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별을 쫓는 해바라기 25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형의 장례를 마치고 가게로 돌아오니, 뜻밖에 초혜가 돌아와 있었다. 내장을 다 쏟으며 죽어가는 들개를 그리며 우울해하던 초혜는 명랑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다는 약속은 아직까지 유효한 거죠?"

초혜는 아주 명랑하고 밝아져 있었다. 노란색 카디건이 그녀의 화사하게 피어오른 얼굴을 더욱 밝게 떠받쳐 주고 있었다.

"그럼. 언제든지."

"고맙습니다."

여자애들 셋이서 분주하게 가게 안을 왔다 갔다 하니, 오랜만에 장사다운 장사를 하는 것 같았다.

저녁 늦게 남기와 제민이 가게로 들렀다. 내가 일부러 부른 것이지만, 남기 혼자 부르는 것보다 제민과 같이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양희에게 맥주를 몇 병 가져오게 하여 우선 목부터 축였다.

제민은 처음 가게로 들어올 때부터 침울하더니 내내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늦어도 어제쯤에는 연락이 와야 되는데, 아무 소식도 없는 것을 보니 또 낙방인가 봐. 신춘문예와는 영 인연이 안 닿는 모양이야."

제민은 또 낙방의 고배를 마신 모양이었다. 그는 맥 빠진 채 술잔만 빙빙 돌리고 있다.

"윤도 형 일은 정말 안 됐다."

남기는 위로의 말부터 던져왔다. 그 역시 많이 침울해져 있었다. 전에는 세영에게 곧잘 농담도 던지더니, 요즈음은 가게에 들러 맥주나 몇 잔 홀짝거리다가 말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너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니? 왜 이리 기운이 없어? 인마! 너 답지 않아."

나는 남기의 근황을 물으며 외곽부터 치기로 작정했다. 남기는 맥주를 한 번에 쭉 들이켠 다음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회의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터널 속을 걷는 것처럼 지치고 힘들다. 누구를 위한 투쟁인지, 그리고 그 투쟁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어. 내가 힘겹게 디디고 선 발판이 흔들리며 무너지고 있어."

녀석은 운동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운동을 하다보면 부지불식간에 회의가 밀려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지가 하나 둘 떠날 때나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투쟁했던 대상들이 냉정하게 등을 돌릴 때에는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든다는 것이었다. 그때가 바로 고비라는 얘기였다. 대부분이 그때에 이탈을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남기가 지금 그 시점에 서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의 너에게 이런 말이 오히려 심적 갈등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지만, 너도 이것만은 알아주었으면 싶다. 사실 형의 죽음에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노법사가 개입되어 있어. 노법사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형뿐이었어. 그가 자살을 했든 타살되었던 이번 일은 모두 노법사의 정체를 숨기려는 의도가 밑바닥에 깔려 있어."

"네 형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면, 노법사가 네 형을 죽였다는 말이냐?"

남기가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역시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 모양이었다.

"일종의 가정이야. 형은 죽었고, 유일하게 이 사건을 명확하게 밝혀 줄 수 있는 사람은 노법사뿐이야. 노법사, 그를 만나고 싶어. 노법사를 좀 만나게 해 줘."

"나도 노법사가 누구인지 몰라.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돼. 어쩌면 그는 실제 인물이 아닐 수도 있어. 가공의 인물인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그렇지는 않아. 그는 실존인물이야. 형이 자기 입으로 말했어. 직접 노법사로부터 학습을 받았다고.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 마치 노법사가 형을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쨌든 나는 노법사를 몰라."

"네가 노법사를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나서서 한 번 찾아보라는 거야. 너는 그 쪽에 줄을 댈 수가 있잖아."

"하지만..."

남기는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애당초 남기에게 큰 기대는 걸지 않았지만 이쯤에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재우가 형을 노법사에게 연결시켜 주었어. 너는 재우와 친하잖아. 또 재우가 친하게 지내는 동지들도 많이 알고 있고. 그들은 어쩌면 재우처럼 노법사와의 연결이 가능할 지도 모르잖아."

"네 말이 무얼 얘기 하고 있는 지 알아. 하지만 이건 동지를 파는 일이야. 엄청난 배신일 수도 있어."

"아니, 나는 네게 배신을 강요하는 것이 아냐. 한 사람이 죽었어. 내 형이라는 것을 떠나서 한 사람의 생명체가 어떻게 죽었는가는 규명해야 할 거 아니냐. 그가 비록 하찮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

"너희들은 조직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른다며? 점거 시위에 들어갈 사람도 미리 정해지며, 심지어 투신이나 분신까지도..."

"닥쳐! 함부로 지껄이지 마!"

남기는 내 말을 단칼에 자르며 탁자를 주먹으로 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술병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나는 떨어지는 병을 잽싸게 손으로 낚아챘다. 나는 태연하게 병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테이블에서 고개를 삐죽이 내밀며 우리 쪽을 힐끗거렸다.

남기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주먹을 움켜 쥔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주먹질이라도 가해 올 듯 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표범이 털을 곤두세우며 적의를 드러내듯. 남기에게는 쉽사리 자기의 아킬레스 근을 유린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결연했다.

"현수, 네가 너무 심했어."

그때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제민이 화해를 자청하고 나섰다. 이것이 내가 제민을 부른 이유이기도 했다. 남기를 자극해서 흥분하게 하는 것과 제민이 말리러 나서는 것까지는 철저하게 나의 계산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심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형이 이상하게 죽고. 너라도 나 같은 경우에 처했더라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을 거야. 사람이 어려운 경우에 처하면 실오라기 하나라도 움켜잡으려고 하듯이, 그런 터무니없는 말조차도 믿게 되는 거야.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

나는 남기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던 세영이 눈치 빠르게 맥주를 세 병 더 가져왔고, 나는 더 이상 남기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제는 남기의 결단만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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