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 사상계 그리고 의문의 역사

in #kr7 years ago

장준하

장준하는 '돌베개'라는 자서전의 저자다. 일제 말기 학도병에 끌려간 애국 청년이었던 그는 중국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탈영, 광복군이 주둔한 중경(충칭) 땅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발바닥에는 온통 물집이 생겼지만 마침내 중경으로 피란 가 있던 임시정부를 찾는 데 성공했다. 보통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뒤 마침내 뜻을 이룬 것이다. 장준하는 임정 주석 김구와 함께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다.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의 개신교 목사 아들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그의 아버지가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교 교목(校牧)이 되자 아버지를 따라 그 학교에 진학했다. 모든 기독교 계통 교육 기관의 신사 참배가 강요됐을 때 그의 아버지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교목직을 사퇴했다.

그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장준하는 성장했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 있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숭실전문 또한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돼 정주의 한 소학교 교사로 부임해 3년 동안 그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장준하는 일단 일본에 있는 동양대학에 진학해 예과를 마치고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 해방을 일 년 반쯤 앞두고 장준하는 학병으로 소집돼 중국 주둔 일본군 제65사단에 배속됐는데 그해 7월 중국 강소성(장쑤성) 서주에서 탈영했다.

학병으로 입대할 때부터 장준하는 광복군에 가담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광복군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일본군에게 발각될까 봐 걸어서 광복군을 찾아간 것이다. 그 거리가 얼마나 됐을까.

그때부터 장준하는 정치 현장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정부가 수립된 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사상계'를 창간하면서부터였다. 사상계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이 나라 지식층에 용기를 심어주던 유일한 잡지로, 매달 10만부가 판매될 만큼 성장했다. 함석헌을 비롯해 안병욱·이극찬 등 일류 필진이 매달 그 잡지에 기고하며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상계가 4·19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가 성공해 군사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그 정권과 맞서 정면으로 싸우는 언론은 오직 사상계 하나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상계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장준하도 전국적 인물이 됐다. 특히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시대의 영웅처럼 추앙됐던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 감각이 예리하던 장준하는 대통령의 꿈을 품고 있었다. 박정희가 마련한 새 헌법에 반대하기 위한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는 가운데 천관우·계훈제·법정·김동길 등과 함께 '백만인 개헌 서명운동'에 착수했다. 그 운동은 뜻하지 않게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나는 장준하에게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연막을 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권고했지만, 장준하는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라 빨리 군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곧 백만인 서명운동이 끝나게 되었다"고 선언을 해버렸다. 겁을 먹은 당국이 방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서명을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중앙정보부원이 덮쳐 서명한 서류를 몽땅 압수해 갔다. 결국 백만인 서명운동은 수포로 돌아갔다.

부완혁이 곤경에 빠진 장준하로부터 사상계를 인수했는데, 사상계에 실린 시 '오적' 때문에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된다. 유독 사상계가 게재를 허락한 김지하의 '오적'은 국민감정의 단적인 표현이었다. 일반 국민은 그 시를 읽고 '옳거니'를 연발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입장에선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사상계를 좌절케 할 좋은 기회를 포착한 셈이었다. 부완혁의 능력만으로는 사상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장준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던가. 구름 타고 왔다 구름 타고 떠난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장준하에게는 보통 사람에게 없는 신들린 일면이 있었다고 나는 증언하고 싶다. 그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에 맞서고 박정희의 군사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언론 사상계의 총수였는데, 범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면을 가지고 살다 홀연히 떠난 불운한 사나이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가 1975년 8월 17일 아침 일정에는 없던 등산길에 오른 것은 두 청년의 권고에 못 이겨서였다.

한평생 산을 잘 타기로 소문났던 장준하가 높지도 않은 산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당국은 추락사로 판정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사인을 거론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무런 외상도 없이 강철같이 단단하던 사나이가 어찌 시신이 되어 우리 품에 돌아왔단 말인가. 그를 유인하다시피 등산을 강권했던 젊은 친구들은 영영 자취를 감췄고 끝까지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도 없이 구름 타고 가버린 사나이 장준하. 장준하의 부인과 아들 딸들은 세끼 밥을 먹기도 어려운 형편에서 아들은 대학 문턱에 가보지도 못하고 세파에 시달리며 오늘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다정다감했던 장준하가 가족에 대한 걱정을 안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는 가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김 박사가 부러워. 가족이 없으니 걱정거리가 없지 않소."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맑은 두 눈에는 애수가 서려 있었다. 4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 표정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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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17일 죽음의 진상

장준하는 감옥에서 나온 후 건강을 위하여 자주 등산길에 올랐다. 이 때 주로 수행하는 동행자는 백기완과 이철우였으며 필자도 간혹 끼었다. 협심증이 있는 장준하는 항상 비상약을 갖고 다녔으며 옆에 수행하는 동지에게 비상약이 어느 주머니에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주기도 했다.

그는 태백산에 올라 조선 땅의 주맥을 짚으며 문수봉 가는 길의 호젓한 숲의 터널을 즐겼다. 산 정상에 오르면 맨 먼저 북쪽을 향하여 통일을 염원하는 묵념을 올리고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중국 대륙에서 조국 광복 운동을 하던 때를 회상했음인지 광복 군가를 부르기도 했다. 때로는 젊은 동지의 선창에 따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읊조리는 적도 있었다.

그런데 마(魔)의 1975년 8월 17일 마지막 가는 무더위가 발악을 한 날이었다. 매주 동행하던 이철우로부터 하루 전날 필자에게 연락이 왔다. "8월 17일(일요일)은 영상 36도까지 올라가는 폭서라고 해서 장 선생과 상의했더니 하루 쉬자고 합니다." 이 날 우리는 장 선생을 모시고 가던 등산을 포기하고 친구 몇이서 수락산 숲 속 개울에 발을 담그고 하루 종일 낮잠을 즐기다가 내려왔다.

그런데 쉬자고 했던 장준하는 혼자서 산에 갔던 것이다. 아니 혼자서가 아니었다. 그와 동행한 친지는 백기완도, 이철우도, 전대열도 아니었고 김희로(시인, 현재 평화신문 부산지사 근무)와 김용환(현장 목격자) 그리고 김용덕(당시 호림 산악회장)이었다. 이 날 등산은 안내 등산 전문 산악회인 호림 산악회 측에서 알선했으며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장준하와 잘 아는 처지였다. 다만 현장 목격자 김용환만은 장준하가 9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을 때 홀연히 나타나 자원 봉사를 시작한 인물로 친밀도의 뿌리가 약했고 선거 당시 함께 했던 지구당 간부들의 증언에 의하더라도 그 정체가 다소 의심가는 점이 많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거에 패한 후 김용환은 어디로 갔는지 헤어져 버렸는데 공교롭게도 몇 해 만에 이 날의 등산에 동행했고 더구나 장준하의 최후를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 되어 세인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등산을 권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앞서 말했지만 이 날 등산은 장준하의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매주 함께 가던 동지들과 쉬기로 약속했던 분이 어째서 혼자서 산에 가게 되었는가? 이 날 사고가 없었더라면 이 문제는 아무런 얘깃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날 산행에서 장준하는 희생되었고 그 내면을 파헤치려면 근본 원인을 따져야만 하는 것이다. 등산을 가자고 권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장준하의 부인 김희숙의 증언을 들어보자. "토요일 저녁에 호림산악회에서 전화가 걸려 왔어요. 김용덕 회장이 전화한 것인데 내일 등산을 함께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장 선생은 날씨도 덥고 약속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거절했습니다. 그 전화 내용에 여기 김용환이가 오랜만에 와 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 등산 권유가 거절되자 일요일 아침 7시경에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이 전화는 김용덕과 김용환이 함께 걸었고 역시 거절되었다. 그런데 30분 후 세 번째 전화가 왔다. 이 날의 전화는 후일 생각해 보면 악마의 부름이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때로는 달콤한 소리로, 또 때로는 애교 어린 교성으로 유혹하는 악마의 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세 번째 전화 역시 김용환으로부터였고 관광버스 좌석까지 마련해 놨으니 꼭 나와 달라는 반강제적 권유였다.

장준하는 원래 남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는 성격이 아니다. 공적인 일에는 엄격했지만 사적인 일에는 인정이 넘치고 어떤 면에서 단정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이 날 등산은 잘 아는 동지들의 권유를 두 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세 번째까지 강요하는 권유를 마지못해 응낙한데서 비극은 잉태된 것이다. 세 번째 권유를 받은 장준하는 그때서야 행선지를 물었고 높지 아니한 포천군 이동면 약사계곡이라는 말에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부인으로 하여금 보온병에 커피를 담고 샌드위치 2인분을 준비시켜 배낭에 넣고 나섰다. 지금의 동대문 운동장 앞에서 버스를 탄 장준하는 여러 사람을 둘러보다가 "이철우 씨는 안 나왔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철우는 지금도 그 날 "내가 따라갔어야만 그런 사고(?)가 없었을 텐데..." 하면서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백기완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도 그 날 동행하지 못했음을 크게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 날 등산 권유는 호림 산악회 회장 김용덕이 한 것이지만 김희로와 김용환 세 사람이 북창동에 있던 호림산악회 사무실에서 토요일 밤부터 끈질기게 권유한 것이 틀림없으며 김용덕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고 있다. 등산 권유가 장준하의 죽음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본인들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지만 거절하는 사람을 세 번씩이나 불러냈다는 사실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그 음모의 의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게 한다. 장준하의 죽음 이후 경찰과 검찰에서 사인 조사를 할 때 조사의 기초가 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파고들었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다.

엇갈리는 증언

그 날 등산이 과연 마지못해 간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장준하를 제거하려는 어떤 음모가 있었다면 싫다는 장준하를 억지로 끌어내어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시키려 했을 것이고, 부인 김희숙의 증언에 따르면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장준하를 존경하는 동지들이 그를 모시고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거절하는 분에게 세 번씩이나 권유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 상식적인 예의로 보더라도 어른이 한 번 거절하면 두 번, 세 번씩 재삼 권유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가족들의 증언대로 장준하는 그들의 악착같은 권유에 못 이겨 따라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겨레신문 윤재걸 기자가 1988년 11월 6일자 일요신문에 기고한 <추적 장준하 의문의 죽음>을 보면 가족들이나 이철우의 증언과는 전혀 다른 증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장 목격자인 김용환이가 장준하의 약사봉 등산 계획을 알게 된 것은 8월 15일(광복절)로 호림산악회 회장 김용덕에게 전화가 걸려 와 알려준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김용덕은 김용환의 전화를 받기에 앞서 장준하로부터 약사봉 계곡에 등반하겠다는 동행 의사를 전달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증인들의 증언이 이처럼 엇갈릴 때 이 문제는 여기서부터 풀어 나가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데 경찰은 이에 대해서 전혀 알은 체도 않고 있는 것이다.

거의 매주 함께 다니던 이철우나 백기완에게 약사봉 계곡 등산을 감춰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검시의사의 소견과 의문점

사람이 아프게 되면 약국에서 약을 사먹거나 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죽게 되면 반드시 의사의 사망 진단서가 첨부되어야만 매장 또는 화장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인명을 중시하는 현대에 와서 이 제도는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특히 자살이나 변사의 경우 검사의 입회 하에 공의의 부검 또는 사체 검안을 해야 한다.

장준하 역시 의사의 검시를 받았다. 앞에 인용한 윤재걸 기자의 기사는 부검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검시를 착각한 것으로 보이며 검시 의사는 의정부시에서 심외과를 개업하고 있는 심구복이었다. 그의 검시 결과 장준하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오른쪽 귀 뒤쪽에 있는 급소가 예리한 흉기에 찔린 듯한 후두부 함몰에 기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검시 소견에 따르면 장준하는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추락사라는데 기이하게도 전신에 골절상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심구복 의사가 장준하의 시신을 검안한 것은 사고지가 의정부 검찰지청 관할이었기 때문에 검찰의 요청을 받아서였으며 다음날인 8월 18일 새벽 가족들의 요청으로 시신은 상봉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영상 30도를 훨씬 웃도는 무더위였기에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필자는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해태 측에 부탁하여 잘 녹지 않는 드라이아이스를 대량 매입 시신의 앞뒤를 쌓았고 이로써 5일장을 치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함석헌, 김준엽, 문익환 형제, 계훈제, 백기완 등의 주장으로 시신에 대한 정밀 검안이 실시되었다. 이는 검찰 등 수사 기관의 개입 없이 유가족의 요청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세 사람의 의사가 이에 참가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조광현 내과 의사다. 그는 장준하의 친구로 주치의라고 할 수 있으며 감옥에서 나왔을 때에도 이 병원에 입원하여 주거제한이 되기도 했던 인연이 있다. 또 한 사람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전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근무했던 의사로서 이런 변사 사건을 다뤄 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고 또 다른 한 분은 상봉동에 개업하고 있는 동네 의사를 모셔왔다.

엄격히 출입이 통제된 가운데 실시된 이 날의 검시에서 심외과의 검사 소견과 대동소이한 얘기가 나왔으나 한 가지 새로운 것은 양팔 겨드랑이 쪽에 피멍이 발견된 사실이다. 이는 결코 추락하면서 생길 수 있는 흔적이 아니며 두 사람이 양팔을 꽉 끼고 강제로 끌고 갈 때나 생길 수 있는 상처로 판단되었다. 또 한 가지는 허리 부분에 주삿바늘 자국이 있었다는 점이다. 사고 전날이나 그 이전에 허리에 주사를 맞은 일이 없다는 가족들의 증언이 있고 보면 이 자국도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15미터의 추락(?)에도 불구하고 골절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얼굴에도 스친 자국 하나 없는 모습으로 전신에 아무 데도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의사들의 소견이 아무리 양보해도 추락사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으니 긴급조치 9호가 시퍼렇게 날뛰고 있는 시점에서 함부로 발표하기도 두려웠다.

동아일보에서 의문제기

이때 동아일보가 들고 나섰다. 사건 이틀 뒤인 8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사건 현장을 원거리에서 찍은 사진을 곁들여 <장준하씨 사인에 의문점>이라는 큰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그 보도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경찰에서 실족사고로 처리한 장준하 씨 사인에 의문점이 있어 현지 검찰이 장씨의 사인을 다시 조사하고 있다. 18일 서울지검 의정부 지청 서돈양 검사는 현장을 돌아보고 포천경찰서에서 조사 보고해 온 장씨의 사인에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 함께 등산 갔다가 사고 현장을 혼자서 목격했다는 김용환씨(41세, 중학강사,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38)를 불러 자세한 경위를 듣고 19일 김씨를 다시 소환했다.

검찰이 장씨의 사인에 의문이 있다고 보는 점은 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높이 12미터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씨 혼자 아무런 장비 없이 내려오려 한 점, 사고현장인 벼랑 위에 오를 때는 멀리 등산코스를 돌아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등산코스도 아닌 벼랑으로 내려오려 한 점, 사고 직후 김씨가 장씨의 시계를 차고 있던 점 등이다.

검찰은 특히 김씨가 장씨의 시계를 차고 있었던 점에 대해 "사고 후 신고나 인명구조가 더 바쁜 시간에 장씨의 시계는 왜 풀어서 찼느냐?" 고 김씨를 추궁, 김씨는 "자신이 장씨의 곁을 떠난 사이 다른 등산가들이 장씨의 시계를 훔쳐갈까 봐 그랬다." 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김씨가 1965년부터 3년 동안 신민당 서울 제4지구당 총무로 있었는데 사고 당일 우연히 등산길 버스 안에서 장씨와 만났다고 진술한 점과 김씨가 사고 직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군부대에 신고한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있다...

이 보도가 나가자 국민들의 여론은 '장준하 씨가 암살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고 박정권의 속성으로 미뤄 보아 틀림없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더구나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 태도가 어딘지 미심쩍은 바 있었으며 무언지 진실을 감추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던 터에 동아일보의 이 기사는 불섶에 기름을 끼얹은 듯한 효과를 냈다.

그러나 검찰에서는 서울지검 김태현 차장검사까지 동원하여 '등산 중 실족사' 한 것으로 못을 박고 나섰다. 그리고 이 기사를 보도한 성락오 기자를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구속시켰다. 그런데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성락오가 아니라 의정부 주제기자였던 '장봉진'이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성락오 기자는 편집부 기자로서 그 기사의 제목과 지면배치 등 편집을 했던 것으로 그 기사 내용은 잘 알지 못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런데 당시 발효 중이었던 긴급조치 9호는 인간이 행할 수 이는 모든 행동거지에 대해서 모두 고리를 걸었다.

기자 구속 후 곧 석방시킨 이유는?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고 또 이를 듣거나 보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도 죄가 성립되도록 완전무결하게 엮어진 법(?)이 긴급조치라는 괴물이었다. 긴급조치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마지막 발악으로 발동된 것이며 그 첫 번째 대상이 장준하였던 것은 새삼 되뇌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는 죽으면서까지 그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 때문에 신문기자가 구속되었으니 인연이 있기는 단단히 있었던 모양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기사를 쓴 장본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편집기자만 구속했다는 사실이다. 편집기자가 구속될 사유라면 그 기사의 진원지인 취재기자는 당연히 구속되어야 했을 것이며 이것이 거꾸로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해 마지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스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자행되었다. 당사자인 동아일보에서도 꿀먹은 벙어리였고 다른 언론사에서는 구속 사실 자체도 보도하지 않았다. 약 보름이 지난 후 성락오는 기적처럼 석방되었다. 소위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것이다. 긴급조치로 구속되었던 사람을 기소유예로 풀어 준다는 것은 박정권의 속성으로 보아 기적같은 일이었고 과문일지 몰라도 긴급조치 발동 이후 처음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조용히 잠들었다. 어느 신문에서도 장준하의 이름 석자는 사라졌고 아무도 입벌려 이 금기의 벽을 깨려 하지 않았다.

그 후 민주통일당보에서만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장준하 특집을 발간하는 등 힘을 다 했으나 당기관지로서는 한계가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취재기자는 구속이 안되고 편집기자만이 구속되었다가 그나마 정당한 재판을 받지 않고 기소유예로 석방시켜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여기에 무슨 함정이 있는게 아닐까? 물론 당국으로서는 신문기자를 구속하여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은 부담이 가는 일일 것이다. 무소불위의 정보부로서는 언론기관은 '조정'의 대상이었고 더구나 동아일보는 139명의 기자들을 강제 해고시키고 아직도 후유증조차 제대로 수습이 안 되었을 때였다. 그런 시점에서 기자의 구속이 가져올 연쇄파동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들이 기소유예 처분을 해야 했을까?

아니다. 나는 강한 부정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뭔지 모를 암수가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편집기자가 기소되어 공개재판에 넘어가면 당연히 취재기자의 공동정범 문제가 제기될 것이며 그가 취재했던 기사의 소스가 밝혀져야 하며 나아가서는 현장답사, 이것이 싫었을 것이다. 싫다기보다 그것은 저들이 감추고자 하는 어떤 원천에 도달하는 길이며 그렇게 되어서는 만사휴의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한 번 잡아 가둔 사람을 쉽게 풀어줄 리가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당사자들의 해명이 있어야 할 때가 되었다.

현장답사에 목격자 안 나와

장준하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사회장으로 해야 한다, 광복군장으로 해야 한다, 사상계장으로 하자, 민주통일당장으로 하자는 등 장례의 격식으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으나 결국 가족장으로 낙착되었다. 가족장은 곧 동지장이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는 8월 21일 아침 파주군 광탄면 나사렛 천주교 묘지로 향하는 장례 행렬은 그가 남긴 재산과는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인파를 불러냈다. 그가 갇혀 있던 서울 구치소 앞을 지나면서 운구 행렬은 잠시 멈춰 묵념에 잠기기도 했다.

이철우 동지는 현장 목격자인 김용환을 만나 장례를 마친 3일 후 일요일 아침 8시 마장동 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대동다방에서 만나 현장을 안내하라고 부탁했으며 쾌히 승낙을 받았다. 또 당일 산행을 주선했던 호림 산악회 회장 김용덕도 참가를 약속했고 막역한 몇 사람이 동행하기로 했다. 나는 현장답사의 기록과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 각 언론사에 연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날 정각에 다방에 집합한 사람은 18명이었다. 대구에 있는 이원수(종섭)가 등산 차림으로 참석했고, 이준형, 김삼웅 등 동지들과 뜻밖에도 홍콩에서 발행되는「파 이스트 이코노믹 리뷰」誌의 로이 판이라는 외신기자와 동아일보 사회부의 송석형 기자가 동행했다. 송석형은 기독교 방송에서 근무하다가 동아일보로 옮긴 낯선 기자였으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용기를 낸 일이었다.

이철우와 나는 완전한 등산 장비에 30미터 자일까지 준비했다. 그런데 정작 안내해야 할 김용환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나 확실하게 약속한 일이기에 '설마 안 나오지는 않겠지' 하면서 두 시간을 기다렸으나 그는 끝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할 수 없이 김용덕의 안내를 받아 약사봉 계곡에 당도했다. 이 계곡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 사람의 내왕이 적은 곳이었고 큰길에서도 2킬로 남짓 깊숙이 들어가야만 현장에 이른다. 일행은 김용덕이가 그 날 등산회원들을 안내하여 점심을 지었던 곳까지 왔으며 이곳에서부터 장준하가 혼자 떨어져 산에 올라갔다는 설명을 들었다. 우리들도 그 자리에서 점심을 마친 다음 장준하가 올라갔던 그 길을 따라서 산행에 들어갔다.

이 길은 김용환 혼자서만 따라갔던 길이라 그가 없는 마당에 꼭 이 길로 올라갔는냐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김용덕의 증언과 산으로 오르는 길은 이 길 뿐이어서 틀림없는 듯 했다.

현장으로 가는 길은 없었다

외길을 따라 오르면서 목격자 김용환의 진술대로 중간 어느 지점에서 커피를 마셨는지 살펴봤으나 알 수 없었다. 이 커피를 마셨다는 대목은 그냥 흘려 버리기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다.

김용환의 말에 의하면 어느 만큼 산에 올라왔을 때 길 옆에 텐트를 친 두 사람의 군인이 있었다는 것이었으며 장준하는 평소의 습성대로 그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 다음 그 옆에 앉아 커피병을 꺼냈다는 것이다.

장준하는 7대 국회의원 당시 국방분과위원을 했고 광복군 출신인지라 군인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평생 박정희와 싸운 것은 그가 만군에서 '황도(皇道)에 가장 충실한 군인'으로 뽑혀 일본 육사를 나온 민족반역자라는 것과 그 뒤 5·16 쿠데타를 일으킨 정치군인이라는 데 있었다.

이런 한 줌 밖에 안 되는 정치군인을 제외하고는 국방의 간성인 군인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애정과 사랑을 따뜻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존재들이라는 것이 장준하의 생각이었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국정감사를 나갔을 때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이 먹는 국물을 직접 떠 마셨던 일은 지금도 얘깃거리고 남아있다.

아무튼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군인들에게 커피를 나눠줬고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그런 다음 다시 산행에 들어갔는데 문제는 왜 그 장소에 군인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지난해(1988년) 우리는 국군정보사령부라는 특수부대의 군인들에 의해서 군사문화를 비판한 중앙경제신문오홍근 사회부장이 아침 출근길에 테러를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또 1980년대에도 공수부대 특공대에게 광주가 쑥밭이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부정적인 측면이 우리의 뇌리를 스치면서 백기완의 말대로 '장준하는 특수부대원에 의한 타살' 이라는 가설이 성립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얘기로는 그 날 인근 군부대에서 무슨 훈련을 실시했기 때문에 군인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우리 일행은 군인들과의 대화 장소를 찾지 못하고 좀 더 올라가 '추락사의 현장'을 찾아 내려갔다. 오솔길이지만 쉬운 길이 나 있는데 하필 길도 아닌 곳으로 왜 내려갔을까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길이었다. 일행 중에는 필자를 포함하여 이철우, 김용덕 등 등산에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 있어 산의 형태로 봐서 '현장'으로 가려면 이 길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길을 택했다. 장준하가 그 현장에서 떨어진 게 틀림없다면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을 찾아 내려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고 남은 한 사람인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이가 안 왔으니 꼭 이 길로 내려갔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절벽길 따라 현장 도착

여러 차례 말하지만 현장으로 가는 길을 아예 없었고 70도의 같은 곳을 개척하며 내려갔다. 한 번 굴러 떨어지면 저 산밑에서 '말없이' 만나야 되는 무시무시한 하산길이다. 18명의 일행이라 행여 새로운 사고가 있을까 고함을 질러가며 조심을 시켰다. 맨 앞은 가장 날쌘 이철우가 맡고 후미는 김용덕이가 봤다.

그러나 워낙 위험한 길이라 누가 누구를 봐줄 처지가 못 되었다. 죽기 싫으면 나무고 바위고 움켜쥐고 벌벌 떨면서 한 발 한 발 기어 내려가야만 되는 것이다. 가파른 절벽이라 큰 나무들이 자라지 못해 여름인데도 시야가 트여 좀 나은 편이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데다가 흙투성이가 되었다. 죽은 사람의 현장을 찾아가다 또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무척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가신 선생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더듬어 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길은 두 번 다시 올 길이 못된다. 우리 일행 모두의 마음에는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과 진상을 알아야겠다는 결심으로 무서움과 고통을 이겨내며 가까스로 내려갔다. 현장 도착에는 꽤 시간이 흘렀다. 김용덕이가 시신이 누워 있던 현장임을 확인했다. 그는 목격자 김용환이가 헐레벌떡 뛰어 내려와 "장준하 선생이 떨어져 돌아가셨다." 는 말을 듣고 번개처럼 달려와 '현장의 시신'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현장에 도착하긴 했지만 아직 시신이 누워 있던 곳에 이른게 아니라 장준하 선생이 실족했다는 소나무 옆까지 온 것이었다. 좌우를 살펴보니 어렵긴 해도 내려갈 수 있을 듯했다. 검사가 현장검증을 하면서 장준하가 소나무를 붙들고 건너편으로 건너가려다가 실족했는데 소나무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질 치는 통에 소나무가 아래쪽으로 기울어졌다고 소견을 발표했는데 이 소나무는 사람이 잡고 늘어져서 기운 게 아니고 절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원래 기울어져 있었다.

따라서 검사의 이 발표는 현장검증을 안 했거나 검증을 했어도 목격자의 진술만을 곧이곧대로 믿고 현장확인을 안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윤재걸 기자의 르포에 "검찰과 경찰에서 김용환을 대동 현장검증 및 확인을 한 일이 없다." 고 밝힌 것으로 보아 필자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본다.

자일 타고 내려간 16m 70cm

우리는 소나무로부터 추락현장까지 실측 조사에 들어갔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장준하가 잡고 매달리느라고 휘어졌다는 소나무는 직경 10cm 이상 되는 튼튼한 나무였기 때문에 70kg의 필자가 아무리 매달려 흔들어도 끄떡없었다. 나는 이 나무에 자일을 걸고 록 클라이밍 훈련할 때 익혔던 솜씨로 현수하강의 방법을 써서 천천히 내려왔다. 절벽의 각도는 70도로 자일을 타는 데는 별다른 위험이 없었고 아래에는 암벽을 타고 계곡처럼 물이 흘러내려 작은 폭포가 되어 있었다. 여름철이어서 오래된 이끼가 많이 끼어 있었으나 사람이 추락하면서 부딪치거나 스친 자국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장준하가 분명히 이곳에서 떨어졌다면 한번쯤 중간에 걸렸을 것이며 육중한 인체에 가중력이 붙어 스치기만 해도 이끼나 잡초는 뭉개져 버렸을 게 아닌가. 더구나 시신의 처음 위치는 절벽 바로 밑이었다고 했지 않은가.

나는 이 절벽을 타고 내려오며 먼저 가신 선생이 참말 이 곳에서 떨어진 것이라면 큰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 높이 때문이었다. 자일을 회수하여 소나무 밑동에서 절벽 밑까지 줄자로 재어보니 16미터 70센치였다. 요새 많이 짓는 아파트 5층 이상의 높이가 아닌가? 더구나 시신의 위치가 절벽 바로 밑이었다는 목격자 진술대로라면 그 자리는 어른 머리통만한 뾰족뾰족한 견치석들이 깔려 있어 깨져도 보통 깨질 자리가 아니었다. 또 16미터나 추락한 사람이 어떻게 잠자는 듯 반듯이 누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등산인들은 언제나 추락의 위험을 안고 산에 다닌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조심해서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인다. 그래서 절벽에서 추락했을 때 어떤 정도의 부상을 입거나 치명상을 당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올림픽 경기장에서 100미터를 뛰는 단거리 육상선수는 마라톤을 달리는 장거리 선수에 비해서 월등하게 체중이 무겁다. 지난번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가 약물복용으로 망신을 당했던 벤 존슨의 엄청난 근육과 파워를 모두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80kg이 넘는 육중한 체구로 전속력으로 달릴 때 그 체중에서 나오는 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남을 앞지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체중이 무겁다고 다 잘 달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와 똑같은 이치로 무거운 물체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그 물체는 떨어져 내려오면서 가중력이 생긴다. 가중력은 10미터를 떨어졌을 때 약 10배의 무게로 계산되며 이 가중력을 감안하여 등산 자일을 보통 1천 2백kg ∼ 1천 5백kg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장준하의 몸무게가 80kg이었다고 치면 그가 16m를 추락했을 때의 몸무게는 약 1천kg이 넘었을 것이고 이 무게로 바위에 부딪치면 그 결과는 어찌 되겠는가?

외상과 골절이 없는 추락사라니

우리들은 근처에 있는 통나무를 들어 위에서 던져 보았다. 통나무는 쓰러진 지 오래 된 고목이었지만 절벽 아래 부딪치는 순간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머리통 만한 바윗돌을 굴렸더니 절벽 중간에 한 번 튕기더니 저 멀리 떨어졌다. 몇 차례를 반복해도 결과는 비슷했으며 이로써 장준하가 추락했다면 절벽 바로 밑에 누워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돌덩이와 인체는 다르다. 그러나 떨어지는 모든 물체는 멀리 튕겨지게 되어 있고 절벽 바로 밑에 떨어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자리에 누워서 숨져 있었을까? 잠자는 사람처럼 반듯이 누워서 떨어졌다는 말인가? 그의 시신을 염한 사람도, 그의 시신을 검안한 의사들도 도저히 추락사한 사람으로 믿을 수 없다는 이 불가사의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외상이나 골절이 생겨도 크게 생겨야 할 상황인데 전연 말짱하다는 것은 '세상일이란 그런 기적 같은 일도 있는 법'이라는 말로는 납득이 안 된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은 없는 것이라고 강변하려는 맘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장준하가 누구인가? 권력에 맞싸우는 신념과 용기의 화신이다. 부귀영화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소신대로 산 분이다. 하필이면 그가 산에서 떨어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검시 결과 그의 양팔 겨드랑이 쪽에 피멍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의사들 말로도 이 멍은 사반(死斑)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저항하는 그를, 또는 이미 죽은 그를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어 부축하다가 절벽 밑에 뉘어 놨을 수는 없는 것일까?

꼬리를 무는 의문이 뭉게구름 일 듯 하는데 국회에서 조만후 의원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경기도경에서 재수사를 시작했는데 결론은 추락사로 다시 한번 단정지어졌다.

그런데 한가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추락 현장에 달려와서 사진을 찍은 사람이 새로 나타난 것이다. 그 사람은 카메라로 장준하의 시신을 촬영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약사봉 근처 마을에 사는 임 아무개씨라고 하는데 그의 증언에도 시신의 형체가 높은 곳에서 추락한 사람으로 믿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증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고 이번에 재수사 과정에서 나타난 것은 사건 당시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얼마나 무성의했던가를 웅변으로 증명하는 바다.

암살의 의문은 더욱 짙다

그의 사인은 검시 의사의 소견으로 오른쪽 귀 뒤 급소가 예리한 흉기에 찔린 듯한 함몰된 상처가 치사를 가져온 듯 싶다는 것이었다. 이 경우 예리한 흉기가 아니라 추락하면서 뾰족한 바위나 나무에 찾기도 어려운 귀 뒷부분이 부딪쳐서 생긴 상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데는 아무 탈이 없는데 하필 급소만 다쳐야 한단 말인가.

이번 재수사에서 현장 목격자인 김용환이 충남 당진에서 중학교 교편을 잡고 있다고 하는데 그의 진술은 13년 전과 똑같았다고 발표했다. 그는 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역사적인 사건의 목격자로서 과연 양심에 어긋나지 않은 증언을 한 것일까? 그가 떳떳했다면 왜 현장답사의 안내를 약속하고서도 나타나지 않았는가? 급한 볼 일이 생겼었다면 그 뒤 연락이라도 한번 해야 되지 않았을까? 미국으로 이민 갔다, 브라질로 이민 가서 죽었다더라, 하는 무성한 유언비어를 그는 못 듣고 살아왔는가? 13년이라는 세월을 눈감고 귀 막고, 입막고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암살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짙어만 가는데 미륵보살처럼 입을 꽉 다문 김용환은 가슴을 활짝 열고 자진해서 양심 선언을 할 용의는 없는가? 경찰서에서의 진술이 아니라 요새 유행하는 공개청문회라도 열어 이러한 의문점을 파헤쳐야 되지 않겠는가?

개성 송악산을 바라보며 나사렛 묘지에 잠들어 있는 선생의 영혼이 정녕 이 민족의 자주통일과 조국의 민주화를 염원하고 있고 우리가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고 하면, 이제 그의 죽음의 이유를 밝히는데 더욱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하겠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며 우리들의 운동 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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