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의 뱅크런과 비트코인 급등 마운트 곡스 비트코인 폭락

in #kr7 years ago

키프로스 공화국(그리스어: Κυπριακή Δημοκρατία 키프리아키 디모크라티아, 터키어: Kıbrıs Cumhuriyeti 크브르스 줌후리예티, 문화어: 끼쁘로스 공화국), 줄여서 키프로스(그리스어: Κύπρος 키프로스, 터키어: Kıbrıs 크브르스)는 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나라로, 북쪽에는 터키, 동쪽에는 시리아 · 레바논 및 이스라엘, 서쪽에는 그리스, 남쪽에는 이집트가 있다.
키프로스는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해마다 24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인기 관광지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960년에 독립하여 1961년 영국 연방에 가입하였다. 키프로스 공화국은 이 지역에서 매우 선진적인 경제 수준을 보이며, 2004년 5월 1일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1974년,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계 키프로스 민족주의자 들이 키프로스 섬을 그리스에 병합하고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터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섬의 37%를 점령하였다. 터키는 키프로스에 군사 개입을 하면서 미국 과 북대서양 조약기구 의 비밀 지원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 천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으며, 키프로스 섬 북부에 북키프로스 정부가 수립되어 남북이 분단되었다.
국제적으로 승인된 키프로스 유일의 합법정부인 키프로스 공화국은 법적으로 영국에 할당된 군사기지 지역을 제외한 키프로스 섬 전체 및 모든 해역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으나, 사실상 북부의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과 분단된 상태에 있다. 이 섬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1960년 8월에 키프로스는 영국, 그리스, 터키가 맺은 취리히 및 런던 협정으로 독립을 얻었다. 다만, 아크로티리 데켈리아의 두 군사지역은 영국이 보유하기로 하였다. 키프로스 정부의 공직과 공무는 두 민족에게 할당을 두며, 터키계에게 영구 거부권을 부여하고 의회와 행정부에 30%의 비중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1963년 내부 분쟁이 일어났고, 두 "모국"(그리스와 터키)은 배후에서 이 분쟁에 부분적으로 관여하였다. 일부 지역의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은 보호 구역으로 쫓겨났으며,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지도자 마카리오스 3세 대주교는 양측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개헌을 요구하였다. 결국 유엔이 개입하여 키프로스 유엔군(UNICYP)이 파견되었다.
1970년대 초에 집권한 그리스 군사 정권은 마카리오스 3세의 정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스-키프로스 병합에 진전을 보고자 하였다. 그리스 군사 정권은 그리스 내 반대파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1974년 7월 13일 키프로스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사 정권은 강제로 니코스 삼손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그는 그리스 민족주의자이긴 했으나,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병합을 선언하지 않았으며, 키프로스가 계속 독립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1] 그러나, 터키 정부는 불안을 느끼고 쿠데타에 항의하며 영국의 개입을 요구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터키는 취리히 및 런던 협정에 따라 자국의 권리를 주장한 후 7일 만에 헌정 질서의 복원을 명분으로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사태에 개입하였다. 그리스는 키프로스 전사 민족단이란 준군사조직을 새로 만들어 침략자를 격퇴하겠다고 발표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터키가 점령한 지역 내의 그리스계 주민들이 추방되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수적으로 불리했던 그리스 군대는 터키의 진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섬의 남동쪽 끝에 위치한 아야 나파 지역은 영국의 군사 지역인 데켈리아 뒤에 있었기 때문에 터키의 점령을 피하였다.
당시 키프로스 국토의 37%가 터키의 점령지가 되면서 북쪽에 있던 17만여 명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과 남쪽에 있던 5만여 명의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이 각각 터전을 잃었다. 터키 군대가 북부 영토를 장악한 이후, 키프로스 공화국은 북부 지역의 모든 통관항을 봉쇄한다고 발표하였다. 1983년에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은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국제 연합의 압력으로 인해 터키 외에는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분쟁으로 인해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1,534명 과 터키계 키프로스인 502명 이 행방불명되었다. 1974년 여름의 이 사건은 키프로스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터키의 외교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이후 국제 사회의 합의를 무시하고 10만여 명의 터키인이 터키로부터 이주해 북키프로스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니코시아는 현재까지 분단된 수도로 알려져 있으며, 터키군의 침공으로 폭파된 니코시아 국제공항은 폐허가 된 채 그대로 있다. 건물의 일부를 UN군이 쓰고 있는 것 외에는 공항이 봉쇄된 상태며, 현재 키프로스 제 1의 관문은 라르나카 국제공항이다.
국제적으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고 있는 남부의 키프로스 공화국은 2004년에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2008년 1월 1일에는 유로존에 가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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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를 보면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오히려 타의에 의해서 분단된 한국처럼 남북 분단이 된 나라이니 역사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비트코인 시세는 2013년 키프로스의 재정위기로 정부가 예금인출을 제한하고 과세를 시작하자 부유층들이 앞다투어 비트코인 매입에 나서는 바람에 40달러[지금가치는 무려 8000달러!] 전후였던 비트코인 값이 2주 만에 2배가 넘었다. 비트코인의 가치는 2013년 3월 키프로스 구제금융 사태 당시 자금이동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급증한 것이다. 키프로스에 예금을 보유중이던 러시아 부호들이 헤어컷과 출금제한 및 자산가치 하락등을 회피할 방법의 하나로 비트코인이 주목받았다.
키프로스 사태로 뱅크런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키프로스 은행들은 연이틀 폐점한다.
외신은 키프로스 은행들이 2013년 3월 18일(현지시간)에 이어 19일과 20일에도 폐점한다고 밝혔다. 대량 예금인출(뱅크런) 사태를 우려한 극단의 조치다. 앞서 키프로스 정부는 유로존으로부터 100억 유로(한화 약 14조4,000억원)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모든 예금에 부담금을 물리기로 했다. 키프로스, 뱅크런 막으려 ATM 인출액 100유로 제한한다는 연합뉴스의 보도도 2013년 3월 25일 발생했다.
한국 저축은행 사태를 봐도 부실은 정부나 은행이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이 보고 부유층은 이미 정보를 듣고 돈을 빼갔을 것이다. 정말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각자도생의 시기가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 사태가 오히려 비트코인 홍보대사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비트코인으로 가지고 있다면 바로 달러와 환금이 가능하니 출금제한등 은행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또 필자 생각은 키프로스 인들은 매우 부자라고 보는데 4년만에 비트코인 시세가 200배가 올랐으니 다 백만장자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비트코인의 최대 단점은 블록체인 시스템의 설계가 아니라 마운트 콕스나 빗썸등 거래소 해킹과 거래소 운영자나 직원의 도덕적 해이나 무능등 사람이 항상 문제가 된다.
2013년 4월 봄, 비트코인 가격은 233불에서 67불까지 무섭게 폭락을 했다.
마운트 곡스 거래소 파산 주범 Mark Karpeles, 거래소 파산 청산 이후 비트코인 급등으로 8억 5900만 달러 상당의 비트코인 챙길듯하다는 뉴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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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네요. 얼마전 베네수엘라와 짐바브웨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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