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37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누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고, 내가 재호의 방에 누워 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계속 쫓겨 다니다가 목숨을 잃어버릴 뻔 한 순간에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자혜가 내 어깨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어느새 재호도 깨어 있었다.
"좀 전의 그 여자가 깨어나서 강재 씨를 찾아요. 어서 가요.”
나는 아직도 잠이 덜 깬 눈을 두 손으로 비비며 여자가 있는 방으로 갔다. 자혜와 재호도 나를 뒤따라 들어왔다.
여자는 담요를 몸에 둘둘 말은 채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표정을 보니 제법 생기를 찾은 것 같았다. 여자는 자혜와 재호를 힐끗힐끗 보더니,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하지 않을 눈치였다.
"이 두 사람은 저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니까, 무슨 말을 해도 괜찮습니다. 이미 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기도 하고요.”
나는 여자를 안심시켰다. 재호와 자혜를 번갈아 쳐다본 뒤, 그제야 여자는 입을 뗐다.
"그 서류는 잘 보관하셨지요?”
힘이 드는지 여자의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제 소개부터 해야겠네요. 저는 장현태 부장님의 개인 비서인 현역 육군중사 이수란입니다. 우선 장 부장님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순서겠지요? 장 부장님께서는 아마도 체포되신 듯합니다. 저를 신문하던 자들의 대화에서 느낀 것이기에 단정적으로는 말씀 못 드리겠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장 부장님이 체포되셨다는 제 추측이 거의 확실할 겁니다. 지금 이 사태는 정보 계통간의 파워 게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두 개로 양분된 정보계열 간에 알력이 생겨났어요. 저희 쪽은 주로 장애물 제거에 역점을 두었고, 그 일을 강재 씨가 적절하게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저쪽은 우리와는 다르게 프락치 활동에 중점을 두었지요. 저쪽에서 상당한 시간과 물량을 투입해서 공작을 해놓으면 우리 쪽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타깃을 제거해버리는 통에 저쪽의 모든 활동이 수포로 돌아가곤 했던 거죠. 이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정보부의 유종석 부장은 CIA요원인 마이클 로빈 테러사건이 나자, 저희 같은 정보기관이 비밀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언론에 슬며시 흘린 거죠. 물론 사전에 저희 측에서 미리 손을 써서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막았지만, 상부에서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죠. 이미 저쪽은 공공연하게 노출되어 있고, 사실 중앙정보부는 공식적인 정부기관이니까요. 그래서 저희 쪽을 제거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정을 내린 걸로 저는 알고 있어요. 이를 틈타 유종석은 재빨리 무력으로 저희를 접수했지요. 전혀 손쓸 틈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저도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에 납치되어 그 같은 수모를 당하게 된 겁니다.”
느린 말투였지만 이수란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가끔 상처의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며 잠깐씩 말을 중단했을 뿐, 대체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말을 마친 여자가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드는지 몸을 눕히려 하자, 자혜가 자리에 눕는 것을 도와주었다.
방안은 내가 피운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강재는 물론 마이클 로빈의 죽음이 그 시발점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것은 내가 유종석 부장을 납치하려다가 실패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장현태 부장의 요구대로 유종석을 깨끗이 죽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때늦은 후회가 뒤를 이었다.
나는 창문을 반쯤 열어젖혔다. 싸늘한 한기가 얼씨구나, 하고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밖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긴 싸리비로 절간을 청소하는 동자승의 반질반질한 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추워 보였다.
"제가 오늘 새벽에 본부에 잠입한 것은 뭔가 답답하기도 했고, 이번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일단 한번 부딪쳐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수란 씨를 만나니 조금은 윤곽이 드러나는 느낌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수란의 머리맡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이수란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끙'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여자의 몸으로 그 엄청난 수모와 고문을 당했으니, 몸과 마음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여자, 이수란은 초연한 의지로 감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현역군인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강한 여자였다.
"저도 장 부장님의 눈에 띄어 파견근무를 나와 있는 처지라는 것을 알아주세요. 게다가 부장님의 개인비서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겨우 잔심부름이나 하는 정도였어요. 제가 교육받은 것은 극비서류의 비밀장소 보관과 유사시엔 그것을 은폐 내지는 소각시켜야 한다는 것뿐이지요.”
나는 활기차게 모퉁이를 돌아가다가 갑자기 막다른 벽에 부딪친 것 같은 암담함을 느꼈다. 내가 실망한 눈치를 보이자, 여자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저만 아는 얘긴데, 장 부장님은 인천에 분국을 설치할 계획이셨죠. 부산에는 이미 분국이 설치되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일단 인천의 분국으로 한번 가보기로 하죠.”
여자는 말을 하고 나니 시원하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의문만 더해 갈 뿐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군요. 제 생각에는 저의 신분은 장 부장님과 천종수,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수란 씨는 어떻게 제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까?”
내 말투가 의심하는 식이어서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쓸 처지가 아니었다. 이 부분만큼은 반드시 규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저도 사실 강재 씨를 알지 못했어요. 다만 우리 일을 수행하는 뛰어난 행동대원이 있다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저들이 취조 과정에서 수차례나 강재 씨의 이름을 대며 행방을 물어왔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행동대원의 이름이 강재구나, 하고 짐작했을 뿐이에요. 강재 씨의 신분이 드러난 것은 장 부장이나 천종수, 둘 중 누가 고문에 못 이겨 실토를 했기 때문이겠죠. 어쨌든 인천부터 가보기로 하죠. 오늘 오후에…….”
"오늘 오후에요? 그 몸으로 갈 수 있겠어요?”
자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자혜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루라도 더 같이 지내고 싶은 그녀의 심정을 강재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는 수란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혜의 말에 즉각 반박했다.
"남자들도 겁내는 특수훈련을 여러 차례나 받았어요. 이 정도는 견딜 만해요. 놈들은 제게서 정보를 캔다는 목적보다는 그냥 여자의 몸을 희롱해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몸이 아주 못 쓰게 될 정도의 고문은 가하지 않았어요.”
이수란은 수치스런 모습을 강재에게 보여줘 창피하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다시 드러났다. 자혜보다 어린 나이지만 수란은 꽤 다부져 보였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깔끔한 용모였다. 그런 여자의 눈에서 불을 뿜는 것 같은 광채가 솟아 나왔다.
"지금 갑자기 생각난 건데…… 혹시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저는 강재 씨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지금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확실하네요. 거기서 강재 씨를 보았어요. 거기가 어딘지 아시겠죠?”
이수란이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낯이 익은 것도 같았다. 이수란을 찬찬히 뜯어보니 분명 어디선가 본 듯 한 얼굴이었다. 분명 어디서 이수란을 보았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예전의 그 특수훈련소를 기억하시나요?”
이수란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기억 속에 밝은 전구 하나가 환하게 빛을 밝혔다. 그렇다. 특수훈련소에서 홍일점이었던 그 여자. 오히려 남자들보다 더 용감하고 적극적이었던 여자. 그 여자가 바로 이수란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 특수훈련소를 잊을 수 있겠어요? 지금도 수시로 그때의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깨어나곤 합니다.”
"어머! 저도 그래요. 저 역시 그때의 악몽을 자주 꾸곤 해요.”
그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수란과 아주 오래 전부터 깊은 교류를 가져 온 사이처럼 여겨졌다. 깊은 공감대. 한때 사선을 넘었다는 그 끈끈한 동지애가 어느 새 우리 두 사람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그 훈련소를 제 발로 걸어서 나온 사람은 수란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수란은 나보다 이틀 먼저 훈련소를 퇴소했고, 나는 그 이틀 뒤에 당당하게 두 다리로 걸어 나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천종수의 승용차에 올라탔던 것이다. 대부분이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부상당해 들것에 실려 나간 것과는 반대로.
자혜와 재호는 그저 영문을 모른 채,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두 사람이 무엇을 알겠는가! 두 사람이 사는 세계와 나와 수란이 사는 세계는 엄연히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두 세계가 서로 공존하면서도 전혀 이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하기는!
영원히 나와 수란이 속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게 그들에겐 행복하겠지. 이제 나와 수란이 속한 어두운 세계의 입구에 멋모르고 서 있는 자혜와 재호를 보며, 나는 나 자신이 정말 사갈과도 같이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