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알쓸신잡] 미국 SEC는 암호화폐의 적(敵)일까
미국 금융감독당국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암호화폐 시장을 정면으로 겨누면서 투자심리가 얼어 붙었다. SEC는 지난 9월 암호화폐 전문 운용회사인 크립토 에셋 매니지먼트(Crypto Asset Management)를 징계한 것을 시작으로 암호화폐 중개사이트인 토큰랏(TokenLot), 탈중앙화거래소 이더델타(EtherDelta), 신흥시장 관련 금융서비스업체인 에어폭스(AirFox), 대마초사업을 블록체인에 접목시킨 스타트업인 파라곤(Paragon)까지 암호화폐 관련 기업들이 연방 증권거래법에 따른 당국 등록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SEC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암호화폐공개(ICO) 스타트업들로부터 금전적인 대가를 받은 뒤 해당 프로젝트를 개인투자자들에게 홍보해 온 전직 유명 권투선수인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DJ 칼리드 역시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특히 SEC가 앞으로 유튜브 크리에이터나 암호화폐 평가업체, 개인 인플루언서 등도 잠재적인 타깃으로 삼을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이는 토큰 발행과 퍼블릭 세일(Public Sale), 토큰 마케팅, 토큰 매매거래 중개와 자산운용까지 ICO를 둘러싼 모든 이해당사자들을 감시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먼저 SEC가 어떤 기관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미국 금융시장을 관리·감독하는 당국은 크게 두 곳으로 나뉜다.
주식, 채권과 같은 통상 증권(Security)으로 분류되는 자산을 감독하는 곳은 SEC인 반면, 에너지와 농산물 등 원자재(상품·Commodity)와 선물, 옵션 등 파생상품을 감독하는 곳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이다. 이처럼 영역은 다르지만 SEC와 CFTC 모두 시장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시장 참가자를 보호한다는 동일한 정책 목표를 가지고 있다.
다만 원자재와 파생상품이 기관투자자 위주로 운영되는 것과 달리 주식시장은 개인투자자 비중이 높기 때문에 CFTC에 비해 SEC의 규제는 보다 깐깐하고 촘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암호화폐는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SEC가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전 세계적으로 토큰은 스위스금융감독청(FINMA) 분류에 준해 근본적인 경제적 기능에 따라 △지불형 토큰(payment tokens) △유틸리티형 토큰(utility tokens) △자산형 토큰(asset tokens)으로 구분된다. 지불형 토큰은 상품이나 서비스의 대가를 지불하는 수단으로 쓰이며, 유틸리티형은 블록체인 상의 응용프로그램이나 서비스에 접근을 제공하는 용도로 쓰인다. 반면 자산형 토큰은 채권 또는 주식과 같이 자산이나 자산에 대한 권리를 나타내는 만큼 증권거래법에 준하는 규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상당수 토큰은 유틸리티형이면서도 향후 수익을 보장하는 증권형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이브리드 성격을 가진 토큰이 당국 등록 없이 일반투자자에게 판매됐을 때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SEC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사후에라도 규제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SEC로부터 증권형 토큰이 아니라는 유권해석을 받은 코인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둘 뿐이다. 리플(XRP)은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나, 글로벌 국경간 송금에 활용되는 리플 역시 증권형 토큰이 아닌 쪽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이외 대부분의 토큰은 증권형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실제 제이 클레이튼 SEC 위원장도 지난달말 코인데스크가 주최한 컨센서스
행사에서 “자금을 조달해 스타트업을 만들고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일반인들에게 토큰을 판매한다면 그 토큰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라며 “만약 토큰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한다면 일단 증권형이라고 전제하고 시작하면 된다”고 말했다.
결국 그동안 ICO를 통해 자금을 조달한 수많은 프로젝트들 대부분이 SEC의 레이더 안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증권형 토큰으로 판정 받은 프로젝트는 SEC에 등록을 거쳐 공시 의무를 지고 손실을 끼친 투자금을 환불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프로젝트 자체를 접어야 할 수도 있다. 음식 리뷰 및 소셜네트워킹 앱인 먼치(Munchee)가 ICO를 중단하고 프로젝트를 포기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게 본다면 마치 저승사자 마냥 주변을 맴도는 SEC로 인해 ICO와 암호화폐시장은 당분간 더 얼어붙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SEC는 결코 시장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투자자를 보호하고 시장을 정화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게임이 잘 풀리도록 지켜보다 반칙이 나오면 휘슬을 부는 심판과도 같다. 당장은 시장에 노이즈가 되겠지만 길게 보면 더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을 만드는 길이 될 것이다.
특히 SEC는 투자자 보호에 주력하면서도 새로운 기술 혁신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클레이튼 위원장은 에어폭스나 파라곤 등의 규제에 대해 “이는 어디까지나 특수한 사례에 대한 처방일 뿐”이라며, “앞으로 SEC가 내리는 처방은 다를 것으로 (ICO 하려는 스타트업들은) 우리와 함께 풀어 나가면 된다”고 블록체인 산업계를 안심시켰다.
찜찜하면 SEC에 먼저 등록절차를 밟으면 되고 그도 아니면 토큰 세일 전에 SEC에 문의라도 하면 된다는 얘기다. SEC의 이 같은 행보는 앞으로 제대로 된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이 생겨나고 투자자들에게도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 안정적인 시장 구축을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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