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신이 영화를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

in #kr7 years ago (edited)

  • 영화 관람은 어려운 취미 생활

이 아닙니다. 영화만큼 편안한 오락 생활이 또 있을까요? 멀티플렉스가 세상 전체에 뿌리 박기 전에는 다소 불편한 점이 있었습니다. 길거리에 붙은 영화 간판을 보고, 극히 제한된 정보 속에서 신중하게 영화를 고른 다음, 직접 극장 앞으로 달려가 시간표를 확인하고, 줄을 서서 표를 끊은 후, 기다려야 했으니까요. 개인 컴퓨터와 인터넷 망의 보급, 그리고 멀티플렉스의 출범과 이들의 예약 시스템은 영화 관람에 대한 사람들의 수고를 획기적으로 줄여주었습니다.

영화가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친근한 여가 활동이 된 이유 중에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도 한 몫을 했습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광고 몇 편을 본 뒤 두 시간 정도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영화를 보는 중에는 직접 몸을 움직이는 일도 없고, 잠시 화면을 멈추고 깊이 생각하거나 뒤로 돌아가 다시 보는 일도 없습니다.(물론 DVD나 블루레이 구매 후에는 조금 다르겠지만, 영화 감상에 대한 기본적인 관객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 접근성이 뛰어나다

고 해서 영화 관람이 질이 떨어지는 취미 생활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즐기기 때문에 고급스럽다, 는 인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잘못된 생각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누구나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다, 는 건 영화라는 매체의 큰 장점입니다. 대한민국처럼 좁은 땅에서 천만 관객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소비하는 층이 많은 컨텐츠는 내부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습니다. 창작자들의 필요와 소비자들의 욕구가 맞물려진 윈-윈 상황인 거죠.

  • 거대 자본의 투입

은 필요합니다. 영화는 그 어떤 컨텐츠보다 많은 수의 전문가들이 달려들어서 온갖 종류의 반목과 타협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굳이 블록버스터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가 그냥 저예산, 이라고 부르는 영화조차도 다른 일반적인 컨텐츠들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많은 돈을 필요로 합니다.

한 때 영화는 소수의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어려운 오락이었습니다. 인쇄 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 소설이 어려운 오락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영화는 쉬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닿을 수 있는 지점에 있게 됐습니다. 천만 관객 시대, 라는 건 영화의 황금기를 증명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게 돈이 된다, 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엄청나게 많은 돈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입니다.

  • 멀티플렉스의 함정 카드

는 여기서 등장합니다. 영화에 대한 접근성을 대중 가까이 끌어 당김으로써 쉽고 빠르고 편한 여가 활동을 가능케 했던 멀티플렉스가 소위 '돈이 되는' 영화의 제작에 관여하기 시작한 겁니다. 영화는 만드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만든 영화를 사람들에게 선보일 공간이 오히려 영화 자체의 제작보다 더 중요합니다. 틀지 못하는 영화는 열리지 않는 책과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작사는 영화가 완성되기 전부터 극장들과 협의를 합니다. 사람들이 몰리는 좋은 날짜, 좋은 시간대에 자신들이 만든 영화를 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극장 측에서는 물론 많은 돈을 제시하는 제작사의 영화를 틀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요 수입은 제작사가 제시하는 대관료가 아니라 관객들의 관람료에서 나옵니다. 때문에 무턱대고 엉성한 영화를 받아다 틀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중적이지 못한 영화들, 시기가 좋지 않다고 판단되는 영화들, 혹은 그냥 못 만든 영화들이 밀려나거나 보류됩니다.

이러한 협의가 치열하게 전개될 수록 관객들에게는 유리합니다. 여러 가지 방면에서 심각하게 고려되어 선정된 영화들이 극장 간판에 걸리게 되는 거니까요. 선정이 실패하여 관객들에게 외면당한 영화는 빠르게 내려갑니다. 그러면 보류됐던 다른 영화가 빈자리를 채웁니다.

  • 하지만 멀티플렉스가 출동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게 가능할까요? 영화의 보급을 담당하던 거대 자본이 제작에까지 손을 미치게 되면 극장 간판의 선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결과는 이미 나왔습니다. 오래 전부터 멀티플렉스를 반대하던 사람들의 주장이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죠. 멀티플렉스는 자신들의 돈이 투여된 영화를 가장 좋은 날짜, 가장 좋은 시간에 무차별적으로 살포합니다. 이른바 황금시간대라고 불리는 느즈막한 오후에 여러 개의 관을 보유한 극장이 전부 같은 영화를 틀고 있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되는 겁니다.

이것이 영화 보급의 독점 현상입니다.

  • 관객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멀티플렉스가 부당하게 독점하고 있는 영화를 외면할 거고, 그럼 자연스럽게 다른 영화들에게 기회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우선 멀티플렉스가 제작한 영화들이 아주 큰 하자가 없는 이상, 관객들의 불만은 결코 하나로 일치되지 않습니다. 어떤 영화를 보든 사람들의 의견은 갈릴 수밖에 없고, 이건 다양성을 지닌 건강한 사회가 지녀야 하는 마땅한 결과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재미없는 영화가 나에게는 재미있을 수 있고 또 나에게는 재미없는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멀티플렉스가 돈을 퍼부어서 제작한 그런대로 봐줄 만한 영화는 관객들의 표를 너무 쉽게 불러 모읍니다. 그런대로 봐줄 만한 영화가 아니라 정말 잘 만든 영화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이게 더 심각합니다. 멀티플렉스의 영화 보급 독점이 효과적으로 먹히는 건 바로 영화 관람이 쉽기 때문입니다. 멀티플렉스가 관객들에게 제공한 순기능이 멀티플렉스를 악이용하는 거대 자본들에게 득이 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영화 관람은 쉽습니다. 주말 오후 별 생각 없이 멀티플렉스 홈페이지에 들어가 예매를 하고 극장에 들르기 쉽습니다. 연인, 가족, 친구와 저녁을 먹고 편한 기분으로 극장에 들러 마침 하고 있는 영화의 표를 끊기 쉽습니다.

미간을 좁히고 신중하게 이게 과연 어떤 영화인가, 정당한 경쟁 과정을 통해 보급된 영화인가, 정직한 자본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인가, 고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화 관람은 언제 어디서나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기회 비용이 그렇게 크지 않은 여가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예매가 실패했다 해도 사람들은 큰 상실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영화야!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경제적인 타격을 입거나 심리적인 상처를 받지는 않습니다.

  • 멀티플렉스가 만든 영화

가 좋은 영화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멀티플렉스가 부리는 영화 보급의 독점 횡포 자체에 있습니다. 이게 천만을 찍을 영화인가, 아닌가? 이런 논의는 어디까지나 정당한 경쟁 과정을 통해 극장 간판에 걸린 영화들에 한해서만 진행될 수 있습니다. 멀티플렉스가 보급을 독점하긴 했지만 천만 관객이 볼 만큼 좋은 영화이니까 문제가 없다, 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멀티플렉스의 영화 보급 독점 현상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저의, 여러분의 선택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영화 한 편이 보고 싶어 극장으로 달려간 당신의 앞에 멀티플렉스 제작의 영화 간판들만 수두룩합니다. 특정 영화를 보고 싶어 마음 속으로 품고 있다가 주말에 시간을 내어 보니 아침 일곱 시, 밤 열한 시 딱 두 개의 시간대에만 상영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난 주에 개봉한 영화 한 편을 보려고 시간을 알아보니 개봉하고 일주일만에 간판에서 떨어져 내렸습니다.

다양성을 보장해주지 않는 멀티플렉스의 독점 사태가 영화 자체에 대한 관객들의 다양한 의견으로 흐려져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영화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 모든 것을 부수는 거대한 괴물

이 있습니다. 괴물의 힘은 압도적이고,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것에 맞서 한 사람이 돌멩이를 집어던진다고 뭐가 어떻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돌멩이를 던지세요.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요구하세요. 부당한 행위를 거부하고 그에 대한 의사를 분명히 하세요. 불과 십오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는 무분별한 조폭 코메디가 판을 쳤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손가락질하고 요구하고 차갑게 외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좀 더 좋은 영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좀 더 좋은 극장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는 멀티플랙스의 미래를 기대해 봅니다.

2014 08 13.
2018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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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요새 영화들을 보면, 천만 관객이라는 타이틀이 참 많아졌죠. 가끔 드는 생각은 과연 이 영화가 정말 '작품성' 때문인지 영화 배급의 '독과점'으로 만들어진 '천만 관객' 영화인지 아리송할 때가 많습니다.
가끔 보고 싶은 영화도 시간대가 애매해서 어쩔 수 없이 거대 배급사의 영화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으니, 이게 내가 선택을 한 것인지 선택을 강요당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앞으로 관련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팔로우& 미약하지만 업보팅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막 시작한 스팀잇이라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 어색하군요. 이 글은 한국 영화 명량이 개봉했을 당시에 적었던 건데, 3년 남짓 지난 지금에도 해당하는 문제라 살짝 씁쓸합니다. 앞으로 계속 영화에 대한 글을 적어볼 생각입니다.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으면 좋겠네요! 멋진 새해 되시길 바랄게요.

보팅을 하고 간다는 걸 안하고 가버렸네요. 죄송합니다.
미약해서 티도 안나는 추천이지만 앞으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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