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가을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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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에 일어나 산책으로 시작하던 하루는 없다. 30℃가 넘는 해가 쨍쨍한 날씨에 호수 변을 두어 바퀴 돌고 나면 열이 찬 발엔 물집이 생기고 팔은 벌겋게 달아올라 따끔거렸다. 도저히 나갈 엄두가 안 났다. 이런 날씨에 힘들게 운동하면 오히려 건강에 안 좋지 않을까? 햇빛으로 인한 피부병도 있다는데. 이런 더위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해가 지기 전까지 밖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나는 오프라인에서 해야 할 일이 없으니까. 모든 일은 집에서 할 수 있어. 충분해. 이런 게 디지털 노마드의 특권 아니겠어? 하루를 시작하며 눈에 담는 풍경은 호수 대신 스마트폰 화면으로 바뀌었다. 나무들이 내뿜는 뜨거운 숨결 대신 에어컨이 내뿜는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아침 운동 후 온몸에 방울진 피로함을 씻어내기 위해 하던 샤워는 해 질 녘 번들거리는 게으름을 씻어내기 위해 했다. 모든 기운을 쏟아내고 일찌감치 마감되던 하루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질척거려 늦은 새벽까지 말똥말똥 이어졌다.


그날도 집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널브러져 있었다. 이불을 덮고 추위를 느끼며 이런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뒹굴뒹굴하다 시계를 봤다. 11시다. 벌써 잘 시간이다. 다이어트를 시작하고서 나는 하루를 기록으로 마무리한다. 몸무게를 쟀다. 그리고 달력에 운동량, 먹은 것, 몸무게를 적었다. 조금씩 줄어가던 몸무게가 8일간 그대로다. 운동을 안 했으니 당연한 결과긴 한데, 신경 쓰인다. 욕심 많은 마음이 당연하지 않다고 한다. 행복에 조그마한 금이 생긴다. 문득 안 좋은 예감이 스친다. 가방을 뒤져 노트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기록 날짜 7월 14일. 집에 박혀있던 기간과 기록이 멈춘 기간이 똑같다. 나의 성장과 생각의 기록이 멈춰있었다. 사라진 8일의 기록. 그것은 망치가 되어 금이 간 행복을 때려 부쉈다. 깨어져 조각조각 파편만 남은 행복은 괴로움이 되었다.


다음 날 6시에 집을 나섰다. 해의 힘이 너무 강해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피하기보단, 해가 약한 시간을 공략하기로 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꽤 후덥지근하다. 땀이 줄줄 흐른다. 하지만 뜨거워서 살이 벌겋게 익는 정도는 아니다. 견딜 만하다. 10분을 걸어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다시 5분을 걸었다. 교통카드를 찍기 전까지 시원한 바람에 땀이 식다가 교통카드를 찍은 후부터 다시 땀이 나기 시작한다. 이미 잡은 물고기라 편의를 봐주지 않는 건가? 더위를 견디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면 지하철이 온다. 문이 열리며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에 불만은 가시고 기분 좋은 만족감만 남는다. 불만 가득한 고객을 팬으로 만드는 건 분명 이런 강약조절에 있을 터다. 문이 닫힌다.


가만히 서서 시원함을 만끽하다 보면 지하철이 말을 건다. 2분에 한 번씩 후덥지근하게. 어서 세상으로 가. 문이 열린다. 아직이다. 나는 이제 막 들어왔는걸. 조금만 기다려줘. 다시, 문이 열린다. 보아하니 포기하지 않을 눈치다. 마음의 준비를 한다. 세 번째 문이 열린다. 준비는 끝났다. 행동만 남았다. 고마워. 덕분에 행복했어.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해가 지배하는 뜨거운 세상으로 간다.


역에서 다시 10분을 걸으면 작업실이 나온다. 단잠에 빠진 작업실을 깨우고 커피를 한잔 뽑는다. 에어컨을 켜고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한다. 그것을 글로 옮기고 있으면 하나둘 사람들이 온다. 날이 너무 덥다는 얘기, 간밤에 가위눌린 얘기, 맛집 얘기, 책 얘기. 점심 먹고 짧게 산책도 하고, 더우면 시원한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기도 한다. 사는 건 변하지 않는다. 35년 만의 기록적인 폭염도 스쳐 지나가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 여름은 피하는 게 아니라 분명 이렇게 견뎌내는 것일 거다. 가을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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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여름이 더워진건지 내가 더위를 도 타게된건지 헷갈려요 요즘

진짜 더워지기도 했고, 에어컨에 적응하다보니 더위를 더 타게된 것도 맞다고 봐요. 정말 너무 덥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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