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회고록 정리

in #kr6 years ago (edited)

닉슨 회고록 읽으면서 정리한 내용. 기록 차원에서.

닉슨 회고록(원제 RN: The memoires of Richard Nixon)은 닉슨이 1974년에 퇴임하고 1978년에 출간. 페이지수는 출간 당시 1094pages. 국내에는 1984년에 발췌본로 p477 분량으로 출간. 출판사는 임창출판공사. 임창출판공사는 80년대 세계대통령수상 대회고록 시리즈를 발간했는데, 닉슨이 이 중에 하나였음.

내용은 시간순으로 기술됨.

  1. 내용에서 외교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큼. 베트남전쟁, 구소련, 중국과의 핑퐁외교, 쿠바 등과 외교적 문제를 어떻게 다뤘는지가 자세하게 나와있고,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도 자주 등장함.

  2. 또 닉슨 역시 자랑하기 좋아함. 자화자찬하는 대목이 꽤 많은데 예를 들면
    본인이 라이벌이라고 여겼던 케네디를 묘사하는 장면은 이렇게 기술돼있음.
    "초기에 우리는 정치적 경쟁자라기 보다는 반대당의 좋은 맞수로 생각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동료 의원들 중 두드러진 자질을 공유했는데, 그것을 우리가 결코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겉으로만 공공연하게 호의를 보여주는 태도에 아주 불편한 사람들이었다."
    또 특약 컬럼니스트 니콜라스의 칼럼을 인용하며
    "리처드 닉슨이 주도한 생각이 실질적으로 정부를 움직여 나갔으며, 이것은 70년간 어떠한 대통령도 시도하지 않았던 중요한 것이다."

  3. 가장 중요한 워터게이트 부분. 시종일관 변명조. 주요 부분을 발췌하면
    "무서운 정치적인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법부에 개인적인 압력을 넣지 않았다. 조사가 끝난 뒤 백악관의 누구도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연방수사국의 조사결과, 대배심원의 조사를 -백악관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아무런 관련이 없고, 공화당의 고위관리도 관련이 없었다. 공개성명으로 발표하자고 했으나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2월말 어빈의 청문회가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때 공화당 의원들은 분노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워터게이트에서 무엇을 했는지 공개하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당시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이, 백악관이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왜 이 문제에 대해 반대입장에 서서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드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미리 불법침입에 대해 아무 것도, 그리고 전화도청 계획에 관한 보고서를 본 적이 없다. 아무도 내게 캄바크에게서 자금을 조달하여 피고인들에게 35만달러를 지불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나를 공개적으로 냉소와 비도더적이라는 말로 비난한다하여도, 내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리고 나자신 일부 관련있는 일로해서 나의 친구들을 파멸시켜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내가 자신에게 정직하게 털어놓는다면, 나는 헌트에게 뇌물을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것은 워터게이트 때문이 아닌, 엘스버스 정신병원 사무실에서 불법침입에 관해 에리크만에 대할 위협과 정부에 대한 위협 때문이었다."
    "1973년 4월30일 처음으로 내가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해 미국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연설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이 연설을 재촉한 복잡한 상황에 대해 이해한 것은 아ㅢ 가장 가까운 측근 두 명이 워터게이트 은닉사건에 개입했음을 비나받고 있었고, 전 검찰총장이 나의 친한 벗이 불법침입사건과 도청장치를 명령했다는 이유로고발됐다는 점이다."

  4. 대통령 탄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테이프 사건에 대해서도 닉슨은 국회에 테이프 제출을 거부하면서
    "헌법하에서는 정부의 세 기구,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독자적으로 상호 보완하며 우녕해 나가게 되어있다. 어떤 다른 부서도 우월권을 행사하거나 내적인 문제에 관한 문서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의 전례가 바로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다. 그느 행정부의 문서를 하원에 제출하는 것을 거부했다."
    "테이프를 없애버려야 하는가에 관해 나는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1973년 6월 4일 내가 그 테이프를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은 마치 뒤석여진 가방 속처럼 느꼈다. 거기에는 정치적으로 당혹케하는 대화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많은 모호한 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테이프의 내용이 내가 지난 8개월동안 정의를 방해하는 것에 대해 딘과 공모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테이프들을 소각시키는 행위는 지울 수 없는 죄의 인상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헤이그의 설명에 나는 설득되어졌다."
    심지어 이런 정신승리도 함.
    "만일 내가 정말 불법적인 행위를 논의했다면, 나는 녹음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만일 내가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논의했고, 그것을 녹음했다면 나는 수사가 시작됐을 때 그 테이프들을 소각시켜 버렸을 것이다. 마침내 나는 테이프들이 나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가장 확실한 보호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테이프 공개를 거부하는 행정부 특권을 발동하기로 결정했다. 7월23일 상워의원 어윈에게 어떤 테이프도 위원회 조사에 넘겨줄 수 없다고 편지를 보냇고, 어윈은 그 편지를 받자마자 위원회를 소집해 다섯개 테이프에 대한 소호나장을 발부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나의 거부로 말미암아 행정부 특권을 연방 최고법원에서 심의받게 된 첫번째 대통령이 됐다."
    또 국회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루면서 국정을 소홀히 한다는 주장도 단골메뉴.
    "3개월간에 걸친 워터게이트 사건의 논의로, 국회는 국내문제나 국외문제를 거의 취급하지 못했다. 나는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만일 내가 테이프에 관한 싸움에서 만족할 만한 타협점을 찾아내려면, 콕스를 해고시키고 워터게이트 사건을 사법부 관할로 이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다른 어떤 때보다도 나는 콕스를 해고하고 싶었다."

  5. 콕스 특별검사를 해고시키는 대목에선
    스테니스 계획이라고 민주당 상원의원 존 스테니스에게 테이프의 사본 대신 요약한 것만을 제출하려는 계획을 맡겼고, 스테니스가 그것을 콕스에게 설득했으나, 콕스가 거부. 결국 법무부장관 리처드슨에게 콕스를 해고하라고 전화하자, 리차드슨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자신이 사임.
    그 이후 여론을 감당할 수 없자 테이프를 결국 제출했지만, 9개의 테이프 중 2개가 녹음이 안 돼있고, 다른 테이프도 중간에 잘리거나 잘 안들리는 구간이 많았음.
    "각종 매스컴에서 <잃어버린 두 개의 테이프>에 대해 분개하면서 보도했다. 테이프를 작동시켜보고 18분30초의 갭이 있다는 사실을 부즈하트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아무도 어떻게 또는 왜 그것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었고, 뒷면의 빈 부분에서 날카롭게 위윙대는 소리가 무엇 때문에 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6. 1978년 즈음 닉슨의 근황
    1977년 영국 언론인 프로스트와 텔레비전 인터뷰를 진행함. 인터뷰 대가로 60만달러를 받았고, 인터뷰는 미국 전역에 방송됨. 1978년 책 출간하고서 그는 영국, 프랑스 등을 다니며 옥스포드유닌언(옥스포드대학의 토론클럽)에서 강연하고, 프랑스의 텔레비전 인터뷰에 등장함. 또 그는 1979년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
    1977년엔 60만달러를 받고서 영국의 언론인 프로스트와 텔레비전 인터뷰를 진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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