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rival of 'New Women' : 예술로 보는 근대화와 여성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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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여성' 이라는 존재는 인류 역사상 수도 없이 많은 타자화를 거쳐 왔던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여성을 구분지어 가리키는 단어 중 하나인 '신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 초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가치관이나 태도를 추구하는 여성이라는 뜻으로써 활용되었다. 물론 1900년대 이후 이러한 중/고등교육을 거친 여성들의 등장은 세계적으로 일관된 현상이기도 하였으나, 조선 왕조로 대표되는 전근대의 종료 직후 식민지 시절을 거친 특수한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의 경우 근대 여권 신장의 측면에서 상당히 특이한 면모들이 관찰된다. 마침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동시기 예술적 흐름과 '신여성'의 삶을 조명하는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과연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던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The Arrival of 'New Women'


The Arrival of 'New Women'
Magazine 'New Women' (19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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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전시회 정보포털 Art114Source : 한국잡지정보관

'신여성' 은 무엇인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신여성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 이라는 상당히 건조한 투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1920년대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여성 계층을 통틀어 정의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으나, 사실 이렇게 건조한 정의 이외에는 신여성의 존재를 달리 정의할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당시 고등교육을 받았던 여성들은 보통 1910년대에 교육을 받고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와 30년대, 40년대의 사회상이 모두 달랐다 보니 여성 그룹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사상이나 활동 양상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양상과 관련없이 최초의 '신여성'은 아직 전근대적 봉건주의가 지배하던 한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특히 신여성 계층이 최초로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한 1920년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소위 '문화통치' 시기였다. 당시 일본 제국은 한반도 강점 직후 한국인들의 반발을 무력으로만 억누르는 데 한계를 느끼고 이른바 조장된 자유주의를 통치에 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간 전근대적 질서를 떠받치는 '전통'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 역시 상당히 사회 각계각층에 팽배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때 일본 도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년대 신여성 트로이카' 라 할 수 있는 나혜석(1896~1948), 김원주(또는 김일엽, 1896~1971), 윤심덕(1897~1926)은 본격적인 자유주의 계열 신여성의 상징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당시 사회 풍토에서 신여성이 얼마나 충격적인 존재였는지는 아래의 문헌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26년부터 1934년까지 개벽사(開闢社)에서 발행한 잡지 '별건곤(別乾坤)'의 1930년 11월 통권 제 34호 내용의 일부분이다.

'새로운 傾向의 女人點景' 일부 : 요즈음 서울의 거리에 신여성의 내왕이 벗적 느럿다. 그 중에도 잇다금 양비단의 홀란한 색채와 紋儀로 시중의 주목을 밋글면서 압도적 『에로』를 放散하고 지나가는 정체모를 여인들 하고 거리에서 마조칠 수 잇는 영광이여! 정체를 모르는데 高雅한 맛이 잇거든 아모튼지 신앙은 무지에서 생긴다. 肉色굽 놉흔 구두. 삐스코-스 실크·스타킹. 두줄로 따어 느린 짤막한 뒷머리. 뒷통수에 밧작 올녀 딴 혹공딴 리본. 암사슴가치 깡충한 두 종아리. 젓가슴에 안은 커다란 핸두빽.

Magazine '별건곤' (1930.11)
나혜석, '저것이 무엇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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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신여성 계층은 자유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된 뒤, 1930년대 이후 일본 제국이 본격적인 전시 체제로 돌입하면서 나혜석으로 대표될 수 있는 급진주의 계열은 사라지고, 자유주의 계열을 중심으로 일본 식민 통치에 협력하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사회주의 계열은 은둔/잠적하거나 공권력에 의해 체포되어 자연 소멸되었다.

Art about New Women


김기창, '정청(靜聽)' (1934)
이유태, '탐구'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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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 MMCA소장: MMCA

당시 예술 작품 속에 나타난 여성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전근대적 여성' 과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 여성', 그리고 '근대적 여성'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위 두 그림 중 좌측의 '정청'은 운보 김기창의 작품으로써,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 13회 입선작이다. 이 작품에서 근대화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우선 좌측 가운데 부분 축음기다. 또한 모녀(母女)로 추정되는 인물이 앉아 있는 서양식 의자 역시 입식으로 대표되는 근대 문물의 유입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등장인물의 복식 역시 전통적인 한복과는 거리가 멀며, 특히 아이가 들고 있는 장난감 공이라던가 단발로 손질한 머리 등은 전형적인 근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한 여성들에게서 '근대 문물' 의 흔적은 찾아볼 수 있어도 '근대성' 을 찾기는 쉽지가 않다. 단순히 객체로서만 묘사된 탓이다.

반면 운보 김기창과 마찬가지로 역시 근대 한국화의 거목인 현초 이유태의 1944년 작 '탐구'를 보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인데, 현초 이유태 화백은 천원권 화폐의 퇴계 이황을 그린 분이시다.) 이 작품에서는 전근대적 여성미를 느끼게 할 수 있는 장치가 하나도 배치가 되어 있지 않다. 대신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 과학자가 각종 실험 도구를 앞에 놓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이는 현대의 대학 연구실의 모습이라고 해도 크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즉 이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과학 연구라는 활동을 통해 근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여성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이유태 화백의 다른 작품 '화음' 에서도 드러난다.

이유태, '화음' (1944)
나혜석, '자화상' (1928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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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 MMCA소장: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이렇듯 시각화된 '신여성' 은 당시 여성을 바라보았던 복잡한 관점을 그대로 반영하듯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당시 신여성 계층은 최초로 '자의식' 을 가졌던 여성으로 평가받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나혜석은 영화 같았던 삶의 궤적과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주의자로 평가받을 수 있는 사상,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까지 결합되어 마치 근대 신여성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지고 있다. 특히 나혜석은 본인이 정신여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등 본인 스스로가 예술가적 재능도 있었는데, 그렇다면 '신여성의 예술'은 과연 어떠했을까?

Art of New Women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 나혜석, 「이혼고백서」 (1934)

한국의 근현대미술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작가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나혜석 이외에도 박래현 화백과 천경자 화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분들은 또한 각자의 삶에서 한 가지씩의 사연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향 박래현 화백의 경우 운보 김기창 화백과 결혼하였는데, 제 5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할 정도의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인 운보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천경자 화백의 경우 한국 현대 미술 최악의 스캔들 '미인도 위작 사건' 에 휘말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들은 각자의 독창적 예술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한국 근현대 미술에 상당한 공헌을 하신 분들이다. 특히 이 분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분들 또한 당대의 '여성' 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을 상당히 많이 그려 내었기 때문이다. 특히 천경자 화백의 작품은 그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로 인해 현대에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박래현, '노점' (1956)
천경자, '막은 내리고'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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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 MMCA소장: 개인소장

박래현 화백의 경우 70년대 독창적인 현대화 화풍의 창시를 인정받아, 당시로써는 드문 일이었던 우표 및 전화카드(...)에도 등장하곤 했다. 요새야 예술 작품이 각종 생활용품과 컬래버래이션 되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그 때만 해도 우표는 주로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국가 단위의 성취 또는 권력자의 모습이 주로 등장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한 성취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혜석, 박래현, 천경자는 결국 궁극적으로 각자의 삶에서 나름대로의 차별과 불이익을 견뎌 내어야만 했다. 시대가 20세기에서 21세기로 점차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성평등의 실현이 아직도 요원했던 탓이다.

Where are our 'New Women'?


위에 언급된 나혜석의 '이혼선언문' 을 읽어 보시게 된다면, 현대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외치는 이야기가 백 년 전에도 완전히 동일했음에 경악을 금할 수 없으실 것이다. 그만큼 사회가 진보하고 경제는 발전해 왔지만 인류의 절반은 아직도 일상적인 폭력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렇게 강고했던 질서에 도전한 사람들의 말로는 결국 비참한 끝이었다. 나혜석은 3남 1녀를 낳았으나 이혼 후 자녀들을 거의 보지 못하고 말년에 자녀들을 보기 위해 요양원에서 탈출했다가 결국 길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보수주의적 신여성 계층은 결국 사회와 타협하여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끝에 1930년대 이후 친일로 전향했다.

결국 우리의 '신여성' 은 어디에 있는가? 사실 생각해 보면 이 신여성이라는 단어 자체도 그 당시의 질서에 항거하던 여성들을 단지 우리가 구분하기 편하게 타자화하기 위하여 만든 단어일지도 모른다. 물론 인문 사회의 연구에 구별짓기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언제쯤이면 여성들이 무엇인가로 구분지어지지 않고 하나의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그저 안타까움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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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보고 갑니다~ 팔로우 하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노점의 작가가
박래현이었군요
ㆍ신여성
글을 읽으며 제일 처음 떠오른 이미지는
토지에 등장했던
사회주의 여학생들이었습니다
이 짧지않은 글에 단 한 줄

탄압받고 검거되어 사라진

그들이죠
그 한줄이 의미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아픔이 얼 마나컸을지

대체로 여자들의 스토리는 감춰지는편이니
다른 신여성들의 종말도
대표적 신여성
나혜석과 다르지 않았을테죠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노래한
에디뜨 삐아쁘의 당당한 노래를 부리지 못한
우리 신여성들은

조선이 젤 원망스러웠을것같네요
너무 빨리핀 꽃 ㅠㅠ

팔로해요^----^

감사합니다.

신남성이라는 단어도 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제 블로그에 [작명법]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방문해 주세요~

여성도 사람이외다... 진하네요 정말. 나혜석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고 하더라도 같은 말을 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정신없이 바빠서 계속 미루다가 이제야 읽네요. 이런 분들이 계신 줄 몰랐는데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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