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이기고 있다고 해서, 그게 꼭 좋은 게임이라고 할 수 없다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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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때부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3년간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하지만 기억나는 건 손가락을 달걀 쥐듯이 오므리라는 것뿐. 체르니를 하나도 못 배웠다. 피아노 좀 배워보신 분들은 ‘얼마나 재능이 없길래 3년 동안 체르니 하나를 못 배웠지?’ 생각할 터다. 체르니는 보통 입문한 지 반년 안에 배우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따분했다. 나는 건반을 눌렀을 때 나오는 뻔한 소리보다 게임기 버튼을 때렸을 때 나는 찰진 소리가 더 좋았다. 그래서 종종 피아노 학원 가는 발걸음을 돌려 오락실로 향했다. 피아노 앞에서와는 다르게 게임기 앞에서 나는 신동이었다. 당시에 철권이라는 대전 격투 게임만 했는데, 7살쯤 아저씨들과 대전하면 4번 중 3번은 이길 정도였고 10살엔 동네에서 적수가 없었다.


1998년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보스까지 격파하는 중 누군가 도전을 해왔다. 1p와 2p 게임기가 등을 마주하는 배치였기 때문에 도전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내 얼굴을 봤다면 도전하지 않았을 텐데. 역시나 긴장감 없는 대전이 이어졌다. 화면 하단에 승수가 쌓였다. 그 숫자가 10이 됐을 때 동전 바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도전이 들어왔다. 상대방 캐릭터가 제자리에서 원투 잽만 날리고 있다. 뭐지? 격파했다. 또 도전한다. 똑같이 제자리에서 원투 잽만 날린다. 격파했다. 승수가 12가 됐다. 다시 도전이 들어온다. 이때부터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져주고 가야 하나? 애매하다. 너무 늦은 듯하다. 승수가 20이 됐다. 누군가 오락실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도전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락실은 2층에 있었다. 문을 나가면 왼쪽에 계단이 있었다. 문을 나서자마자 소리가 들린다. “야.” 계단에 걸터앉은 고등학생 형이 보였다. “따라와.”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간다. 조용히 따라갔다. 오락실 건물 맞은편에는 공사 중인 빌라가 있었다. 지하엔 빈 주차장이 있었고. 주차장이 차 대신 고등학생 형의 고함과 짝짝 살이 맞닿는 소리, 내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2015년, 주차장에서 울던 아이는 은행원이 됐다. 4주 동안 신입사원 연수를 받고, 배정된 부서로 가 다시 3주의 OJT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교육 담당 차장님께서 말씀하셨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여기선 먼저 들어오면 선배야. 너네보다 직급 낮다고 말 놓으면 안 돼.” 우리는 대졸 공채로, 고졸 공채나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람들보다 한 직급이 높았다. 그래도 먼저 들어오면 당연히 선배 아닌가 생각했다. 다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우리 동기 중 한 명이 지점에서 직급이 낮은 선배 직원에게 말을 놓는 일이 발생했다. 지점은 물론이고, 동기 단체카톡방이 난리가 났다. 선배한테 어떻게 그러냐고 했다.

언젠가 사원급 직급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더더욱 난리가 났다. 어떻게 대졸과 고졸을 똑같이 대우할 수가 있냐고 했다. 어떻게 계약직 출신과 공채 출신을 똑같이 대우할 수가 있냐고 했다. 대졸 공채 출신 직원들은 분개했고, 다른 이들은 조용히 기대했다. 반발이 너무 거셌기 때문일까? 결국, 제도는 변하지 않았다. 실망한 표정과 당연하다는 표정이 대비됐다.


2016년, 금융권 성과연봉제 도입에 대한 반대로 총파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연일 파업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고 기사가 나왔다. 금융노조가 성과연봉제를 반대했던 이유는 저성과자 해고 조항에 있었다. 회사가 저성과자를 지정하고 해고할 수 있게 되면 누구든 해고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회사가 인사권을 꽉 쥐고 있으면 노사 간 힘의 균형이 무너져 노조는 와해 되고 결국엔 회사의 횡포로 이어질 수 있다. 파업은 저성과자 해고 조항을 뺀 성과연봉제를 의논하자는 취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금융권 연봉에 대한 기사가 자주 보였다. 사람들은 평균 1억에 달하는 연봉을 보며 분개했다. 나는 뼈 빠지게 일해서 2천 받는데, 쟤네는 시원한데 앉아 돈이나 세면서 뭐 저리 많이 받냐고 했다. 금융권 연봉 기사는 비금융권 종사자의 허탈함을 토로하는 장이 됐다. 그리고 어느덧 총파업 기사는 금융권과 비금융권 종사자의 토론장이 됐다. 서로 비난하며 헐뜯었다. 나라에 큰 사건이 터지며 성과연봉제는 흐지부지됐지만, 상처는 그대로 남았다.


나는 금융권 대졸 공채 정규직이었다. 비금융권, 고졸 공채, 비정규직의 부러움을 받았다. 취업 게임에서 이기고 있었다. 그 승리를 만끽하며 한껏 취해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딘가 찝찝했다. 오락실에서 12연승을 했을 때처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결국 게임을 멈추고 오락실에서 나왔다. 문을 열기 두려웠지만, 예전처럼 계단에서 나를 기다리는 무서운 형은 없었다. 그 형은 아직 게임 중이다. 게임기 앞에서 열심히 레버를 돌리고, 버튼을 두드리고 있다. 이기기 위해서. 하지만 의문이 든다. 도대체 누구를 이기고, 누구한테 지는 걸까? 문득, 돈을 바꿔주며 미소짓던 오락실 사장님이 떠오른다.


진짜 이기는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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