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책] 랩 걸(Lab Girl)

in #kr6 years ago (edited)

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지은이), 김희정 (옮긴이) | 알마

원제 Lab Girl (2016년)


들어가는 글 


우리나라에도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철학, 역사, 사회학 같은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주목 받고 소비가 증대하고 있다. 이는 바람직하고 고무적인 일이지만 교양을 얘기하면서 인문학만 다뤄지는 것이 매우 아쉽다. 


우리가 살아가는데에는 인문학에 대한 소양도 필요하지만 과학에 대한 소양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아니 과학은 우리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연현상과 각종 법칙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인문학보다도 더 중요하다. 우리의 삶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모든 현상을 이해하는데 과학지식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교양을 얘기할 때, 과학 얘기는 빠진다. 수학을 일찌감치 포기해서일까? 물리학, 화학 같은 학문은 물론이고 천문학처럼 수학적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다들 좀 심하게 무지하다. 


이러한 과학적 소양의 부족은 일상 생활 속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비효율성을 가져온다. 과학적 접근이 기본으로 갖춰져 있으면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내용은 말하지 않게 된다. 또한 상대방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무엇이 핵심인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러한 것이 갖춰져 있지 않은 사람이 많다보니 불필요한 얘기들이 많고 때로는 그로인해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유사과학, 사이비과학이 위화감 없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제품들을 구매하며 돈낭비를 하기도 한다. 


이를 비슷한 경제규모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그 심각성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본이 되는 과학지식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자기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러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사람들 속에 있으니 자신의 무지가 생활 속에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걸까. 다행스러게도 이러한 무지를 타파할 수 있는, 교양으로서의 과학을 쉽게 섭취할 수 있는 매체가 우리나라에 있다.

'과학과 사람들'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가 그것이다. 


오늘 소개할 책도 이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 안그랬다면 이런 좋은 책이 있는지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랩걸(Lab Girl)

랩걸은 호프 자런(Anne Hope Jahren)의 자전적 에세이다. 책을 읽고나서 호기심이 생겨 따로이 이 분에 대한 내용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과학자이지만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는 문장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문장을 보면 경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Each Beginning is the end of a waiting. We are each given exactly one chance to be. Each of us is both impossible and inevitable. Every replete tree was first a seed that waited.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문장이 넘 좋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원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서 원문을 찾아보게 되었다. 사실 랩걸 국내판의 번역상태는 좋다. 번역문이 훌륭하기 때문에 한국어판으로 읽어도 상관 없겠지만 본래의 맛을 더 느끼고 싶은 분에게는 원서를 병행에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저자 호프 자런은 전형적인 과학자이다. 지구화학자(geochemist)이며 geobiologist(지구생물학자?, 정확히 우리말에 대응하는 직함을 못찾겠다)로서 오슬로 대학에 근무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문학도이기도 하다. 많은 문장들을 어려서부터 읽어왔고 연습해왔다. 이러한 점이 그녀의 글에서 다른 과학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문학적 비유와 서사를 보여준다. 랩걸에는 보통 과학자들이 쓰는 건조한 문체 대신 문학적 기법이 자연스럽게 묻어 있는 글로 쓰여져 있다. 덕분에 그녀가 알아낸 과학적 사실들이 훨씬 편안하게 부드럽게 전해진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다.

FOR TREES THAT LIVE in the snow, winter is a journey. Plants do not travel through space as we do: as a rule they do not move from place to place. Instead they travel through time, enduring one event after the other, and in this sense, winter is a particularly long trip. Trees follow the standard advice given for any extended travel within a rustic setting: pack carefully.
눈 속에서 사는 식물들에게 겨울은 여행이다.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디어내면서 시간을 따라 여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은 특히 긴 여행이다. 나무들은 오지에서 긴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표준 조언을 따른다. 짐을 주의깊게 싸라.


A SEED KNOWS how to wait. Most seeds wait for at least a year before starting to grow; a cherry seed can wait for a hundred years with no problem. What exactly each seed is waiting for is known only to that seed. Some unique trigger-combination of temperature-moisture-light and many other things is required to convince a seed to jump off the deep end and take its chance-to take its one and only chance to grow.
씨앗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대부분의 씨앗은 자라기 시작하기 전 적어도 1년은 기다린다; 체리 씨앗은 아무 문제 없이 100년을 기다릴 수도 있다. 각각의 씨앗이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는 오직 그 씨앗만이 안다. 씨앗이 깊은 곳으로 뛰어드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받아들이려면 고유한 온도-수분-빛의 조합 트리거(trigger) 약간과 많은 다른 것이 요구되어진다.


동시에 이 책은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가치있는 책이다. 사실 호프 자런은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이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단지 이 책에는 그녀가 과학자로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도 우리사회가 얼마나 성차별적이며 여성이 과학자가 되는게 여전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 책 어디에서도 페미니즘을 얘기하지 않지만, 그냥 다른 사실들, 경험했던 사건들과 동일한 톤으로 자신이 겪어온 성차별적인 현실을 적어놓는 것만으로, 나같은 남성의 시각에서는 보지 못했고 알 수 없었던 우리사회의 불합리한 면들을 깨닫게 한다. 예를 들어 그녀가 임신을 하자 그녀의 보스는 실험실 출입을 금지시킨다. 각종 말도 안되는 핑계를 되면서. 그 실험실은 그녀가 직접 만든 실험실이고 그녀가 주관하고 책임지는 실험들이 진행되는 장소였는데 말이다. 또한 그녀는 정식 학위를 가지고 여러 업적을 내어도 꽤 오랫동안 과학계에서 과학자로서 인정 받지 못한다. 보통의 과학자들에게는 어린 여성이 위대한 업적을 낸 과학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성취를 인정하고 과학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잘 아는 이가 있어 그녀는 과학자로서의 삶을 간신히 이어간다.

이러한 일들은 생각해보면 과학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내가 있는 필드도 그렇고 많은 분야에서 어린 여성은 성적대상화 되어지는 것에 익숙하다. 그 여성이 무언가를 잘 한다 하더라도 실제의 능력보다 저평가되는게 보통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업무능력과 성격이 아닌 '여성성'에 주목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성적인 대상으로서 인지되지 않을 시점에서야 비로소 그 여성이 하는 일과 쌓은 경험을 바라 보게 된다. 이러한 일들이 과학계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면에서 이 책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의미가 있다. 


호프 자런은 과학자이기 때문에 책 전체에 과학 얘기만 가득할 것 같지만-실제로 그녀가 연구하는 주제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이기는 하다- 중간중간 삶에 대한 통찰이 엿보인다. 어느 분야나 최고가 되면 그런 것 같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A CACTUS DOESN'T LIVE in the desert because it likes the desert; it lives there because the desert hasn't killed it yet. Any plant that you find growing in the desert will grow a lot better if you take it out of the desert. The desert is like a lot of lousy neighborhoods: nobody living there can afford to move.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라도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 사막은 나쁜 동네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앖어서 거기서 사는 것이다.


랩걸은 에세이이기 때문에 과학에 대해 잘 몰랐던 이들도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과학자의 삶과 현실에 대해서 알게 되고 덤으로 저자가 연구하는 학문에서 발견한 과학적 사실들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 삶에 도움이 될만한 중요한 통찰도 주는 책이다. 그야말로 과학 교양서를 처음 읽어 보려는 사람에게는 딱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단 이 책 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 교양도서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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