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는 단순히 빵에 불과할까
<성체는 단순히 빵에 불과할까>
워마드 성체 훼손 사건을 두고서 일부 ‘무신론자’ 사이에서는 종교적 허구에 불과한 것에 대해 지나치게 의미부여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나는 이것은 대단히 무지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리처드 도킨스’ 류의 일면적인 무신론이 대중 일각에서 유행한 결과라고 보인다.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가 믿는 신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에 천착하며 그러한 허구에 도덕적/윤리적 기초를 두는 종교는 잘못된 것이라고 공박한다. 이것은 일견 생물학자로서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애초에 인간 사회라는 것 자체가 공통의 허구를 믿는 것을 통해 성립되었으며, 무엇보다 현존하지 않는 대상을 한 집단이 믿는 것 자체가 인간 고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물리적으로 보았을 때 성체는 단지 빵에 불과하며 그 종교적 의미는 인간이 부여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의외로 인간의 사회적 생활 심지어는 물질적 생활의 기초에도 집단적 허구가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화폐가 대표적이다. 화폐도 물리적으로는 종이나 금속 쪼가리이거나 디지털화된 전기신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경제적 가치는 인간이 집합적으로 부여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잘 지적했듯이 경제조직의 기본 단위인 법인(corporate)도 마찬가지이다. 법인이란 실은 계약서 위의 잉크나 모니터 화면의 기호로 묘사된 허구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에서 그것이 마치 실제 생산-교환-소비를 주도하는 경제적 인격인 것처럼 상상하곤 한다. 그것은 <일리아드>에서 고대인들이 수행한 전쟁을 올림푸스의 각종 그리스 신들 간 싸움으로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신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카톨릭에서 숭상하는 성체의 본질도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물리적인 현실에서 포도주가 피로 변하거나 빵이 살로 육화한다고 믿는 바보는 아무도 없다. 성체는 오히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몸을 내어주었다는 카톨릭 신자들의 공통된 믿음을 구현한 상징물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실제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성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수억 카톨릭 신자와 하나의 보편적인 상징적 질서(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기에 성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나아가 워마드 회원이 구태여 그 빵을 욕보인 것도 그것이 단순히 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톨릭은 성찬식에서 물리적 변환이 실제 일어난다는 믿음을 공식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내심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믿음은 여전히 '작동'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애초에 종교라는 것은 인류가 가족, 밴드 단위의 결속을 넘어 문명사회를 이룩하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또한 이것은 이후 각종 사회운동과 사상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제프리 잉햄이라는 화폐 이론가에 따르면 고대 바빌론에서는 바빌론의 수호신인 마르둑이 주기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다는 믿음 아래 왕이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하는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이것의 진정한 목적은 부채위기로 인한 계급분열과 사회혼란을 방지하는 것이었다(<돈의 본성>). 이때 고대 바빌론 사람에게 ‘마르둑은 허구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어깨를 으쓱하고 ‘나도 알아.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며 지적의 초점이 잘못되었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참고로 이러한 고대 종교행사는 이사야라는 선지자 혹은 당대의 사회개혁가에 의해 적극 도입되어 노예해방, 채무변제, 토지재분배 등의 사회개혁을 일구어냈고 결국 유대교의 주기적인 쥬빌리(희년) 행사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가라타니 고진 역시 <세계사의 구조>에서 이처럼 세계보편종교들이 고대세계의 각종 사회개혁 운동에서 출발했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볼 때 대부분의 문명국가가 세속국가로 전환된 이후에도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신성모독을 꺼리는 이유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종교가 허구적 존재(신, 영혼, 내세)를 믿는 신념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공통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것이 자칫 사회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 저런 종교적 교리를 부정할 수 있지만 종교적 심성 자체는 쉽게 부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컨대 죽은 후에도 나의 평판을 신경 쓴다는 거은 내세를 믿는 것과 같고, 내가 죽은 후에도 자손이나 공동체를 염려하는 것은 영생을 믿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네이션(nation)이라는 것도 인간의 종교적 심성에 기반한 세속적인 종교이며 쉽사리 부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실은 이렇게 말하면 불편하겠지만 '인권'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역사적으로 발명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궁극적으로 정당화할 과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보편인권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념체계라고 생각한다. 다만 현재에도 인권을 일종의 '제도적 사실'로서 지탱하는 궁극적인 요소는 인간의 집합적 믿음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19세기 언저리에 발명되고 20세기 중후반에서야 정립된 남녀 노소 인종 불문한 보편인권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종교적 믿음의 최종적 발전형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미국 독립선언문을 보면 '모든 인간은 날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믿음이 기독교 신앙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
이제 인간은 개나 고양이도 권리의 주체로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늑대나 고양이 형상을 한 수호신을 믿었던 고대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오늘날 계약법의 초기형태를 발명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야말로 개나 고양이에게 법적 권리를 부여하자는 논의를 진지하게 하는 현대인들을 보면 되려 비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인격이 아닌 것에 인격(영혼)을 부여하며 그 믿음을 공유하려는 인간의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세속적 무신론자라고 해도 종교적 믿음을 단지 그 허구성 때문에 비웃을 자격은 아무리 봐도 없는 것 같다. 현재에도 인간의 사회적 결속의 근원은 ‘위대한 허구’이며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종교이다. 이것이 상정하는 각종 대상들(신, 영혼, 내세 등등)이 단지 허구에 불과하다는 이유만으로 비웃는다면, 우리는 국가도, 경제질서도, 화폐도, 동물권은 물론 인권이라는 개념도 비웃는 자가당착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페미니즘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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