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art][단편소설] 강(江)
*1.
먼 옛날, 험한 돌산에 위치한 마을이 있었다.
워낙 토지가 척박해 농사도 목축도 불가능한 곳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돌을 깎아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이 돌산의 돌은 무척 정결했고 마을 사람들에겐 조상 대대로 내려온 특유의 가공 기술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했고 시장에서 섭섭지 않은 가격에 거래되곤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삶은 풍요롭지 않았다. 그들은 큰 장이 서는 옆 마을에 나가서 작품을 팔아야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매일 밤 산기슭에 큰 비가 내려 강이 범람하기 일쑤였다. 강이 범람하면 마을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 고스란히 강물 아래 파묻혔다.
그들은 강을 건널 방법을 찾기 위해 대를 이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 시절의 자연의 힘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다리를 세우면 물결에 밀려 무너졌고, 배를 띄우면 강물에 쓸려 멀리 떠내려갔다.
이처럼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마을 사람들은 돌산 산신령의 뜻이 그리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억지로 강을 건너려 하지 않았다. 강물이 범람해 길이 막히면 다들 불만 없이 터벅터벅 마을로 돌아와 그날 하루를 공쳤다.
이렇듯 강의 사정은 그들의 생계와 직결된 마을의 가장 큰 대사였다. 하지만 이에 대처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우둔하기 짝이 없었다. 먼저 강에 다녀온 사람들은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강의 사정을 알리지 않았고, 해여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거짓말로 대답해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러한 심술은 오직 강에 관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늘 이웃을 미워하고 저주했다. 누군가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마을 모두가 알도록 널리 퍼뜨렸고 좋은 일이 생기면 침을 뱉고 욕을 퍼부었다. 또한 자신에게 행복이 찾아오면 아무도 알지 못하게 꼭꼭 숨기고 혼자 그 맛을 의미했다.
이러한 심술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그 마을의 지혜 때문이었다. 그들은 훌륭한 돌을 찾기 위해 항상 이웃과 경쟁해야 했다. 따라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행복이란 것도 돌처럼 총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세상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지금 내가 행복한 이유는 다른 누군가가 불행하기 때문이고, 내가 불행한 이유는 다른 누군가가 행복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었고, 공짜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값비싼 보물이었다.
그리하여 이웃 누군가가
「오늘은 강이 넘쳤나요?」
라고 물으면
「옘병, 직접 두 발로 걸어가서 확인하시오!」
라는 핀잔이 돌아오는 게 당연했다.
*2.
이 돌산 마을에 한 여자가 살았다.
여자는 조각에 재능이 없어 장에 다니는 행상인 일을 맏아야 했다. 그녀는 아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더나며 오늘은 강물이 넘치지 않았길 바랐다. 강이 범람해 시장에 나가지 못하면 가족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물품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오늘은 강물이 넘쳤길 바랐다. 그럼 무거운 짐을 들고 먼 마을까지 가지 않아도 됐고, 또 그만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돌아올 일도 없었다.
그녀는 아침에 강을 마주할 때마다 똑같은 크기의 기쁨과 실망을 느꼈다. 두 감정은 같은 크기로 서로를 상쇄시켰고 따라서 그녀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 공허한 마음에는 오직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의무만이 덩그러니 남곤 했다.
여자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마을의 생계는 오직 돌 조각뿐이었는데 불행히도 그것은 그녀의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먼 곳으로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행복을 알지 못한 탓에 불행도 알지 못했다. 오직 가족에 대한 의무감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할 뿐이었다.
「오늘은 강물이 넘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홀연히 여자의 집 앞에 서서 강의 사정을 알렸다. 여자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강에 도착하니 범람한 강물이 급류를 형성하며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은 강물이 넘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에도 남자는 여자의 집 앞에 서서 강의 사정을 알렸다. 여자는 강에 도착했고 창창한 하늘 아래 끝없이 이어진 길을 보며 저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도 매일 남자는 여자의 집 앞에서 강의 사정을 알렸다. 여자는 남자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고 남자도 그런 여자에게 딱히 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오늘은 강물이 넘쳤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죠?」
한 달 쯤 지났을 때, 여자는 문득 남자에게 반문했다.
둘의 첫 대화였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남들보다 먼저 강에 다녀왔습니다.」
「왜죠?」
「강의 사정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왜요?」
「당신에게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왜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입꼬리 한쪽이 어색하게 올라간 인위적인 비웃음이었다.
「알았어요」
여자는 차갑게 대답하고 가건 길을 재촉했다. 남자가 여자를 잡아 세웠다.
「제가 강에 직접 다녀왔습니다. 강물이 넘쳤습니다.」
「알겠습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나요?」
「믿어요」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당황한 얼굴을 응시했다.
「물론 당신을 믿습니다. 지금껏 당신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제 말을 믿는데도 강에 가시는 겁니까?」
「네」
「왜죠?」
남자가 물었다.
「당신의 사랑을 믿지 않아요.」
여자의 대답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남자는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갔다. 남자는 여자를 잡지 않았다.
여자는 험한 산길을 내려와 강가에 도착했다. 남자의 말처럼 무섭게 불어오른 강물이 세상을 집어삼킬 듯 흐르고 있었다. 먼저 강에 도착해 여자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저마다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 왜 이렇게 늦은 게야?」
「너 하나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야겠어?」
「망할, 저 년은 당최 협동을 몰라, 협동을!」
마을 사람들은 강물이 범람한 걸 확인한 후에도 곧장 마을로 돌아가지 않았다. 뒤늦게 출발한 사람이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을 보고 강의 사정을 눈치챌까 봐 매일 마지막 한 명이 올 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사람들은 바쁘게 자리를 떴고, 어느새 그곳엔 여자 혼자만 남아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염없이 출렁이는 강을 바라보다 여자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라 꺼이꺼이 신명나게 통곡했고 그 바람에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여자의 울음은 저녁 노을이 하늘을 빨갛게 물들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3.
그날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자는 10년 내내 매일 아침 여자에게 강의 사정을 알렸다. 단 한 번의 실수나 지각도 없었고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에서 정확한 답을 전해줬다.
여자는 그런 남자에게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도 그런 여자를 잡아 세우지 않았고 여전히 10년 전 그날의 대화가 그들의 유일한 대화였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여자와 달리 남자를 못 본 첫 넘어가지 않았다.
기다림이 1년을 넘자 마을 모두가 남자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3년이 지나자 폭언을 쏟아내기 시작해고 6년이 지나자 남자를 방해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다. 눈에 보일 때마다 한 걸음에 달려가 뺨을 후쳐리고 물을 끼얹었다. 새벽에 집을 나서지 못하게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강의 사정은 마을의 생계와 직결되는 무척 중요한 정보였다. 금쪽 같은 정보를 얻으려면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한낮 계집에게 홀려 마을의 오랜 정통을 흐리고 있으니 마냥 손 놓고 지켜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10년이 넘자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젊은이 수십 명이 강이 아닌 여자의 집 앞으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남자는 오직 여자에게만 강의 사정을 알렸기에 남장의 말을 들으려면 어쩔 수 없이 여자가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면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조용히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오늘은 강물이 넘쳤습니다.」
마침내 남자의 입에서 강의 사정이 밝혀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신세를 한탄했다.
「아이고, 나는 오늘 꼭 시장에 나가야 한단 말이다!」
「아니 저분을 닦달한다고 막힌 강이 열리기라도 한단가?」
「뭐가 어쩌고 저째?」
「쳇, 아님 직접 짐 싸매고 가보시든가!」
이렇듯 아침마다 여자의 집은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그럴 때면 꼭 어르신들이 나타나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이놈들아! 여기 모여들지 말라고 했지! 싹 다 당장 강으로 가지 못할까! 건강한 것들이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편법을 쓰는 게야!?」
그러면 또 젊은 사람들은
「아휴, 뭘 또 고생스럽게 그런대요? 난 할 일이 있으니 신경 끄세요」
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무려 10년을 쌓아올린 남자의 신뢰는 바위보다 견고했다. 그런 남자를 보며 주민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 새로운 지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서로 거짓말을 멈추고 진실을 공유한다면 어떨까?
만약, 힘든 일을 협동해서 이겨내면 어떨까?
행복이라는 것이 정말 소모되는 것일까?
혹시 행복을 서로 주고받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모인 자리마다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고 새롭게 피어오른 관념에 ‘신뢰’, ‘믿음’, ‘정직’ 따위의 이름을 붙여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관념들은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며들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발현하였고, 그렇게 탄생한 새로운 예술 양식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어 마을을 전성기로 이끌었다.
*4.
다시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남자는 더 이상 젊지 않았다. 몸의 근육을 달련시켜주던 새벽의 산행은 언젠부턴가 독으로 작용했다. 햇볕을 받지 못한 차가운 공기는 날카로운 못처럼 폐를 찔러댔고 그 탓에 몇 걸음만 걸어도 금세 숨이 파올랐다. 걸음이 느려진 탓에 남자는 더 이른 새벽에 일어났지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몸의 균형은 급속도로 흔들렸다. 더는 의지의 힘만으로 극복할 문제가 아니었다.
아침 채비를 마친 여자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남자가 없는 살풍경을 마주한 것이었다. 망치로 때리듯 심장이 요란스럽게 고동쳤고 몸의 힘이 풀려 어깨에 맨 보따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바람에 돌 조각품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깨졌지만 여자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자리에 앉아 남자를 기다렸다. 늦잠을 잤을 수도 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어 늦어졌을 수도 있다. 온갖 불안이 여자의 마음을 짓밟았다.
불안하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20년이 흐른 지금, 남자는 사랑에 빠진 한낱 철부지 젊은이가 아니었다. 마을의 역사를 새로 쓴 훌륭한 위인이었다.
사람들은 남자가 집에서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여자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 강에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소식을 듣고는 주먹을 쥐었다. 때가 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남자의 집을 찾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집에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가 온 것을 알고 냉큼 길을 터주었다.
남자는 상에 앉아 있었고, 여자는 말없이 다가와 남자의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나무 밑둥처럼 단단했던 다리가 지금은 젓가락처럼 얇았다.
「죄송합니다. 더는 강을 확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여자가 대답했다.
「며칠 전 의원을 봤는데 몸이 많이 상했다고 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 아침에 영 몸이 말을 듣지 않네요.」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여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자가 환한 미소로 답하자 그와 동시에 마을이 떠나갈 정도로 큰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날 마을에는 큰 잔치가 열렸다. 사람들은 맛 좋은 음식과 묵혀둔 술을 한상 크게 펼쳐놓고 두 사람의 결실이 마치 제 일인냥 기뻐했다.
남자와 여자는 조용히 자리에서 빠져나와 인적 드문 곳을 거니멸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매일 강을 마주하며 느꼈던 똑같은 크기의 실망과 기쁨. 예술가가 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무능에 대한 실망.
또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동물을 좋아하는지 잠버릇은 어떤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를 말했다.
남자 역시 여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어떤 심정으로 그 오랜 시간을 견뎌왔는지, 여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둘의 대화는 풋풋한 연인의 대화처럼 조심스러웠고, 오랜 친구의 투정처럼 편안했고, 수십 년 만에 재회한 부부의 만남처럼 애절했다.
깊은 밤, 남자는 여자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안녕히 주무시오.」
「안녕히 주무시오.」
인사를 끝낸 남자는 등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 모습이 온전히 사라진 후에도 차마 눈을 떼지 못했다.
*5.
그날 이후 여자는 다시 남자를 볼 수 없었다.
비단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주민 그 누구도 남자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돌산을 쥐잡듯 뒤지고 심지어 먼 마을까지 나가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다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혀를 찼다. 아니 20년이나 기다린 사랑을 이제야 쟁취했는데 당최 떠날 이유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소식을 듣더니 이미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자신의 사랑이 이런 결말을 맞이할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사랑은 위험한 것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쟁취한다며 새벽에 어두운 산길을 달려 강을 확인했고 다시 그 긴 길을 돌아와 알렸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강이 아닌 자신에게 먼저 달려와주길 바랐다. 남자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했더라면 새벽 일찍 일어나 먼저 달려가는 곳이 저 먼 강이 될 수 없었다.
여자는 지난 20년 동안 남자가 강을 버리고 자신에게 와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단 하루도 빠짐 없이 강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여자가 바라는 사랑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놓아줄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나 나왔던 그날, 그 보드라운 말이 가슴에 와 닿은 순간부터, 강가에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날부터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이 남자가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온 동네 모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목적으로서의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다. 목적을 이루면 끝나버릴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을 붙잡으려면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침묵했다.
쉽지 않았다. 매일 아침,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모른척 고개를 돌려야 했다. 혀를 짓이겨 깨무는 아픔으로 마음을 숨겨야 했다.
그것이 그를 곁에 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원치 않는 방법이었지만 그를 사랑하기에 그의 다짐을 존중해야 했다.
여자는 한 동안 병을 얻은 듯 자리에 누워 며칠 동안 긴 잠을 잤다.
그렇게 계절이 지나고 시간이 흘렀다. 가까스로 기운을 차린 여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강으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 문밖을 나서니 여자의 게으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생기발랄한 마을의 부산스러움이 온몸으로 전해져왔다.
여자는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다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세워 말을 물었다.
「이보세요, 오늘은 강물이 넘쳤나요?」
그러자 그 사람은 세상 천지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오늘은 날이 화창합니다! 강이 아주 잠잠해요! 먼길 가야 할 터이니 채비 단단히 하시오!」
-끝-
3월의 시작을 아름답게 보내세요^^
이번 화는 엄청 기네요 ㅎㅎㅎ
9회차 미술관부터는 참여방법이 변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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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바 미술관/금손 포스트 작가지원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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