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과 '숲밥'에 흠뻑, 'DMZ펀치볼 둘레길'을 걷다.

in #kr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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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채 어스름이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에 집문을 나섰다. 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코로나 이전만해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원거리 산행에 나섰었다. 코로나는 세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고 개인적으로는 산행 리듬을 흔들어 놓았다. 한동안 원거리 산행은 접었다. 동네 한바퀴 걷기와 홀로 또는 산우 서넛과 서울근교 야트막한 산 찾아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던 차, 고교동문산악회 밴드에 ‘DMZ 펀치볼 둘레길걷기’ 공지가 떴길래 냉큼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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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역 12번 출구를 나오자, '재경영주고동문산악회'란 전광머리띠를 두른 버스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동문 몇몇과 반갑게 수인사를 나눈뒤 차에 올랐다. 실내 공간이 널널했다. 흔히 말하는 28인승 리무진으로 뱅기로 치자면 비지니스급이다. 잠실운동장역에 들러 일행을 마저 태우고 출발한 시각은 07시.
버스는 도심을 벗어나 서울양양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초입에서 잠시 정체하는듯 했으나 길은 이내 탁 트였다. 버스는 뻥뚫린 도로를 물 만난 고기 마냥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모든 업종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몹쓸 코로나는 전세버스 업계도 고사 위기로 몰아넣었다. 전국 산으로 산꾼을 실어나르던 버스들도 기약없이 멈춰섰다. 전세버스 운전이 생업인 많은 분들이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버스가 토해내는 엔진음 조차 경쾌하고 기운차게 들린다.
버스는 일행들의 영역표시(?)를 위해 춘천휴게소에 잠시 멈췄다. 오늘 걷기 진행을 맡은 동문 산악대장이 마이크 스위치를 켰다.
"급한 용무만 퍼뜩 해결하고 얼른 오이소. 현지에서 10시에 걷기 출발하기로 '숲길등산지도사'와 약속 되어 있어서 지체할 시간이 없니더. 큰거면 중간에 짜르고요~"
그랬다. 오늘 걷고자하는 곳이 군사보호지역인만큼 하루 200명으로 제한해, 여러팀으로 나눠 일정 간격을 두고 진행하기에 반드시 예약 시간을 지켜야 한다고.

서둘러 목적지로 향했다.
버스는 양구를 거쳐 해안분지(펀치볼)로 이어지는 돌산령터널로 진입했다. 3km의 이 긴 터널이 뚫리기 전 펀치볼 사람들은 옛길인 돌산령을 구비구비 넘나들어야 했다. 터널을 빠져나와 왼쪽 산기슭으로 꺾어들자, 이내 DMZ펀치볼둘레길2코스인 오유밭길 출발점이다. 숨가쁘게 달려온 버스는 일행들을 내려놓고 걷기 마감 지점인 DMZ자생식물원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을 안내할 정광규 숲길등산지도사(이하, 정 지도사)를 만났다. 구수한 톤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주의사항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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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선 자리가 펀치볼 산줄기입니다. 이 위치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양구군 亥安면이지만 '펀치볼'로 더 잘 알려진 지역이죠. 동쪽으로는 인제, 속초, 고성, 서쪽은 화천, 철원, 포천, 연천 방향이고 남쪽방향은 돌산령 너머 양구가 있고 정북 방향은 더이상 갈 수 없는 북녘땅입니다.
6.25때 엄청난 격전지였던 이곳엔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폭발물, 지뢰 등이 산비탈 어디에 있는지 확인이 안됩니다. 7~8년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산에 들어가 나물도 뜯고 버섯도 채취했는데 한두건씩 꼭 사고가 났던 지역이지요.
그래서 2011년도에 산림청에서 숲길을 조성해놓고 국방부와 조율했죠. 국방부는 개별적 탐방은 불허하며 반드시 산림청이 정한 안내원을 동행하도록 조건을 달았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고즈넉한 숲길을 홀로 걷고 싶더라도 이런 사정을 감안,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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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로 화답하고 걸음을 시작했다. 100여 미터 아스팔트길을 따라 걸었다. 도로옆 산기슭에 '함박꽃나무'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북한에서는 '목란'으로 불린다. 아마도 나무에서 피는 난초 같아서일 게다. 1980년대 초반, 김일성은 이 목란에 반해 국화인 진달래를 버리고 목란을 국화로 지정했다고 한다. 설명 듣던 누군가 한마디, "근데 니가 왜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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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 문을 통과해 본격 숲길로 들어섰다. '지뢰'라고 쓰여진 역삼각형 붉은 표지판이 철망에 걸려 있다. '위험하다' 내지는 '주의하라'란 부가설명 없어도 지역이 지역인만큼 두 글자 만으로도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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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쭉 뻗은 잎갈나무 숲을 지나자, 오유밭길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다. 부부 소나무 전망대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유턴해 송가봉 쉼터방향으로 걷게 된다. 전망대가 건너다 보이는 100미터 앞 둔덕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앞 팀이 전망데크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을 담은 수채화가 회사 회의실 벽면에 늘 걸려 있어서 부부 소나무 전망대를 포함, 해안분지 풍경이 무척 낯익다.

오늘은 그림이 아닌 실제 풍경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방이 탁트인 전망데크라 바람이 세차다.
"바람에 날리지 않게 모자 꾹 눌러 쓰세요. 모자 잡으러 숲으로 뛰어들었다가 지뢰를 밟을 수도~"
누군가 농담처럼 훅 던진 말인데 여기선 공갈로 들리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겠단 표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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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다 보이는 해안분지는 영락없는 화채그릇(펀치볼) 형상이다. 그런데 요상한 것은 바다와는 거리가 먼데 왜 해안분지일까, 이 대목에서 정 지도사의 존재감이 폭발한다.

"해안이라하여 바닷가로 생각하고 오시는 분들이 더러 있다. 여기 해안은 돼지 亥에 편안할 安이다. 海岸과는 거리가 멀다"며 전해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지형이 습한 분지이다보니 예로부터 양서류인 개구리가 엄청 많았다고 합니다. 개구리의 천적은 뱀이라 온 들판에 뱀이 들끓어 뱀에 물리는 사고가 잦았다지요. 어느날 고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백성들이 뱀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알고 뱀을 없애는 방법을 일러주었답니다. 집집마다 돼지를 길러 뱀이 보이면 잡아다가 돼지우리에 넣으라고 했어요. 바로 돼지가 뱀의 천적이란 걸 알려준 것입니다. 그후 뱀은 씻은 듯 자취를 감췄고 살기가 편안해졌다고 합니다. 고을 이름, 亥安은 그렇게 불려진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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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분지(펀치볼) 지형에 대한 정 지도사의 설명도 이어졌다.
"분지의 제일 낮은 지역의 해발고도가 500m이고 농경지가 많이 들어선 곳은 해발이 6~700m입니다. 움푹한 지형을 대암산, 도솔산, 가칠봉 등 1,000m 넘는 고봉들이 둥글게 에워싸고 있습니다.
미군은 전투 시 흔히 종군기자를 대동합니다. 6.25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가칠봉 어디쯤에서 미 종군기자는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해안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지요. 분지가 마치 붉은 와인이 담긴 화채그릇 형상으로 비춰졌던 모양입니다. 그는 '붉게 물든 펀치볼(punch bowl)에서 우리 군인들이 피 흘리며 격전 중'이란 기사를 본사에 송고했답니다. 이때부터 해안분지는 펀치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옛부터 불려지던 지명, '해안분지'는 70년 전 미 종군기자의 '펀치볼' 기사 한 줄에 묻혀 버린 꼴이 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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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초롱, 노루귀, 삿갓나물, 우산나물, 모시대, 홀아비꽃대, 대사초, 은대난초, 족도리풀 등등, 산림청은 자생하는 숲식물에 이름표를 달아놓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발길 닿지 않은 숲속은 온갖 식물의 보고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숲길은 양구쪽 공산품과 고성쪽 수산물이 나귀에 실려 오가던 옛길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오랜세월 사람의 발길이 끊겨 흔적만 남아 있다. 그 길목에 '나귀길'이란 안내판이 있어 옛길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나귀길 쉼터에 잠시 멈춰 보부상들의 고단했을 삶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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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도사는 '송가봉갈림길' 이정표 앞에 일행을 멈춰 세우고선 "최근 새로 조성한 특별한 숲길로 여러분을 안내하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번 둘레길 코스를 주선한 동문 후배를 불러 세웠다.
"여기서부터 이룡폭포를 지나 성황당쉼터에 이르는 2km 구간은 지금 함께 걷고 있는 여러분의 동문인 손효관님께서 저와함께 작년 이곳에 1년 간 머물며 길을 냈습니다. 주민들이 신성시 하는 성황당을 우회하기 위한 길이지요. 철저히 지뢰 탐지를 해 안전하며 인위적 시설없이 자연친화적 길입니다."
고교동문인 손효관 후배는 정년퇴직 후 산림청 숲길등산지도사 교육을 이수해 자격을 취득했다. 지도사 실습 과정의 일환으로 숲길 조성에 참여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특별하고 의미있는 길, 맞다. 우리끼리라도 앞으로 이 구간만큼은 '손효관 숲길'이라고 부르자고 했다.ㅎ
'숲길등산지도사'는 산림청장이 발급하는 국가전문자격증으로, 산림청이나 지자체 등에서 조성한 숲길에 국민이 안전하고 쾌적하게 등산·트레킹을 할 수 있도록 해설하고 교육하는 전문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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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다래를 주워 맛 보았다. 키위 맛과 흡사했다. 지천인 도토리를 주워 잇빨로 깨물었다. 떫디떫다. 옹달샘 물맛은 에비앙이 울고 갈 맛이다. 자연의 맛이 가득한 숲속을 통째로 전세낸 기분이다.
이룡폭포가 가까워진 걸까, 계류소리가 우렁차다.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계류가 포말을 일으키며 굽이친다. 도솔산 골짜기 이룡계곡이다.
폭포라 부르기엔 낙차가 살짝 민구스럽다. 하지만 이룡폭포에는 용이 되지못한 이룡의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구렁이가 크면 이무기를 거쳐 용이 된다고 한다. 이무기가 곧 이룡(?龍)이다. 옛날 옛적 도솔산 골짜기에서 이룡이 용이 되어 승천하려고 계곡을 기어오르다가 도솔산 여신에 홀딱 반해 올라가지 못하고 길게 주저앉았다. 이처럼 이룡폭포를 품고 있는 이룡계곡은 이무기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계곡을 품고 있는 도솔산은 6.25때 엄청난 고지전이 있었던 곳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에 북한군은 이 산을 엄청 요새화 시켜 놓았다. 1953년 휴전이 되기 직전, 이 산은 우리가 반드시 뺏어야만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미 해병대가 열여섯번을 공격했지만 탈환에 실패했다. 그러다가 열일곱번째 우리나라 해병대가 투입되어 마침내 탈환을 하게 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승리를 기념해 해병 앞에 '무적'이란 칭호를 내려주었다. '무적 해병'이란 말은 바로 이곳 도솔산 전투에서 얻은 것이다. 지금도 해병대사령관이 1년에 한번씩 여기 와서 기념행사를 할 정도로, 도솔산과 해병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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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지나 숲길을 벗어나자, 왼쪽 산기슭에 맞배지붕의 도솔산 성황당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주민들이 매우 신성시하는 곳으로 100년 넘게 매년 도솔산 산신께 제를 올리고 있다. 특이한 건 소를 제물로 바친다는 점이다. 산신이 여신이라 숫소만 바치고, 여성은 제례에 참여할 수도 없다고 한다. 여성은 노땡큐, 제물로 소를, 그것도 숫소를 고집한 건 과연 여신의 뜻이었는지? 별게 다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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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 쉼터에서 이번 걷기 중 하일라이트인(개인적으로~) 환상의 '숲밥'을 만났다.
펀치볼 안에서 주민들이 재배한 채소와 갖은 산나물로 차린 둘레길 트레커를 위한 밥상이다. 산상오찬을 넘어 천상 뷔페랄 수 있는 밥상을, 그것도 펀치볼 깊은 숲속에서 받았으니,,

그 맛을 필설로 표현하기엔 능력 밖이다. 기회 있으면 여러분도 반드시 발품 팔아 밥상을 받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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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 오찬을 돼지감자 차로 마무리하고서 다시 한시간 남짓 숲길을 걸어나왔다. 콩밭과 인삼밭 그리고 저수지를 지나 리무진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DMZ자생식물원에 도착, 걷기 일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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