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부자들> - 배우가 살렸다.(스포가득)
<내부자들>은 크게 1) 안상구가 배신을 당하고 2) 몰락한 안상구에게 우장훈이 결탁하고 3)둘이 처음 날린 한 방이 헛발질로 끝나고 4) 둘이 완벽하게 결속하여 제대로 한 방을 날리는 4개의 파트로 나뉘어진다. 130분이란 시간에 이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전개하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곁가지가 너무 많다. 한정된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전개해야하는데, 핵심 줄거리와 크게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집어넣다보니 정작 중요한 이야기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적다.
장르적으로도 모호하다. 스토리로 봤을 때는 복수극인데, 어떨때는 버디무비의 냄새를 풍기고, 마무리는 사회고발극으로 흐른다. 4개의 큰 조각들이 부실하게 연결되며, 많은 잔가지들(사회 풍자, 애매한 주변인물들)은 이를 메워주지 못한다. 첫 시연영상은 4시간이었다는데, 그랬다면 충분히 탄탄한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을 좀 더 길게 잡던가, 시간을 줄이고 스토리를 담백하게 끌고 갔어야 했다.
스토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니 그들의 행동에도 공감이 안된다. 안상구가 왜 이강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지 설명되지 않기에, 그가 다시 이강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해 보인다. 우장훈은 무슨 계기로 속물검사에서 자신의 알몸까지 보여주며 정의를 실혈하는 열혈검사가 되었나? 영화 마지막, 우장훈의 계략에 따라 움직이던 안상구는 우장훈의 계략이 실패하자 자기 스스로 거대하고 위험한 시나리오를 짠다. 영화 내내 보여지던 허술한 모습을 생각하면, 안상구의 시나리오는 감독이 어떻게든 영화를 마무리 지으려 시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이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스토리의 탄탄함보다는 순간순간의 이미지로 영화를 전개한다. 3번이나 나오는 성접대씬 좀 줄이고 이강희와 안상구의 과거 관계라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좀
줄거리의 허술함은 아쉽지만,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기 - 승 의 단계에서 우왕좌왕하던 영화는 복수를 시작하는 절정부부터는 강력하게 관객을 밀어붙인다. 고생해서 날린 한 방이 거대 권력 앞에 몰락하고, 그 몰락한 상황에서 다시 기회를 잡고 복수하는 과정은 일관된 흐름으로 묘사된다. 복수의 대상은 뚜렷하고 그들에게 날리는 한 방도 묵직하다. 복수극에서
복수의 '한방'이 강력하다면 부족한 개연성이든, 비현실적인 설정이든 어느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다. 베테랑을 보라. 서도철이라는 인물에게 쏟아진 특혜들은 영화의 현실성을 깨지만, 어느 영화에서도 시도하지 않던 '물리적 폭력을 통한 응징'은 관객들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런면에서 <내부자들>의 한 방은 정직하지만 꽤나 강력하다. 산만했던 스토리는 복수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되며 탄력을 받는다. 억지로 케미를 만들어 붙이던 우장훈 - 안상구의 관계도 깔끔하게 정리된다. 서로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던 둘은, 무작정 후려친 첫 한방이 빗나가고 나서야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우장훈의 설계가 먹히지 않았으니, 그 다음 설계는 안상구의 시나리오다. 우장훈의 시나리오를 안상구가 연기했듯, 이번에는 안상구의 시나리오를 우장훈이 연기한다.
동영상 공개 후, 우장훈이 내부자로써 기자들 앞에 서는 장면은 안상구가 우장훈의 설득으로 기자들 앞에 서는 모습과 일치한다. 약점은 보완했고, 자료는 더욱 강렬해졌다. 적은 같으나 목표가 달랐던 첫 복수 때와 달리, 두 번째 복수에서는 같은 목표로 같은 적을 노린다.(그 목표가 복수든 사회정의든 간에) 그제서야 삐걱대던 둘은 완벽한 듀오로 각성한다.
배우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방법은 크게 2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캐릭터에 녹아들거나, 자신의 스타일로 캐릭터를 당기거나. 이병헌은 전자의 연기방법의 정점에 올라선 배우다. <내부자들>에서의 이병헌은 다른 영화 속 이병헌과 180도 다르다.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걸쭉한 맛이 있다. 반면 백윤식은 자신의 스타일을 영화에 그대로 드러낸다. 점잖은 목소리로 욕설을 뱉는 장면은 익숙하나 맛깔난다. 시발 좆됐네 조승우 역시 캐릭터의 한계로 묻혔을 뿐, 이병헌과 어우러지며 나름의 아우라를 드러낸다. 영화의 스토리는 너무나 헐겁지만 그 스토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우들의 열연은 호평을 받을만 하다. 각각의 장면은 산만하지만, 그 장면에서의 연기가 너무나 좋기에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예고편에서 너무나 많은 기대를 했나보다. <부당거래>의 씁쓸함이나 <베테랑>의 쾌감을 원했건만, <내부자들>은 두 영화를 미지근하게 섞어놓은 느낌이다. 산만한 초반부 스토리는 영화의 통일성을 해친다. 결말은 통쾌하지만, 개연성 없는 전개로 인해 그 쾌감의 정도를 갉아먹었다. 그러나 그 모든 단점을 커버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있다. 개개별의 장면들은 살아서 움직이고, 스토리가 잘 정리된 후반부에 가서는 강력한 시너지를 뿜으며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맛이 있다. 명작이라고 하기엔 아쉽지만, 잘만든 오락영화라고 생각한다.
p.s) 절정부의 강력함은 좋았지만, 이후의 전개에서 끝맺음은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우장훈이 내부자로써 비리를 폭로하는 순간에 끝났다면 더 좋았을 걸, 아니 우장훈이 안상구를 배신하고 지배층에 스며드는 지점에서 끝났다면 더더욱 좋았을 텐데.. 역시 완벽한 해피엔딩은 내 취향이 아니다.
"끝에 단어 3개만 좀 바꿉시다. '볼 수 있다'가 아니라 '매우 보여 진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