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감탄이 부족한 게 아닐까?

in #kr6 years ago

갈색배경 글쓰는해달.jpg


Question Diary.

2018년 9월 15일. 똑같은 하루일 뿐인데. 토요일이란 이름이 붙으면 왜인지 땅에서 등을 떼기 힘들다. 이제 월요일이건 금요일이건 토요일이건 구분할 필요 없는 삶이건만, 고정된 틀 안에서 생각하던 습관은 여전히 나를 틀 안에서 머무르게 한다. 어린 코끼리의 한쪽 발을 묶어 말뚝에 고정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말뚝 근처를 못 벗어난다더니 딱 그 꼴이다.

7시에 완전히 잠에서 깼지만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가 대신 일어나서 활동해줬으면. 분신술 있었으면 좋겠다. 나중엔 기술로 분신 만들 수 있겠지? 그럼 인공지능으로 만든 분신이 먼저 나올까, 줄기세포로 만든 분신이 먼저 나올까? 아, 줄기세포로 만들면 분신이 아니라 복제 인간인가? 하지만 그때쯤엔 인공지능도 사람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슨 기준으로 구분해야 하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아쉬운 대로 스마트폰을 일으켰다.

멍하니 누워서 쓸모없는 정보를 욱여넣다 보니 9시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시간은 참 신기한 게 낭비할 때 더 빨리 흐르는 것 같다. 빨리 흐르니까 낭비한다고 하는 건가.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노트북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집에 있으면 축 처지기만 할 뿐. 더 챙길 거 있나 살펴보는데 웹캠이 눈에 들어왔다. 2016년에 유튜브 운영할 거라고 샀던 제품. 활발히 활동할 줄 알았지만, 어느새 두껍게 하얀 이불이 덮인 모습을 보니 안쓰럽다. 조만간 깨워줄게. 아직은 많이 부족해서. 준비 좀 더 하고. 조금만 더 기다려줘. 조금만.

퇴사가 얼마 남지 않았던 4월 언젠가, 처음으로 그분을 만났다. 회사원 말고 사업가의 길이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 책에서만 봤던 사람을 실제로 본다는 생각에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반갑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요?”
“네, 반갑습니다. 15년도에 대표님 책을 보고 이런 길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덮어두고 있었어요. 살기 바빠서요. 그런데 한 2년 뒤에 다시 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뭐랄까, 확신이 생겼습니다. 여기 오기까지 4년 걸렸네요.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신가요. 잘 오셨습니다.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다 오셨나요?”
“은행에서 IT 업무 하다 왔습니다.”

이것저것 얘기하다 내가 개발자라는 걸 알고 대표님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카페에 가서 따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개발자가 없어서 진행하지 못했던 사업들을 열거하면서 같이 해보자고 제안하시는데, 거 참. 난감했다. 개발에 자신이 없었으니까. 은행에서 업무 수행하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은행은 개발보단 관리가 주다. 생각해보겠다 말씀드리고 돌아왔다. 그 뒤로 대표님을 만날 때면 같은 일이 반복됐다. 제안하고, 거절하는.

비슷한 일은 얼마 전 7월에도 있었다. 책을 쓰고 싶어 찾아간 곳. 사업가이자 기획자이신 지금의 기획자님을 만나 면담을 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주제였다. 기획자님은 질문하고 나는 답했다. 약 2시간의 문답이 끝나고 기획자님은 어쩐지 개운한 표정이었다.

“저는 지금 딱 보이는데요. 어떤 걸 써야 할지. 비트코인 투자하고 결국 실패하셨잖아요. 요즘 블록체인이니 비트코인이니 책 보면 다 투자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맞나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겁니다. 이거는 작가님이 실패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이야기에요. 물론 작가님이 쓰고 싶지 않으면 안 쓰셔도 됩니다. 다시 고민하면 되죠.”

그 자리에선 쓰겠다고 했지만, 며칠 후 들고 간 건 에세이였다. 회사에서 맡았던 업무에 관해 쓰는 것도 껄끄러웠고, 전문가도 아니었으니까. 좀 껄끄러웠다. 에세이를 받아본 기획자님은 별다른 말을 안 하셨다. 간간이 지나가는 투로 작업은 잘 되냐고 묻기만 했다.

자신이 없었다. 능력은 부족하고, 경험도 없고. 부족한 능력을 기르고 새로운 경험하기 위해서 도전한 거였는데 지금 가진 걸 활용하기만 된다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당신들처럼 치열하게 살지 않았어요. 그냥 욕 안 먹고 눈에 안 띌 정도로 조용하게 살아왔는데 어떻게 그게 되겠습니까.

그랬었다. 분명 그런 생각이었는데. 우연히 블록체인 강의를 요청받아 10명 정도 소수 인원 앞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소수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대표님들이 앉아있어 내심 긴장했다. 하지만 강의 시작부터 이것저것 질문하는 것을 보고 블록체인이 생각보다 잘 안 알려진 기술이구나 싶었다. 조금 자신이 생겼다. 이러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또 한번은 대학 다니면서 사업 시작해 이제는 꽤 괜찮은 수익을 내는 대표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못 했을 일이고 대단히 부럽다 말씀드리니, 오히려 취업할 자신이 없어서 피한 거라고 직장생활 경험이 부럽다 하셨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했던가? 이 말은 어쩌면 남의 떡은 있는 그대로 보고 내 떡을 작게 본다는 뜻이 아닐까? 회사 밖으로 나와 사업한다고, 책 쓴다고 돌아다니다 보니 다양한 직군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똑바로 읽는 것밖에 못 한다고, 디자이너가 할 줄 아는 게 간단한 그림 그리기밖에 없다고, 가수가 그나마 할 줄 아는 건 보컬 레슨 정도라고, 그들 모두 자신의 능력이 책으로 나올 수 있을까 걱정할 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감탄이 부족하다는 것을.

여전히 내 능력에 자신이 생긴다고 할 순 없지만, 존중하려고 한다. 욕 안 먹고 살기도 쉽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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