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관리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으로만 해야하는 것일까?
템코 "2020년까지 비트코인 기반 공급망 관리 시스템 선보일 것"
by 정인선 기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6월 ‘블록체인 기술 발전전략’을 발표하고 이에 따라 블록체인 기반 공공 분야 6대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축산물 이력 관리▲개인 통관 ▲간편 부동산 거래 ▲온라인 투표 ▲국가간 전자문서 유통 ▲해운물류 등 6대 시범사업 모두 토큰이 필요 없는 프라이빗 블록체인 기반 사업들이다. 서울시와 제주특별자치도 등 지자체들이 도입을 검토중인 블록체인 관련 사업들 역시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활용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업은 어떨까. 대기업은 블록체인 기술의 ‘탈중앙화’ 키워드를 매력적으로 여길 이유가 크지 않다. 하지만 새 기술이 가져다 줄 새로운 먹거리를 놓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대기업들은 허가를 받은 사람만 노드를 구성할 수 있는 프라이빗 블록체인 개발에 적극적이다.
세계적인 IT 기업 IBM과 해운 기업 머스크(Maersk)는 총 94개 기업과 합작해 블록체인 기반 글로벌 물류 플랫폼 ‘트레이드렌즈(TradeLens)‘를 개발했다. 월마트는 중국산 돼지고기 품질 확인에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 중이다. 내년 9월부터는 IBM과 함께 개발한 푸드트러스트(Food Trust) 네트워크를 통해 푸른 잎 줄기채소의 생산 유통 과정을 추적할 계획이다.
국내 대기업 가운데는 삼성SDS가 기업용 블록체인 플랫폼 넥스레저(Nexledger)를 개발해 금융∙제조∙공공 분야에 적용했다. SK C&C 역시 국내외 선사들을 위한 블록체인 물류 서비스와 블록체인 투표 시스템 등 서비스 플랫폼을 개발했다.
정부와 대기업의 블록체인 기술 적용 사례를 보면 유독 공급망 관리(SCM, Supply Chain Management) 효율화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공급망 관리란 기업이 제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전 과정의 데이터를 하나의 ‘망’으로 묶어 관리하는 시스템을 뜻한다. 원자재 수급과 1차 생산, 2차, 3차 생산, 그리고 소비가 제각기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품목일수록 공급망 관리가 중요하다. 선박이 대표적 예다.
잘 만든 공급망 관리 시스템은 기업이 미래를 내다보는 데에 유용하다. 생산 및 유통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핵심 근거로 쓰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오답노트를 잘 만든 학생이 다음 시험을 잘 보는 것과 비슷하다. 기업들은 공급망 관리 시스템이 모아 준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재고 관리뿐 아니라 앞으로의 생산과 유통, 마케팅 전략 등을 새로 짤 수 있다.
하지만 공급망 관리 시스템을 꼭 프라이빗 블록체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걸까? 김승주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지난달 열린 2018년 기술영향평가 공개 토론회에서 “기업들은 허가형(프라이빗) 블록체인을 많이 이야기 하지만, 허가형 블록체인이 과연 대체불가능한 기술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허가형 블록체인을 쓰는 순간 블록체인이 갖는 투명성과 가용성이 사라진다. 예를 들어 기존에 병원의 중앙 서버에 저장하던 의료 정보를 투명하게 분산 저장하기 위해 블록체인을 쓰는데, 퍼블릭이 아닌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쓰면 다시 정보의 통제권이 병원에게로 넘어간다”고 말했다.
공급망 관리를 퍼블릭 블록체인으로 한다면
국내 블록체인 스타트업 가운데 프라이빗 블록체인 대신 퍼블릭 블록체인을 활용해 SCM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기업이 있다. 올해 1월 문을 연 ‘템코(TEMCO)’가 그 주인공이다.
템코는 퍼블릭 블록체인 중에서도 ‘스마트 계약’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더리움이 아닌 비트코인, 더 정확히는 비트코인의 사이드체인을 활용한다. 템코가 활용하는 비트코인 사이드체인은 아르헨티나 소재 기업 ‘루트스탁’이 개발한 비트코인 기반 스마트 계약 플랫폼 RSK다. RSK는 한 종류의 암호화폐를 채굴할 때 다른 종류의 암호화폐도 동시에 채굴하는 ‘병합 채굴(merge mining)’ 기술 덕분에 기존 비트코인 네트워크에 큰 부담을 주지 않고서도 사이드체인에 데이터를 올릴 수 있다. 동시에 비트코인 블록체인의 안정성은 그대로 누린다.
템코가 비트코인의 사이드체인을 활용해 SCM 개발에 나선 배경에는 윤재섭 공동창업자 겸 대표의 이력이 있다. 윤 대표는 미국에서 경제・경영학과 회계학을 공부했다. 애초 화폐 시스템에 관심이 많았다. 2010년, 미국의 개발자 라스즐로 해이녜츠가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사 먹은 이야기를 듣고충격을 받았다. 기존 화폐의 대안으로서 암호화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전자상거래 사이트 이베이(eBay)에서 에이식(ASIC) 채굴기를 주문해 직접 채굴도 해 봤다.
비트코인에 이어 등장한 이더리움은 암호화폐에 대한 윤 대표의 관심에 불을 붙였다. ‘아, 이제 블록체인 기술을 갖고 어플리케이션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왔구나!’ 생각했다.'
윤재섭 템코 대표. 사진=템코 제공
‘댑을 만들 수 있구나’가 ‘직접 댑을 만들어야겠다’로 구체화 된 데엔 대학원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에서의 경험 영향이 컸다. 이더리움이 등장한 2015년 당시 윤 대표는 포스코 국제금융팀 외환 딜러로 일하고 있었다. 철광석, 석탄 등 원재료를 수입해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고, 보관하고, 운송해 고객사에게 납품하는 모든 과정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당시 포스코는 약 30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이 전체 과정을 연결하는 SCM ‘포스피아 3.0’을 도입했다. 글로벌 기업 오라클의 기술이 포스피아 3.0에 쓰였다. 윤 씨는 새 SCM 도입 프로젝트팀에 투입됐다. ‘포스피아 3.0’이 도입되자 엄청난 업무 효율화가 이뤄졌다. 예전 같으면 찾는 데 한 달씩 걸리던 데이터를 이틀 만에 찾을 수 있게 됐다. 원가 분석도 쉬워졌다.
윤 대표의 블록체인에 대한 관심과 ‘잘 만든 SCM’이 가져다 준 긍정적 경험이 맞물렸다.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SCM을 블록체인 위에 올리면 어떨까?’
원자재 수급부터 최종 유통 단계까지 데이터가 위조되거나 변조되지 않은 채 연결돼야 한다는 점에서 SCM과 블록체인 기술의 접점이 크다고 생각했다. 스마트컨트랙트를 활용해 제3자의 개입 없이도 투명하게 생산 및 유통 이력을 추적할 수 있다면, 생산자-공급자-소비자 간 유통 정보의 신뢰성을 적은 비용만 들이고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템코가 말하는 블록체인 기반 SCM의 장점에는 구체적으로 이런 것들이 있다.
- 사용자 간의 높은 연결성: 단절된 서플라이 체인을 하나로 연결해 모든 물류 정보가 모든 참여자에게 공유할 수 있다.
- 물류 정보의 신뢰성: 각 단계의 참여자가 다양한 인증 및 검증 절차를 거친 뒤에만 블록체인에 데이터를 기록할 수 있게 해, 블록체인에 기록된 정보와 실제 상품이 일치하지 않는 ‘오라클 문제’를 방지한다.
- 물류 정보의 투명성 및 안정성: 블록체인에 저장되는 데이터가 모든 사용자들게 완전하게 분산되고 공유되며, 탈중앙화 시스템으로 누구든 검증 가능한 투명한 데이터로 재탄생한다.
- 높은 효율성: 개방형 플랫폼을 기업들에게 제공해 블록체인 내 데이터를 기업들이 활용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대기업만 누리던 기술의 이점 중소기업에게도 나눈다
올초, 직장에 사표를 내고 창업에 나섰다. 그런데 앞서 SCM에 블록체인을 접목한 다른 기업들처럼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쓰는 대신 퍼블릭 블록체인을 쓴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돈 문제가 컸다. 윤 씨가 보기에 포스코와 같은 대기업들은 큰 예산을 들여 시스템을 개발할 여럭과 의지가 있었다. 반면 중소기업들은 ‘잘 만든’ SCM의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설령 느낀다고 해도 약 20~30억 원에 이르는 초기 개발 비용을 부담스러워 했다. 윤 대표는 “퍼블릭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데이터 검증 비용만 지불하고도 제품 공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양질의 유통 관련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블록체인의 스마트 계약으로 제품의 제조 단계부터 최종 소비자 구매 단계까지 데이터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연결할 수 있다. 이미지=템코 제공
“프라이빗 블록체인은 결국 해당 기업들만을 위한 솔루션이다. 나중에는 서버 비용 등 투자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프라이빗 블록체인은 개발 비용을 들일 수 있는 곳에서만 한다. 퍼블릭 블록체인으로 SCM을 개발하면 개별 기업에 최적화된 시스템을 구현하긴 어려워도,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범용성 있는 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다고 봤다. 기존에 한 곳(대기업)에서 누리던 블록체인 기술의 이점을 전체로 분산할 수 있다. 또 소비자들은 투명하고 믿을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안심하고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프라이빗 블록체인과 달리 데이터가 특정 기업에 집중될 우려가 없다는 점도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 SCM의 장점이다. “공공 데이터라면 몰라도 경쟁사가 구축한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기업의 물류 정보를 올리는 데에는 부담이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게 윤 대표 설명이다. IBM과 머스크가 공동 개발한 ‘트레이드 렌즈’도 머스크의 경쟁 선사들이 참여를 꺼려 난항을 겪고 있다.
그런데 허가 받은 참여자만 노드를 구성하는 프라이빗 블록체인도 꺼려 하는 기업들이 과연 퍼블릭 블록체인에 데이터를 올리려 할까? 데이터 프라이버시 문제가 퍼블릭 블록체인에선 더 크지 않을까? 윤 대표는 “제품 원가와 같은 민감 정보는 각 기업의 자체 서버에 저장한 뒤, 이를 암호화한 해시값만 태그로 달아 퍼블릭 블록체인으로 연결하면 된다”고 말했다. 온체인과 오프체인을 적절히 혼용해 각 기업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는 이야기다.
블록체인 기반 공급망 관리 시스템이 가져올 변화
블록체인 기반 SCM이 사물인터넷(IoT)과 만나면 활용 범위가 더 커진다. 윤 대표는 의약품과 같이 운송 및 보관시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품목을 예로 들었다. 실시간으로 온도를 체크하는 IoT 기기를 배송 차량, 보관 창고 등에 설치해 두고 기기가 측정하는 온도를 블록체인에 기록한다. 제품이 최종 소비자에게 도달할 때까지 미리 정해진 온도 구간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블록체인의 스마트 계약에 의해 대금을 자동 지급한다. 행여 중도에 실수가 발생하면, 어느 단계에서 구멍이 났는지 금세 파악할 수 있다. 운송 및 보관 단계별 조건이 충족됐는지 사후에 일일이 체크할 필요가 없어 일손도 크게 줄고, 이에 따라 대금 지급 기간도 단축할 수 있다.
템코는 오는 2020년까지 RSK 기반 SCM 개발을 마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템코가 개발 중인 SCM을 활용하면 기업들은 월 20만원에서 30만원을 지불하고 공급망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올릴 수 있게 된다. 템코는 SCM 구축뿐 아니라 비즈니스 인텔리전스(BI) 툴 개발에도 공을 들이는 중이다. 생산-유통 각 단계의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올려 연결하고 투명하게 관리해도 마지막 단에서 숫자를 해석하지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미 월가에서 10년여 동안 비즈니스 인텔리전스(BI) 툴을 개발한 개발자 출신 이근일 CTO가 서비스 기획 초기 단계에서 BI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명품 거래 리뷰 남기면 토큰으로 보상
템코 사업 모델의 한 축이 중소기업을 위한 SCM이라면, 또다른 한 축은 블록체인 기반 명품 거래 플랫폼이다. 템코는 빠르면 내년 상반기 블록체인 기반 명품 거래 플랫폼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명품 거래 플랫폼을 블록체인 위에 올리는 것 역시 윤재섭 대표의 경험에서 나온 사업 아이디어였다. 윤 대표는 미국 유학 시절 명품 거래 플랫폼 ‘필웨이’ 판매자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재학 중이던 학교 인근에 큰 아울렛 매장이 있었다. 여기서 물건을 사다가 국내 소비자들에게 판매해 용돈벌이를 했다.
“명품 거래 플랫폼에서는 크게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중간에 제품이 (위조품과) ‘바꿔치기’되면 안 되고, 둘째, 리뷰 등을 통해 판매자의 신뢰를 보증하는 구매자 커뮤니티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두 지점이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기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SCM에서와 마찬가지로 유통 과정의 각 참여자가 까다로운 검증을 거친 후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기록하면, 명품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이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또 다른 소비자의 구매를 돕는 리뷰를 남겨 커뮤니티에 기여한 참여자에게는 토큰으로 보상할 수 있어,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기존 플랫폼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는 게 템코 측 설명이다.
템코 토큰 활용 사례. 이미지=템코 제공
퍼블릭 블록체인과 프라이빗 블록체인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토큰 판매 여부다. 템코 토큰은 일반 퍼블릭 블록체인에서 발행하는 토큰과 마찬가지로 거래소에 상장해 사고 팔 수 있다. 또 SCM 및 명품 거래 플랫폼 이용 수수료 지불과 소비자 보상에도 템코 토큰이 사용된다. 템코는 오는 24일 메인 토큰 세일을 앞두고 있다.
템코는 지난 10월 국내 최대 벤처캐피탈 중 하나인 한국투자파트너스로부터 10억여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한국투자파트너스의 첫 블록체인 관련 기업 투자다. 템코는 이달 초 글로벌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네로부터도 전략적 투자를 유치했다. 써니 공 코인베네 COO는 “사일로 형태의 기존 공급망 시스템의 문제점을 혁신하는 글로벌 프로젝트 템코의 기술력과 잠재가치를 인정하고 블록체인의 빠른 상용화를 통한 사회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투자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템코는 앞서 지난 10월에도 국내 암호화폐 벤처캐피탈 겸 엑셀러레이터 파운데이션엑스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투자를 유치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