 직접 수사했던 경찰관들은 느끼지 않았을까? (중략) 그런 단순한 연민은 자신의 선량함을 자랑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식품이 될지 모르나 사회 전체로 보면 오히려 악이자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
가해 아이들이 선량하다는 말은 알고보면 나쁜 사람없다는 말처럼 공허하다. 알고봐야 좋은 사람일 정도의 인간은 나쁜 인간이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죄가 나쁜 것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영화 [넘버3]에서 최민식의 명대사처럼 죄를 저지른 인간이 잘못이지 죄가 무슨 죄가 있나. 지가 하는 짓이 나쁜 짓인지 아닌지 알려면 따끔한 맛을 봐야한다. 잘못을 저질러도 처벌하지 않고 안아준다면 그게 잘못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나? 가해자들 중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비뚫어진 아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부모도 혼내지 않았던 아이들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해주는 것이야 말로 그 아이들을 엇나가게 만드는 일이다.
<흔히 처벌이 능사는 아니라고 한다. 이는 처벌만 하면 안된다는 말이지 처벌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중략) 이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감동적으로 행복하게 해결했다고 믿고싶고, 보기 싫은 진실이나 현실은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그 판사의 포옹이 만약 가해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그건 아마 무섭고 힘든 수감 생활이 끝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포옹이라는 작은 호의로 갱생시켰다고 착각하는 것은 부처님을 모신 수레를 끄는 당나귀와 같은 생각이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남을 위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남을 위한다는 착각을 하며 큰 악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처벌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해선 안된다는 것과 처벌을 해선 안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사건과 관계없는 자신에게 흡족한 결론은 누군가에게 지옥이 될 수 있다. 더럽다고 해서 외면하고 덮어놓으면 점점 썩어갈 뿐이다.
<가해자를 감싸고도는 이야기들 중에는 학교폭력을 저지른 학생에 대한 징계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남기는 것은 인권 침해라는 주장도 있다. (중략) 그들은 학교폭력을 벗어나지 못해 차가운 아파트 옥상까지 몰리게 된 아이들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피해자들의 가슴에 남은 화인을 결코 보지 못하는 감각장애자이자 피해자들의 아픔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공감장애자이다. 이렇게 가해자를 두둔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의 잘못에 대한 응당한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아통제 부족'이 생겨나는 것이다.>
가해아이들에 대한 조치는 충분히 물러 터졌다. 피해아이들에 대한 처사는 가혹하기 짝이 없다. 대체 뭘 원하는 것인가?
<인권의식은 자신이 귀중하다는 인식이 아니다. 자기가 소중하다는 것은 굳이 안 가르쳐도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목숨처럼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 (중략) 그러니 자기에 대한 사랑이니 힐링이니 하는 것은 적당히 해도 된다.
인권의식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아이들의 인권이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의 장래에 불이익이 되는 처분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폭력을 쓰면 친구와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왜 피해를 입은 아이들은 평생 그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고, 가해를 한 아이들은 아무런 불이익 없이 살아도 되는가.>
자신이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남을 하찮게 대해도 별 문제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눈물 흘리기 좋은 감성적인 소재가 아니다.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냉철하고 엄중한 과제이자 요구이다. 존엄한 것은 함부로 대할 수 없고, 훼손될 경우 반드시 응분의 대가가 따라야 한다. 마음대로 짓밟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짓밟힌 것이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간청해야 한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존엄한 것은 두려운 것이고 원시적인 것이다. 지켜지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존엄함은 악착같이 가르쳐보겠다면서 가르쳐야만 하는 타인의 존엄에 대해서는 왜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가? 한 때의 실수라는 말로 누군가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것을 등가치환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소년전담검사를 하면서 나는 늘 피해자들에게 너는 소중하고 무엇보다 존엄하다고 말해주곤 했다. 그리고 가해자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고, 화해하거나 용서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피해를 당한 아이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대게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존엄함과 권리를 포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존엄한 것은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화해를 강요하지 말라.>
우리도 이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해자 중심 문화를 바꿀 필요가 있다. 바꿔야만 한다. 강약이나 다소를 핑계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 피해자를 감싸주고 가해자를 엄히 처벌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이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 검사는 시종일관 가해자.라고 쓴다. '가해아이' '가해학생'이라고 쓰는 순간 글을 보는 사람들이 가해자들에게 줄 면죄부를 걱정한 것이리라.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의 불편함'을 이유로 진짜 문제를 외면한다. '매국노'를 '친일파'라 부르고 '강간'을 '성범죄'라 부른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강간범을 성범죄자라 부르는 것이 맞는 일인가?
김 검사가 검사내전이라는 책에서 내내 견지하는 태도는 일관된다.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진짜 문제와 그 문제가 벌어지게 된 원인을 외면하지 않는다. 마음의 불편함을 이유로 진짜 문제와 그 원인을 외면하는 순간 세상은 망가진다. '검사내전'을 통해 우리가 진짜 배워야 할 것은 이런 태도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