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볼래요]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in #kr7 years ago
무기력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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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땐가, 항상은 아니지만 적지않은 순간에 우리는 삶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무기력감을 느끼곤 한다.
열심히 일을 하다가도 때론 나를 내어놓고 쉬는 중에도 찾아오는 이 무기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책은 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로 잘 알려진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글로,
그의 논문들과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몇 챕터를라이너 풍크(에리히 프롬의 마지막 조교)가 하나의 주제로 엮은 것이다.

아래 목차만 보더라도 조금 감이 온다. 자유 / 독창성 / 진짜

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2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3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7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서문

당신이 무기력한 이유
'남이 바라는 나'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아는 것이며, 외부의 영향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타인과 주변 환경의 진정성이 어디 있는지 깨닫는 것이다.

윤리에 대한 상대주의가 만연한 현대와 동의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이 다 함께 공감해왔던 확고한 중심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윤리 기준을 토대로 권위주의, 야만적인 착취,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와 같은 19세기의 대표적 악덕을 논한다. 지금은 더 완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자만할 수 없다. 또 다른 종류의 악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히려 그 반대현상으로 '반드시 타인과 함께 해야한다는 강박'을 지적한다.

이것을 우리는 '소속감', '팀워크'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만 실상은 자신과 혼자 있을 수 없는 무능력, 자신이나 이웃의 은둔을 참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다.

혼자 있기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실은 핸드폰이나 TV 등을 통해 나름 소통하면서 공간적으로만 혼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딜 가든 폰이 없으면 안된다. 그게 혼자 있는 것 같은 때에도 나를 무언가에 소속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도구니까. 동시에 그곳엔 진짜 내가 없어질 수 있다.

진정한 고독의 힘을 강조한 사상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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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위대하며 견뎌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누구에게나 고독을 버리고 아무하고나 값싼 유대감을 맺고 싶고, 마주치는 첫 번째 사람, 전혀 사귈 가치조차 없는 사람과도 자신의 마음을 헐고 하나가 된 듯한 느낌에 빠지고 싶은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고독이 자라나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의 성장은 소년들의 성장처럼 고통스러우며 막 시작되는 봄처럼 슬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꼭 필요한 것은 다만 이것, 고독, 즉 위대한 내면의 고독뿐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몇 시간이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 바로 이러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달아나라,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내가 보기에 그대는 위인들이 내는 요란한 소음에 귀먹는가 하면 소인배들의 가시에도 마구 찔리고 있다. -니체

독립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면
타인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타인의 생각 속에서 늘 살아야 한다면
이것은 육체가 부자유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노예 상태이다.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하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좌우될 필요는 없다.
-톨스토이

인간의 본성

역사적으로 인간 사유의 근본목적이기도 한 본성에 대해서 플라톤, 토마스 아퀴나스, 파스칼, 마르크스, 베르그송 등등의 철학자들의 생각을 논하고 인용한다. 인간을 완벽하게 정의할 수 없다고 하는 그가 제시하는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이성과 사랑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만큼 자신의 본질에 도달한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과 사랑의 능력이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진술하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능력이 인간 본성의 기본 요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철학자, 신비주의자, 신학자의 다수가 이런 확신을 품었다.

다음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우리들의 현실이다.

인간은 인간 본질을 생계비 벌이에 투자하고, 대부분 인위적으로 조장된 쉼 없이 증가하는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의 힘을 이용한다. 그러느라 자신이 인간임을 망각할 위험에 처한다. 따라서 인간 본질을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을 새롭게 고민하기가 지금보다 어려운 때가 없었으며, 지금보다 시급한 때도 없었다.

자유, 진짜 인격의 실현

자유는 언론의 자유, 경제적 자유 등등 다양한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구체적으로 자유로운지, 얼마나 자유로운지의 문제이다.

자유가 이미 존재했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그 자유란 곧 그 가능성이다.

자유는 사실이라기보다 가능성이다. 인간 진짜 인격의 실현인 것이다. 자유는 장애와 조건과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상 많은 자유에 대한 표현들 중 '플라톤의 동굴비유'가 자유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자유를 잘 표현한 것이 플라톤의 동굴 비유가 아닌가 한다. 자기 발의 족쇄를 끊고 아무리 힘들어도 참으며 동굴의 가파른 벽을 기어올라 마침내 정의의 태양을 보겠다는 노력이 없다면 자유가 존재할까? 태양을 본 철학자가 동굴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본 것은 환영이라고, 진정한 자유는 진리의 인식에서 나온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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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플라톤 국가. 천병희역. 도서출판 숲

동굴에서 돌아서서, 그 빛을 볼 수 있다면, 아니 그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안의 열정이 불붙는다.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열정은 곧 독립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간다.

독립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고독은 이기적 자기자신에게만 집중한다기 보단 오히려 자기 자아를 진정으로 인식해가면서 나의 실존을 파악하고 그 가운데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와 더 깊은 소통을 이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더 외롭게 만드는 표면적 소통이 아닌 진정한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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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건 생명 없는 사물이건 창조적 활동을 통해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만이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자발적 활동이 낳은 속성들만이 우리의 자아에 힘을 주고, 자아가 온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닦아준다.

가짜? 진짜?

날감자를 파인애플이라고 최면을 걸어 맛있게 먹게 만드는 등의 최면실험을 통해

우리는 생각과 느낌, 소망은 물론 심지어 감각적 느낌까지도 주관적으로 우리 것이라고 느끼지만, 사실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고,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감각들이 실은 프로그램이 주입한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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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실도 가짜가 지배하는 삶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영화 속 모피어스처럼 프롬은 강조한다.

우리 모두는 믿을 수 있는 진짜와 순수 허울을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아 경험 마저도 집단 암시의 영향을 받아 구별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우리만의 독창적 사고를 구분할 수 있을까?

자신의 적극적 사고에서 나온 생각은 항상 새롭고 독창적이다. 여기서 독창적이라는 단어는 그 생각을 그보다 먼저 한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생각을 한 사람이 외부 세계나 자기 자신에게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로 자신의 생각을 이용한다는 의미다.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우리는 TV라는 매체 덕분에(?) 자주 내 삶의 중심과 주인공 자리를 쉽게 내어주고 대리와 대체로 만족해버리곤 한다. 독창적 사고를 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집단암시에 의한 것이 아닌 진짜 내 안에서 나온 날 것 그대로의 독창적 사고를 더 이상 이론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아를 진정으로 경험한다면 자신은 그것이 진짜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끊임없이 쫓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진짜 삶의 전제조건들

삶 속에서 자주 놓치고 잃어버린 것들이다.

진짜 삶의 첫 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이 능력을 아직 갖고 있다. 노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방향을 찾고 항상 새로운 사물을 붙잡아 알아간다. 당황하고 놀라고 감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탄의 능력을 잃는다. 이제 자신은 모르는 것이 없으며, 감탄은 무지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더 이상 기적으로 가득하지 않고 사람들은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감탄의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 프랑스 수학자 쥘 앙리 푸앵카레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의 천재성은 놀라는 능력이다." 수많은 과학의 발견이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서구 문화에서는 희귀한 것이다. 우리는 늘 분주하지만 집중하지 못한다.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다음 것을, 지금 하는 일을 끝마칠 수 있는 그 순간을 생각한다. 최대한 많은 일을 동시에 한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고 신문을 읽으며, 그 와중에 아내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은 그 일이 우리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집중을 할 때는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태어날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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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약 먹을 준비 되셨나요?

태어날 준비 - 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 - 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말하는 용기, 즉 자신의 나라와 가족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갈 용기다. 자신의 사고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관련하여서도 진리 말고는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이런 용기믿음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하다.

용기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 믿음 안에 확고한 지식 곧 진리가 있을테고, 그러므로 믿음에 이르기까지 진리지식을 가지고 계속해서 부딪치고 경험하고 사고하는 과정이 내가 살아가는 삶이다. 진리를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내 안에 들어오는 게 아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그것을 인식하는 위와 같은 과정이 없이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도대체 이 모든 게 지금 내가 사는 현실과 무슨 관련 있을까? 내가 바뀌면 나의 생활이 바뀌고 나의 꿈도 바뀌고 나의 현실도 바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삶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 지금 나의 현실은 여태 나라는 자아, 내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자아가 만들어놓은 결과의 일부이기때문에...

부족한 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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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을 이기는 방법으로 몸을 움직이는 운동도 좋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앗 그렇네용!! 몸이 움직이면 마음도 함께 움직인다던데.. 감사합니다!!

포스팅 너무 좋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려요~

소중한 평가와 기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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