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學泅,不學溺
本學泅,不學溺
내 오늘의 한국 시장 형편을 살피다, 다시금 양자(楊子)의 本學泅,不學溺 이를 떠올렸다.
홍수가 나자 수많은 개미들이 꿈을 잃고, 자빠지고, 깨지고 있음이다.
이에 새글을 지으려 하다, 내 지난 글이 이미 있음이라, 다시 꺼내들어본다.
***
지식과 지혜
이 양자는 늘 견주어 비교되며 논해지곤 한다.
하지만, 결론은 늘 지식보다 지혜가 더 중요하다며 끝을 낸다.
지식은 그저 평면적인 앎에 불과하지만,
지혜는 사물의 본질을 관통하는 원리, 이치에 대한 깨우침이자 동시에 그 실천력을 의미한다고,
규정하면서 지혜는 지식보다 몇배 수승(殊勝)한 것이라 말하곤 한다.
심지어는 지식이 아무리 많으면 뭣하나,
지혜가 없다면 다 무용지물이라며,
지식무용론을 펴는 이까지 있다.
산문에 들어서면 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라는 경귀를 만날 때가 있다.
이 경계에 들어서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내 소시적 무진장이란 스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법호를 가진 스님이 한둘이 아니시니,
이제와선 그저 어떤 스님이라 일러도 별 대수로울 바 없다.
그 때,
“지식이란, 비 사이로 막가’식으로 요령껏 비를 피하는 재주를 필 수도 있지만,
지혜가 있다면 그저 점잖게 우산을 받쳐 들고 유유히 걷는다.”
이리 말씀하셨다.
그러하니 비 피하는 온갖 재주, 지식이 넘친다한들,
한낱 우산 펴 비 가리는 지혜만 못한 것이다 라는 가르침이다.
무진장 스님을 떠올리니 하나 더 생각 나는 것이 있다.
옛날 어느 대찰(大刹)이 있었다.
대중이 하도 많으니 해우소도 제법 분주했다 한다.
문제는 일 볼 때, 똥통에서 튕겨 오르는 똥물 때문에 모두들 혼줄이 난다는 것이다.
오래된 스님들은 마치 도력의 심천처럼 갖가지 묘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한다.
가령 5년 정도된 스님은 똥물이 되튀겨 올라오는 순간 토끼뜀질로 피해 도망을 갔다 한다.
하지만 기술이 신통치 않아 가끔은 엉덩이에 물컹한 똥튀김질을 당하곤 하였다.
10년 된 스님은 똥물이 튀겨 올라올만한 시점에 정확히 종이 조각을 펴서 던져넣되,
그 술법이 대단하여 용케 봉변을 당하지 않았다 한다.
20년 된 스님은 천정에 밧줄을 매달고 거기 매달려 똥물이 튀길 시점에 그네 뛰듯 휙 피하는데,
타이밍이 절묘하여 일 치루는 동안 단 한방울도 엉덩이에 묻히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30년 된 스님은 그저 튀겨 올라오는 순간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비켜주기만 하였다 한다.
똥튀김 막는 데도 지혜가 있음이란 말인가 ?
***
과연 그게 다인가 ?
나는 지금 이 물음 앞에 서 있다.
우선 몇가지 생각나는 思考 자료들을 훑어본다.
다기망양 (多岐亡羊)이란 고사가 있다.
양주(楊朱)의 이웃 사람 양 한 마리가 도망을 갔다.
이웃은 양주에게 집안 젊은이를 빌려 달라고 청했다.
양주가 묻기를 한 마리 양을 찾는데 어찌 여러 사람이 쫓는가 ?
이웃 사람 왈 "도망간 쪽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이오."
천하를 위하는 일이라 한들, 제 터럭 하나 내놓기를 아끼겠다는 양주이지만,
이웃을 위해 집안 젊은이를 빌려주었는가 보다.
추적한 사람이 돌아왔기에 결과를 물었다.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갈림길에서 또 갈림길이 거듭되니 도통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양자는 그 말을 듣고는 척연(戚然)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루 내내 웃지도 않았다.
제자들이 하찮은 양 한 마리를 잃은 일이요, 게다가 자기의 양도 아닌데,
그렇게 웃음을 잃은 것이 어찌된 노릇인가 하여, 까닭을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제자인 맹손양(孟孫陽)은 또 다른 제자인 심도자(心都子)에게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심도자는 말했다.
"大道는 갈림길(多岐) 때문에 양을 잃고, 학자는 다방(多方) 때문에 생을 잃는다.”
(大道以多岐亡羊, 學者以多方喪生)
다방이란 학문의 방법이 많음을 말한다.
학자가 수많은 학문의 방법 앞에서 망설이다가, 급기야 살아 있는 학문의 근본을 잃고 만다.
이 얘기의 출전은 열자인데, 심도자의 이야기는 이리 계속된다.
“학문이란 근본과 같은 것인데, 종말에 가서는 차이는 이와 같은 것이오.
오직 같은 곳으로 돌아가고 동일한 곳으로 되돌아가야지만 얻고 잃는 게 없게 되는 것이오.”
그런데, 이에 앞서 맹손양과 심도자가 양주의 침묵에 궁금하여 양주를 찾아 뵙는 장면이 있다.
게서 이들 제자의 질문에 양주의 답변이 사뭇 뜻이 깊다.
내겐 이 장면이 오히려 더 인상적이다.
이에 이를 소개해 본다.
양주왈
“어떤 사람이 황하에 살면서 물질, 배질에 익숙해져 식구를 먹여 살릴 만한 이익을 올렸다.
그래서 양식을 싸짊어지고 배우러 오는 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거의 반수나 되었다.
본시는 헤엄치기를 배우려던 것이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배우려든 것이 아니었지만,
(... 而溺死者幾半,本學泅,不學溺)
그 이해관계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대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생각하는가 ?”
‘本學泅,不學溺’ - 본학수 불학익
이 말씀이 제법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말이다.
지식 역시 바다와 같이 넓고 깊다.
이를 학해(學海)라 이를 수 있으니,
학인이야말로 저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 치는 것을 배우려 하지만,
익사하여 근본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빠져 죽지 않겠다고 바다에 뛰어들지 않으면 영영 배움이란 있을 수 없다.
자 어쩔 것인가 ?
지혜는 지식이란 바다에서 고련(苦練)을 겪어야 낚아지는 것이지,
지식무용론자처럼 지혜가 중하다고 지식습득을 등한히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
***
생전에 성철스님은 당신은 몇 수레에 담길 서책을 읽었으면서도,
학인들에게는 책을 읽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나는 이 가르침에는 암수(暗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즉, 곧이 곧대로 새겨 듣고 책을 읽지 않으려는 사람도 아둔한 사람이요,
반대로 앞전 스님 따라서 책을 탐한 사람 역시 밝지 못한 사람이리라.
마조 스님의 좌선 곁에서 벽돌을 갈며,
마조를 일깨웠던 스승 남악회양의 수법(手法)도 성철스님과 다를 바 없다.
(※ ☞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어둠의 계조(階調) )
또한 마조의 제자 중 대매산 법상(大梅山 法常)의 이야기 역시 이러하다.
(※ ☞ 2008/02/11 - [소요유/묵은 글] - 매실 이야기 )
마조가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 주창하니 모두들 유행처럼 이를 껴안고 모신다.
이 때, 마조는 대매산에 은거한 법상을 한 스님을 보내 시험토록 한다.
그 스님은 법상에게 말하길 요즘 마조는 달라졌다.
이제 마조는 비심비불(非心非佛)로 바꾸어 선양(宣揚)하고 있다.
이리 짐짓 말했다.
하지만 법상은
“그 늙은이가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 한들,
나는 오로지 즉심즉불(卽心卽佛)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즉심즉불(卽心卽佛)이든 비심비불(非心非佛)이든, 또는 책을 읽든 말든,
마조의 좌선 또는 책 읽기란 선행행위 후에라야,
스승 남악의 벽돌갈기가 깨우침의 벼락소리로 작동되거나,
한 소식 거머지는 봄날이 오는 것이지,
그도 없이 생판 놀고먹자는 땡초에게도 그런 소식으로 기능하였을까 ?
선기(禪機), 투기(投機)라는 것이 무엇인가 ?
스승과 제자, 나와 우주와의 찰나적 계합(契合)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한즉, 그게 스승에 굳이 한정될 것도 없음이며,
기왓장, 그림자, 손가락, 책 등등 가릴 바가 어디에 있을 것이며,
또한 찰라인즉 영원을 향해 불지르는 점화식일 터인 것임이라.
한즉 전후가 쌍전(雙全)함이며, 상즉상입(相卽相入)함이니,
꽃과 거름, 지혜와 지식이 결코 나뉨의 존재가 아니다.
그런즉 나는 생각하길,
이 양자는 쌍수(雙修), 겸양(兼養) - 즉 같이 닦고 함께 길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얼핏 북종의 신수(新秀)가 가진 태도 같기도 하나,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를 노래한 혜능(慧能)이라한들 수양(修養)을 내친 것이 아님이니,
그렇다면 그의 절구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
나무꾼 시절에 應無所住 而生其心(마땅히 머묾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이란 독경소리에
홀연히 이끌려 홍인문하에 참문(參門)하여 방아를 찧었음이 한낱 눈가림에 불과하였단 말인가 ?
백번양보하여 설혹 아니라한들 그 역시 계기를 얻기까지 최소한 때를 기다렸음이니,
시간이란 커다란 솥속에서 무엇인가를 익히고 있었음이 아닌가 ?
神秀 偈 唐 神秀大師 (당나라 신수대사의 게송)
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의 나무요
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莫使有塵埃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라.
慧能 偈 唐 六祖慧能大師 (당나라 육조혜능대사의 게송)
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無臺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佛性常淸淨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何處有塵埃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있으리요.
혹여 의심을 둔다면,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보임(補任)의 문제인즉,
차제(此題)의 제기 의론을 빗겨가는즉 이 자리에 부재하는 문제다.
가사(假使), 성철 스님이 자신의 가르침대로 책을 애초에 접하지 않고,
그저 좌선 또는 염불만 하였다고 했을 때,
그날의 성철이 존재하였을까 ?
성철은 그의 열반송에서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였다고 했다.
이걸 순진하게 성철이 속였다고 새기고 앉아 있다면,
정작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게다.
실인즉 성철이 속인 허물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속은 죄인 것임을...
///
열반송 - 성철스님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
***
일자무식 혜능의 고사도 나는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하기사 경허의 맏상좌인 수월(水月)도 나무꾼 무학(無學)이라 하였음이니,
전혀 엉터리는 아닐 수 있다.
진위 여하간에 아뭏든 나는 거기엔 부처님 설법 자리에 늘 등장하는 하늘에서 나리는 “꽃비”처럼
일종의 드라마틱한 장치였으리란 생각이 드는 바이다.
“꽃비”가 신심을 길어올리듯, 일자무식에게로의 전법(傳法) 역시 대단히 극적이다.
이 극적 연출을 통해 대중을 결속하고,
불심을 두루 함께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
그렇다면 이는 허물이 아니라,
축제처럼 어울려 춤추고 노래 부르며 동참할 노릇이어라.
성철이 책을 멀리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 지점에 국한하여 말한다면,
저 일자무식 혜능이 등장하고 있는 그 무대 현장을 짐짓 손짓하고 있음이 아닐까 ?
무식쟁이가 깨치고,
삼천배 공들인 당신이 사기꾼이 되어버리는 세상,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 연극이 아니냐 말이다.
모두 축배를 들어라 !
혜능이 설혹 무학무식이라한들,
홍인의 가르침이 바로 책이요, 지식이 아니어든가 말이다.
꼭이나 종이에 쓰여져야만 책이고, 지식이라 할 것은 없다.
“일자무식”이란 글귀에 취(醉)하여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든가,
책이 필요없다든가, 스승이 필요없다든가, 더 나아가면 노력이 필요없다든가 ...
하는 따위의 화려한 신화가 꾸며지는 것이다.
아련히 번지는 달콤함이라니 ...
이것이야말로 한껏 게으르며, 진짜 무식한 생각이 아닌가 ?
설혹 도학(道學), 불학(佛學)의 대천재가 있어 배움이 필요 없고,
태어나면서 대기(大器), 대기(大機)여서 바로 깨우친 경우가 있다하자.
하지만, 이것은 그런 소수의 사람에 해당되는 일이지,
보통 사람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저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요, 그대는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이룰 수 없는 일이라면,
저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
차라리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게 수지 맞는 노릇이지,
천하일대사 공부를 그저 입 헤벌리고 놀라기만 하고 그칠 것인가 말이다.
그러하니, 지혜니 지식이니 이리 나누어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가르는 행위야말로
반지식적이며 반지혜적인 태도가 아닐까 ?
특히나 그대가 그저 범인에 불과하다면 더욱 그러하다 하겠다.
예전에 ‘트리피아’란 자동차정비체인점으로 화려하게 등장하였다가 사라진 사람이 있다.
그를 나름대로 추적하며 관찰한 적이 있다.
그 역시 자칭, 타칭 천재라고 하였지만,
나는 일찍이 그의 재기 노력이 실패로 귀결될 것을 예견하였던 적이 있다.
물론 이는 그의 전 인격, 인생이 아니라, 사업 영역에 국한하여 말이다.
그 누구라한들 제삼자가 감히 한 인생의 성공, 실패를 논할 수 있으리요.
나는 세인들의 무책임한 성패론에 감히 합석할 염치가 없다.
그의 사업적 실패는 그가 천재임에도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체계적인 지식”을 접하고 닦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나름대로 짐작한 적이 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무식함을 솔직하니 청중 앞에서 오히려 자랑하듯이 말하곤 했다.
그가 말하는 넘쳐나는 아이디어, 전광석화같은 실행력을 꼭이나 지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식 원천(resources)을 기반으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체계적인 지식을 갖추었다면,
아마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는 책이든, 스승의 전수든, 또는 자연으로부터든 주고 받는 지식 내용의 거래행위없이
전격 깨우침을 얻기는 심히 어려운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일자무식 혜능 역시 홍인 문하에 들어가서라야,
전법전수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게 지혜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고간에 실질내용 또는 관계형식의 거래행위가 있었음이니,
그 알맹이를 지식이라고 하여도 가하고, 지혜라고 하여도 가하다고 생각한다.
즉 경서도 지식이요, 스승의 말없는 가르침도 지식이라면 지식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거꾸로 이들을 지혜라고 바꾸어 부른다한들 무슨 하자가 있으리오.
요는 나는 지식이니 지혜니 하는 차별적 태도야말로 공부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지식을 지혜에 대하여 조금 변호한 감이 든다.
이는 내가 지식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흔히 지혜를 지식에 비해 우위에 두려고 하는 세인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이쪽을 특히 두드러지게 조명하였기 때문이다.
신성대란 분이 쓴 다음 구절을 나는 챙겨두고 있다.
(©데일리안 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id=91588&page=1&listpage=/news/n_list.html?kind=mno&keys=3832)
구전심수(口傳心授)이든, 신전(身傳), 업전(業傳)이든 또는 서전(書傳)이든
그 요체를 굳이 지식이니 지혜니 하며 나누며 위계를 매기는 태도가 나는 마땅치 않다.
... 그 가운데 익어 어느 날 깨달음이 오는 것임이니 ...
지식이니 지혜니 이리 번거로이 나누는 것이야말로 한가로운 미망이 아닐까 ?
한줌 되지도 않는 지식, 지혜에 우쭐대는 처지면서 말이다.
***
지식이나 지혜는 식혜쌍수(識慧雙修), 쌍수쌍전(雙修雙全)의 관계가 아닐까 ?
보거상의(輔車相依)처럼 양자는 의지함으로서 함께 가는 것임이랴.
꽃 홀로 피지 못한다.
거기 화탁(花托)이 있어야 온전해진다.
샘물도 고이지 않았는데, 샘물을 퍼갈 수 있는가 ?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죽을 때까지 닦아야 한다.”
찻종지만하게 괸 지식 가지고 감히 지식 무용론을 편다든가,
지혜 닦음을 게을리 할 수는 없는 것임이다.
돈수(頓修)야 말로 역설적인 점수(漸修)를 이름이 아닐까 ?
쥐뿔도 없는 주제에 깨달음을 얻었다느니,
명상이 어떻다, 도가 어떻다하고 뽐내는 땡초들을 경책하는 가르침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야말로 준엄한 각오와 대신(大信)을
불러 일으키는 격문이자, 대분(大憤)을 불질러 일떠우는 채찍이 아니겠는가.
돈수(頓修)의 각오하에 거치는 그 과정 자체가 점수(漸修)의 이력을 이루고,
점수(漸修)의 겸허함이 곧 돈수(頓修)의 투지를 보임하는 관계라면,
이 양자는 논쟁대립이 아니라 실천행위로서 한데 통합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이 때 대신(大信)은 곧 대지(大智)가 된다.
***
끝으로 지금까지의 의론들을 마감하는 의미에서
점심(點心)얘기를 소개하며 마치고자 한다.
덕산 스님은 금강경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어 별명을 주금강(周金剛)이라고 하였는데 항상 금강경에 대한 연구 서적과 논문을 가득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남방에서 웬 사람이 나타나 문자를 부정하고 견성 성불(見性 成佛)을 주장하며 경전 대신에 "그대로 마음을 깨달아야 부처다."하고 큰 소리 친다기에 그 말을 꺾어 주려고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웬 소리냐. 삼천 위의와 팔만 세행을 천겁 만겁 동안 공부를 해야 성불을 할 수 있는 거지."하며 발끈하여 남방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풍주라는 지방에 이르러서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떡장수 노파가 있었습니다. 시장하던 터라 덕산 스님은 그 노보살 떡장수에게 떡을 좀 팔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노보살 떡장수가 묻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떡을 파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여쭈어 볼 게 있습니다. 스님 등 뒤에 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 이것들은 내가 평생토록 연구한 금강경에 관한 논문과 책들이지."
"그러면 제가 금강경에 대해 하나 묻겠습니다. 대답을 해 주시면 떡을 그냥 드리고, 스님께서 대답을 못하시면 우리 집에서뿐만 아니라 이 동네에서는 떡을 잡수실 수 없습니다."
"좋다. 나는 일평생을 『금강경』을 연구하였다. 그래서 금강경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어.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스님,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방금 점심(點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시렵니까?"
라고 결정적인 질문을 날렸습니다.
점심(點心)은 배고프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마음에 점을 찍는다 하는 뜻입니다. 이 물음에 주금강 덕산 스님은 답을 찾았지만 땀만 뻘뻘 흘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에서는 점심을 먹지 못하고 굶게 되었습니다. 그 때 노보살 떡장수는 다음과 같이 권했습니다.
"스님, 금강경 연구만 하지 마시고 용담(龍潭) 스님을 한 번 찾아 보시지요."
그래서 남방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용담 스님이 계시는 절을 찾아 들어 갔습니다. 노보살 떡장수에게서 혼이 났으면서도 아직도 학자적인 거만이나 아만심이 남아 있었습니다. 한 노장이 보이는데 느낌이 용담 스님 같아 일부러 들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용담 용담 하더니, 못도 안 보이고 용도 안 보인다.(潭又不見龍又不見)"
"그대가 진정 용담에 왔네."
하며 그 소리를 듣고도 용담 스님은 덕산 스님을 쾌히 받아 들였습니다.
함께 저녁 공양을 든 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뒤 밤이 깊어 덕산 스님은 객실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밖이 어두워서 덕산 스님은 용담 스님에게 촛불을 달라고 했습니다. 덕산 스님이 촛불을 들고 신발을 찾아 신으려는 순간 용담 스님이 촛불을 확 불어 꺼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주위는 칠흙같이 어두워졌고 그 순간 덕산 스님의 마음은 활연히 밝아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곧 예배를 하였습니다. 용담 스님은 덕산 스님의 근기를 다 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강력한 침 한 방을 쓴 것입니다. 지혜를 구비하고 있으면 사람 사람의 근기를 환히 뚫어보고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법입니다. 선사(禪師)들이 법을 쓰는 도리가 이렇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이 부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날 용담 스님은 대중을 모아놓고 덕산 스님의 대오(大悟)를 인정해 주면서 자신의 법맥을 이어가는 제자로 공포하였습니다. 덕산 스님은 그동안 애지중지하며 짊어지고 다니던 『금강경』에 관한 연구 서적과 논문을 법당 앞에 쌓아놓고 불을 놓아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실토를 했습니다.
"천하의 온갖 지식과 재주를 다 가졌다고 해도 하나의 터럭을 태허공(太虛空)에 던지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세상의 중요한 일을 다 안다고 해도 물 한 방울을 큰 구렁에 떨구는 것에 불과하다."
(source & copyright : http://kr.blog.yahoo.com/kwg7212/484)
덕산이 금강경을 불태운 순간 혜능의 무식쟁이 마음밭으로 되돌아온 것인가 ?
만약 주금강(周金剛)이 금강경을 애초에 읽지 못한 처지라면
이제라서 금강경을 태울 필요도 없이 혜능과 동항렬이 될런가 ?
한편, 혜능이 애초에 불경을 많이 연구하였다면,
그는 공연히 절구질로 수고할 것도 없이 그저 읽던 불경을 불질러버렸으면
전격 後덕산의 위(位)에 이르렀을 것인가 ?
당신들의 오늘날 점심(點心)은 어디에 있음인가 ?
지식인가 ?
지혜인가 ?
마음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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