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여행기 - 1편

in #kr5 years ago (edited)

들어가며

대만을 여행하게 된 것은 어쩌면 상당히 즉흥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어렵게 마련한 교육이 무산 되면서 2주간의 시간이 휴가로 바뀌게 되자 그 동안 휴가도 변변히 못 내던 차라 이틈에 재충전을 위해 여행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방학기간도 아니어서 가족이 다 함께 참여할 수는 없었고, 아내는 백화점 일을 하고 있어서 일정 잡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혼자 제주도 올레길을 갈까 마음을 잡고 있는데 아내도 백화점에서 어렵게 짬을 내어 기꺼이 동참하겠다고 해서 주말을 이용하여 일본온천을 가려 했으나, 비수기인지 여행상품마다 예약은 가능하지만 출발이 확정되지 않아 상품자체가 무산되어 버렸다. 그러다 딸애가 1년간 교환학생으로 유학간 대만을 가보자는 아내의 제의에 6월중순이면 방학해서 올 건데 뭐 하러 가느냐고 했으나, 이때 아니면 대만을 언제 가볼까 싶어 내친김에 여행사에 알아보니 마침 3일후에 출발하는 상품이 있단다. 가격도 저렴했고 아내에게 물어보니 무조건 콜이란다.

기후도 비슷한 여름철에다 3박4일이라 짐도 그렇게 많지 않아 짐 챙기기에는 별로 부담이 없었다. 그렇게 예약을 하고 환전도하고 와이파이 데이터 기기도 임대하며, 트래킹 슈즈도 이 참에 하나 튼튼한 것으로 구입하고 나니 얼추 준비가 다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3일이 지나 아내와 나는 대만으로 출발했다.

출발, 첫째날

떠나는 날 새벽 2시반에 비몽사몽간인 몸을 일으켜 세워 어제 준비한 가방을 챙기고 미리 연락한 콜밴에 몸을 싣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맘에 걸리는 건 고등학생인 아들놈이 제때 학교에 갈 수 있는 지와, 밥은 혼자 제대로 차려 먹을 수 있을 지가 계속 부담이었고, 강아지에게도 밥 챙겨주는 것과 변 청소하는 것 등이 걸렸으나, 모든 것을 신경 쓰다가는 여행을 갈 수 없을 것이 분명해서 우린 애써 무시하며 모든 게 잘 될 것으로 믿고 그렇게 출발했다.

공항에는 5시가 덜 돼서 도착했고, 3층 7번 근처 여행사 부스에서 간단한 일정표와 안내를 받고 여행사에 짐을 부치기 시작했다. 5시는 아무래도 이른 시간이어서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줄 서 있는 짧은 시간 동안 공황에는 떠나려는 사람들로 서서히 붐비기 시작했다.

환전한 돈을 은행에서 찾고 와이파이 데이터 기기도 찾아서 우리는 출국심사를 거쳐 면세점을 둘러 보러 다녔다. 그 동안 아내는 면세점 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이 참에 잘되었다 싶어 작은 숄더백을 구입했다. 그 동안 갖고 싶었는데 이 상품 저 상품 비교하더니 맘에 드는 걸로 장만하고 아주 만족해 했다.

7시20분 우리는 지정된 좌석을 찾아 창문가에 앉았다. 그리고 7시50분 비행기는 정해진 시간에 이륙했고 내 옆자리는 비어서 좀 더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이윽고 기내식 아침이 나왔는데 삼각김밥에 빵 하나가 나왔다. 지난번 유럽 여행때 터키항공에서 제공한 음식보다는 차라리 진에어에서 제공한 김밥이 먹기가 오히려 나았다. 그리고 잠깐 눈을 붙였을까 싶었는데 2시간 반 만에 대만 도원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대만에 가기 전 우리가 걱정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날씨였다. 가는 날 목요일을 제외하고는 계속 비가 오는 예보에 우리는 적이 고민했다. 비를 계속 맞으며 여행을 할 것인가? 아니면 취소할 것인가? 그러나 대만의 날씨는 전형적인 동남아 날씨처럼 스콜이 많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비가 왔다가 그치고, 또 비가 왔다를 반복하는. .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장마철에 접어 들었다는 사실에 낙담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도착 후 출국 심사를 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렸다. 출국 하려는 사람은 많은데 검수하는 인원은 적었고, 행동 또한 굼 뜨는 것이 영 맘에 안 들었다. 그렇게 심사가 끝나고 나오자 우리를 기다리는 가이드의 푯말이 보였다. “모두투어 강효국”

현지 가이드 강효국씨는 인상이 고약하게 보였는데, 눈썹이 치켜 올라가서 아주 화가 난 심술궂은 영감님처럼 생겼다. 연령은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으로 보였고 키는 훤칠했으며 인천 화교 출신으로 대만에 온지 30년 되었다고 했다. 이번 여행에 총 일행은 19명으로 단체손님이 9명이고 개인이 10명으로 구성되었다. 5월말 6월초 여행이라 아직은 휴가기간도 아니어서 대부분 아주머니들이었고 학생은 없었으며, 남자는 나를 포함해서 3명이었다.

버스는 2층버스로 기사는 1층에 있었고 각종 화물칸 또한 1층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온 가방은 기사가 직접 받아서 차곡차곡 정렬 시켰다. 대만 기사는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앞니가 약간 벌어졌으며 웃는 얼굴이 아주 개구쟁이 처럼 친근했다. 버스에 오르자 습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자극했는데 에어컨 관리가 제대로 안된 것 같아서 이후 여행하는 내내 약간 신경 쓰이게 했다. 45인승 버스여서 아내와 나는 앞쪽 좌석에 각각 자리를 하나씩 차지해서 넓고 편안하게 여행하기로 했다. 이윽고 가이드는 움직이는 버스에서 능숙하게 여행일정에 대해 말하며 어제까지 비가 많이 와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오늘은 그쳐서 아주 다행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대만의 역사 등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날씨가 따뜻해서 벼가 3모작이라 식당에서 밥에 대한 인심이 좋다는 말이 귀에 꽂혔다. 그러고 보니 차창 밖으로 풍경이 모두 짙은 녹색이었다. 사시사철 푸르른 대만이었다.

첫날 첫 여행지는 타이베이 중심에 위치한 용산사 였다. 시원한 버스에서 내리자 덥고 습한 열기가 엄습해서 숨이 탁 멎을 지경이었다. 다시 버스에 오르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시내의 대낮 온도가 30도 즈음이었는데 대만이 많이 습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햇볕을 피해 그늘로 이동해서 용산사로 들어갔다.

용산사는 약300년전인 1738년 청나라 시절 푸젠성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중간에 소실되어 현재의 건물은 1957년에 다시 지어졌단다. 돌기둥에는 용이 많이 그려져 있으며, 지붕에는 더 많은 용들이 마치 날아오를 듯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절은 전형적인 타이완의 사찰로 불교만 있는 것이 아닌 도교, 토속신고 같이 모셔져 각 종교의 색채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다. 대만사람들이 좋아하는 붉은색 외관에 처마는 아주 날렵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절은 아담하고 작았다. 우리나라의 절이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것에 비해 시내 중심에 위치해 절 같은 느낌이 작게 들었지만 타이배이 시민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용산사를 찾아와 그들의 소원을 비는 아주 신성한 곳이라고 했다.

짙은 향냄새가 입구에서부터 진동을 했고, 사람들은 소원을 빌 때 가져온 음식을 테이블 위해 올려 정성스럽게 올려 놓았다. 아내와 나는 경내를 한 바퀴 돌면서 소원하는 모든 일을 빌고 또 빌었다.

대만에서 먹는 첫 점심은 현지식으로 식당은 널찍했다. 넓은 원형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돌리면서 조금씩 덜어서 먹는데 모든 음식이 맵고 짜지 않고 다소 밍밍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더운 날씨에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나면 몸에서 더 열이 나서 생활하기에 불편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음식은 싱겁고 간이 덜 들어갔다고 한다. 갑자기 집에서 먹던 고추장과 김치가 그리워졌다.


두번째 들린 곳은 대만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세계 4대 박물관으로 인정 받고 있는 국립고궁 박물관이었다. 70여만 점에 이르는 중국 최고, 최대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나 전시시설의 한계로 인해 한번에 15,000점밖에는 보여주지 못한다고 한다. 유물은 3개월에 한번씩 교체 전시되며, 1년에 모두 6만점 정도가 전시된단다. 소장품 전체를 다 전시하려면 최소한 12년이 걸리고, 전시품은 역대 중국 황제들이 개인 소장품이 주류를 이루는데, 대부분 옥, 금, 칠기, 자기 등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한자문화를 알 수 있는 많은 책과 서화 등도 있었다.

이 박물관의 유물들은 중국의 역사와 함께 기구한 운명을 겪는데, 1925년 북경 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들은 1933년부터 잇달아 일어난 만주사변과 청일전쟁으로 대륙의 남방으로 옮겨졌는데, 처음에는 상해로 옮겼다가, 나중에 귀주 안순(安順), 사천 낙산(樂山)ㆍ아미(峨眉) 등 여러 곳으로 옮겨 보관했단다. 1946년에는 여러 지역에 분산 보관했던 문물을 다시 남경으로 모았고, 이듬해에 고궁박물원 남경분원(南京分院)이 개설되어 다시 문물을 전시하며 잠시 안정을 취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1948년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할 때 고궁 문물도 대만 기륭항(基隆港)으로 함께 옮겨졌다. 이때 옮긴 문물은 거의가 보물급이다. 상자로 2,972개, 물건으로 약 60만 건인데, 이것을 세분하면 선본고적(善本古籍, 귀중본 고서)이 16만 책, 청궁 당안(檔案, 공문서)이 38만 책, 기물 서화가 5만여 건이다. 처음에는 문물의 안전을 위해 무봉(霧峰) 북구(北溝)의 동굴 속에 보관해 놓았다가, 1965년 현재의 자리에 새로운 박물관이 완공되자 다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그해 11월 12일 국부 손문(孫文, 1866~1925)의 탄신 백주년 기념일에 맞춰 대만 고궁박물원을 개관했다. 개관 당시에는 박물관명을 손문의 호를 따서 중산박물원(中山博物院)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박물관 유물들은 모두가 정교하며 중국특유의 섬세함으로 감탄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도 으뜸은 배추모양을 조각한 “취옥백채”와 삼겹살 모양을 한 “동파육옥”이었다. 이것은 자연이 인고의 세월을 거쳐 만들어낸 선물 같은 자연 예술품에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손 기술의 향연이었다. 여기에 가이드는 이 작품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곳에 대여 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이곳에 전시가 되어서 그 작품들을 볼 수 있게 된 우리가 참으로 운이 좋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 뛰어난 취옥백채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이작품을 청의 태조가 명나라 장인에게 부탁하여 만들게 한 것인데, 안 만들면 구족을 멸하고 만들자니 매국노가 될 것 같아 고민을 하다가, 결국 배추 아래 부분은 하얀색의 옥으로 명나라를 표현했고, 푸른잎은 청나라를 표현했으며, 그 중에서도 잎사귀에 있는 두 마리의 메뚜기는 잎사귀를 갉아 먹어 청이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니 그 숨은 재치가 감탄 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저렸다.

박물관 밖을 나오니 비는 오락가락했고 우리는 대만에서 가장 높은 “타이베이101타워”로 이동했다. 이 건물은 삼성물산에서도 시공에 참여한 건물로 1999년부터 2004년까지 509m, 101층으로 대만의 대표적인 초고층 건물로 2010년1월 3일까지는 세계에서 최고층 이었으나,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가 829.8m의 위용으로 2010년 1월4일에 개장함으로써 최고층의 영예를 물려 주었고,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한국 롯데타워 등 마천루가 시공되면서 현재는 세계 순위에서 점점 내려가고 있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5층까지는 에스켈레이트를 타고 이동하고, 5층에서 매표소를 거쳐 엘리베이트를 탔다. 문이 닫기자 엘리베이트 천정은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북두칠성이며 여러 별자리를 반짝였고, 우리가 황홀해할 틈도 없이 초고속으로 37초만에 89층에 도착했다. 89층에 도착하자 가이드는 멀리 보이는 건물을 하나씩 열거하며 설명해 주었다. 마침 비가 오고 난 이후라 가시거리는 좋았다.

아내와 나는 작년 말에 롯데타워를 견학했던 적이 있어서 대만에서 보는 전망에 큰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몇 해전 상해 동방명주를 관람하고 왔을 때 이후로 TV에서 동방명주만 보면 상해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서 아내와 한참 그때 여행간 얘기를 하곤 해서 이번 101타워도 향후 TV등에서 보게 된다면 그때처럼 대만의 얘기를 하게 되면 좋은 추억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번 전망대에서 가장 경이로운 구경거리는 89층에서 한층 내려가면서 본 원형추 “윈드댐퍼”였다. 무게가 무려 660톤이나 되는 댐퍼는 지진방지 시설로 지진으로 인한 충격을 댐퍼가 움직여서 건물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일반 건물들은 이런 윈드댐퍼를 일반인들이 볼 수 없도록 했지만, 이 건물은 일반인들에게도 오픈 함으로써 이 또한 전망대에 왔을 때 볼거리를 보여주는 좋은 아이템으로 생각 되었다. 실제로 2015년 지진이 일어 났을 때 이 댐퍼가 움직였으며 그 영상과 사진이 함께 전시 되어 있단다.

우리는 88층에서 다시 엘리베이트를 타고 5층으로 내려 왔는데, 5층은 대부분이 명품가방이나 귀금속과 같은 명품관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리나라의 백화점 명품코너와는 규모나 외형이 더 크고 으리으리했다. 대만의 부자들이 모두 몰려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다시 점심때와 비슷한 현지식을 먹었는데 여전히 적응이 되지 못했다. 언제까지 이 음식들을 먹어야 할지 곤욕스러웠고 얼큰한 쇠고기국이나, 라면국물이 그리웠다.

다음으로 간 곳은 타이베이에서 볼거리가 많은 “스린야시장”이었다. 1909년에 시작되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시장이다. 쇼핑과 음식의 천국으로 매일 밤 불야성을 이루는데,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도 빠지지 않고 들르는 명소로 주말에는 평균 50만 인파가 몰려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시장은 청결하지가 못했고 냄새 또한 좋지 못해서 구경하는 동안에 좋은 인상을 아니었다. 가이드는 시장입구 쪽에서 잠깐 시장에 대해 설명하고 하차한 장소에서 만날 것을 일러 주었다.

마침 딸애도 같이 야시장 구경을 원해서 아내와 카톡으로 시장입구 쪽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여 우리는 감격적(?)으로 이국 땅에서 몇 년 만에 만난 가족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가이드가 일러준 과일가게에서 파인애플과 석가를 시식하고 두 가지 섞어서 1통에12,000원에 구입했는데, 석가가 생각 만큼 아주 달지는 않았다. 사실 이번 대만 여행에서 기대한 과일이 석가였는데 얼마 전 TV에서 대만에 놀러 온 연예인이 석가를 맛보고 너무나도 감탄해서 아내와 나는 언젠가 대만에 가면 꼭 맞보자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과일도 먹으면서 남대문시장과 같은 좁은 골목길을 돌아 다녔지만 크게 사고 먹고 싶은 음식이 없었다. 딸은 소고기를 잘게 썰어 즉석에서 구운 큐브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서 한 팩 사주었다. 딸애는 우리가 타는 관광버스를 타고 호텔도 가 보고 싶다고 했으나, 가이드는 만에 하나 이동 중 사고라도 나면 여행자 보험처리도 되지 않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말했고 우리는 충분히 공감해서 더 이상 조르지는 않았다. 아쉽게도 딸애와 이별을 고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도원공항에서 약 15분 거리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근처에 있는 수도권의 호텔이었다. 아무래도 타이베이시에 있는 호텔은 비싸지만 위성도시에 있는 호텔은 다소 저렴했기에 대부분 저렴한 여행상품은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게 일반적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해 주었다.

50분 정도를 달려 버스는 “오차드파크호텔”에 도착했는데 호텔주위는 개발이 덜 되어 있었지만 편의점도 있어서 잠만 자는 우리에겐 크게 불편한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이 호텔은 본관과 새로 지은 별관이 있었는데 우리는 별관으로 갔다. 1층 로비는 넓고 깨끗했고 한편에 대형 식당이 있었다. 각자 방을 배정받아 엘리베이트를 타고 올라갔다. 우리는 708호로 이동했는데 문을 열자 호텔방이 아주 넓었다. 대형 퀸 사이즈 침대가 2개가 있었고 창 밖으로 밤에는 볼 수 없었으나, 아침에는 멀리 바다도 볼 수 있었다. 새 건물답게 깨끗했고 에어컨도 시원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배려가 부족했는데 가령 세면대에 소품을 올려 놓을 수 있는 선반도 없었고, 화장대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거울을 보면서 화장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상품의 가성비를 생각할 때 아내와 나는 아주 만족했다. 콘센트는 모두 110V였으므로 나는 가져온 돼지코를 끼워서 핸드폰 충전부터 했다. 새벽부터 강행군이었으므로 우리는 빨리 씻고 침대에 눕자 바로 단잠에 빠져 들었다.


< 2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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