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에 관하여 : 틈새 없는 쾌락이라는 환상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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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표지판)

포르노(pornography). 무게와 질감을 가진 몸뚱이들의 반복적인 움직임과,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간드러진 교성과, 오르가즘이 주는 희열에 황홀감을 감추지 못하는 듯 느슨하게 일그러진 표정과, 흰색 시트 위에 흩뿌려진 분비물의 질펀한 근접 촬영, 거기서, 뒤얽힌 육체가 현란하게 교차한다..

일단은 모든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다음처럼 질문해보면 어떨까? - 포르노가 '매혹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포르노의 어떤 점에서 즐거움을 얻을까? 약간 우회하기로 하자. 포르노라는 표현이 확장되어 사용되는 용례가 있다. 예를 들자면, 슬픈 우스갯소리로 '직장인 포르노'라고들 한다. 낮은 빈도의 야근과 회식, 인간적인 상사에 괜찮은 봉급까지 갖춰진 참으로 이상적인 조건의 직장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은 '포르노'로 불리는가? 사람들은 어떤 함의에서 하필이면 포르노라는 민망한 어휘를 선택하는가? 달리 말해, 사람들은 포르노의 어떤 특징을 중요한 부분으로 포착해 의미를 확장하는 것인가?

첫 번째는 불가능성이다. 물론 논리적 불가능성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가능하다고 다소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까닭은, 직장인 포르노를 통해 꿈꾸는 것들이 현실에서는 사실상 실현될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완벽한' 이미지를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올려놓으며 현실화 가능하리라고는 미리 전제하지 않는다(포르노라 불리는 이미지들은 학습수단이 아니다). 그런데 포르노의 핵심 요소는 바로 이 불가능성 자체이다. 불가능하지 않다면 포르노는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이 기묘한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두 번째는 갈등의 부재이다. 포르에서는 완전한 결합이 상연된다. 거기서 현실에 파다한 결여들은 제거되거나 봉합된다. 그러한 결여들이 말끔하게 마감되어 있기에 포르노는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직장인 포르노의 경우, 직장인들을 괴롭히는 전형적 요소들이 해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유토피아적 공상이다. 포르노는 어떤 도구의 사용설명서 같은 것이 아니므로 실제 행동을 목적으로 하거나 예비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도구를 사용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포르노의 목적은 교육이 아니다. 포르노에서 본 것들을 따라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순전히 부수효과일 뿐이다. 그럼에도 유토피아적 직장을 꿈꾸는 일에서 비롯되는 저 비밀스런 즐거움은 어떻게 해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공상(daydream)이라는 특수한 성격 때문이다. 추정컨대 직장인 포르노들이 직장인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기제는 공상가들이 공상하는 일로부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까닭과 동일할 것이다. 현실성과는 독립적으로, 사건들을 관념의 무대 위에 올리는 것으로도 독특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어떻게 독자나 관객이 작품에서 즐거움을 얻느냐는 미학적/인식론적 문제로 직결되므로 본 논의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럼에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포르노적인 무엇의 유희는 공상의 관념적 놀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포르노가 성적 관계의 극도로 물질적인 무게를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공상으로서 지니는 관념적 성격은 자주 간과된다. 하지만 이 점을 명확히 해야만 후에 포르노가 단순히 현실의 성생활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즉 그것이 작동하는 자체적인 문법의 독특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개의 분석에 기초하여 성적 행위를 다루는 콘텐츠로서의 포르노 그 자체로 돌아가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포르노는 기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포르노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불가능한 연출이다. 상기했다시피 이는 논리적 불가능성을 뜻하지 않는다. 포르노의 상황이 자연법칙에 위배된다든지 모순율에 어긋난다든지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포르노는 성적 관계라는 문제에서 현실에서는 거의 항상 수반되는 불운들을 제거함으로써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운들이 모조리 제거된 관계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포르노가 불가능하다고 표현되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연출되는 바의 현실성이 충분치 않고 심지어 암묵적으로는 금지된 것처럼 보여야만 포르노는 매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포르노의 선정성은 성적 해방의 이념과 친화적이지 않다. 성적 해방의 기수(旗手)로 포르노를 언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불가능성과 금지의 기반 위에서 그 간극과 결여를 상상적인 방식으로 메움으로써 포르노는 특유의 매혹을 발하기 때문이다. 만일 정말로 성적 해방이 실현된다면 포르노는 매혹의 힘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 포르노는 성적 현실에 만연한 문제들을 단숨에 봉합함으로써 매혹을 낳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문제들을 말하는 것인가? 가령, 포르노에는 발기부전도 불감증도 조루나 지루도 없다. 남성 파트너의 미숙한 움직임 때문에 다른 쪽 파트너가 겪어야 하는 고통 같은 것도 없다(오히려 포르노에서 고통은 쾌락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성기의 삽입과 삽입 후의 왕복운동은 자연스럽게, '문제' 없이 이루어진다. 배우의 반응을 과장/강조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진다. 야릇한 신음소리와 심히 달뜬 표정, 푹 젖은 땀 등이 돋보이도록 연출된다. 보라, 처음에는 관계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던 배우도 이제는 즐기고 있지 않은가,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에로틱한 관계는 가능하지 않는가, 이토록 열렬한 쾌락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 모든 설정들은 무엇을 목표하는 것일까? 반대방향에서 묻자면, 이 같은 전략적 설계를 통해 배제되고 있는 현실적 측면들은 무엇인가? 어떤 현실적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불가능성이 정립되고 있는가?

첫 번째로 실제 성적 관계에 포함되는 온갖 어려움들이 증발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이상적인) 파트너가 존재하느냐의 문제이다. 포르노는 이것을 처음부터 성취하고 시작한다. '줄거리'가 있는 포르노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와 함께든 성관계가 가능하도록 상황을 조작해낸다. 포르노는 언제나 이미 성립된 성관계만을 다룬다. 관계 진입의 실패는 그 근간에서부터 제거되어 있다. 성적 관계의 어설픔이나 지지부진함, 유예나 실패는 포르노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발기부전이나 불감증, 조루나 지루, 소위 속궁합이라 불리는 것 등의 문제들이 제거된다. 이 요소들은 애초에 포르노의 선택지 가운데 존재하지도 않는다. 삽입 실패의 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그냥 그렇게 끝난 포르노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배우의 조루로 불과 몇 분만에 막을 내리는 포르노라면 어떤가? 그렇기에 포르노가 연출하는 관계에서는 어떤 어려움도 발견되지 않는다. 상황은 매끄럽게, 굴곡 없이 진행된다. 물론 연출에 따라 파트너의 거부 등이 추가되지만 이것은 결국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한 요소로 환원된다. 결국 파트너는 성관계의 성공에 굴복하게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흥분을 지연시킬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아야 한다.

두 번째로는, 성적 관계를 순전히 육체적인 살들의 맞부딪침으로 환원함으로써 그 바깥을 비워내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 영혼과 마음, 정신 등을 중시하고 육체를 경시하는 옛 윤리관을 채택하려는 것이 아니다(반대로 이렇게 애써 강조함으로써 그 윤리관을 격하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핵심은 포르노가 채택하는 입장이 '지나치게 유물론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포르노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의 문제적 구도를, 즉 실재가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로 분열되고 하부가 상부를 결정하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은가? 포르노란 결국 ‘기-승-전-섹스’라는 우스갯소리는 사실 포르노의 본질을 탁월하게 통찰하고 있다. 어떻게 전개된 상황이든 결국 육체적 관계의 황홀함으로 용해되는데, 현실에서는 육체적 관계가 최종심급일 수 없다. 여기서 최종심급이란 근대의 실체(substance) 개념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외부적 원인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엇을 의미한다. 그리고 포르노는 마치 육체의 운동이 성적 삶의 처음이자 끝이고 전부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는 (일단 매춘을 제외한다면) 보통 연인 간의 성관계에는 온갖 요소들이 포함된다. 마주침이 필요하고 만남의 성립이 필요하며, 연애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육체적 관계는 또한 다른 요소들을 지탱하고 있다. 연인 간의 성적 교접은 사랑을 순환적으로 강화시킨다. 요컨대, 육체적 관계는 엄밀히 말해 삶 전체의 맥락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성관계란 애초에 육체적인 관계보다 넓은 개념이다. 삶이란 일종의 생태계인 셈이다. 그런데 포르노는 육체적 관계만을 떼어내어 특권화하고 삶의 모든 무게를 거기 싣는다. 거기에는 파트너와의 '사활을 다투는' 갈등들이 없다. 가령 흔히 포르노에는 후희(後戱)가 생략되는데, 이는 육체적 관계를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일상 전체의 굴곡들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과 동형의 현상이다. 군더더기는 배제될 뿐이다. 성적 흥분과 상쇄되거나 그 과장을 저해할 위험이 있는 요소들은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연애소설이 결혼 이후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것과도 유사한 이치가 아닐까?

혹자는 반문할 수 있다. 어차피 삶의 모든 측면을 다루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삶에 대한 모든 포착은 애초에 부분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포르노는 인간 인식의 한계상 어쩔 수 없이 축소된 포착이 아니다. 포르노는 의도적으로 축소한다. 상부의 명령을 핑계로 그 뒤에서 고문을 즐기는 도착적(perverted) 관료들처럼, 포르노는 이 인식론적 한계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여 성적 흥분을 감소시킬 여지가 있는 여타의 모든 요소들을 일부러 끊어낸다. 즉, 포르노는 의도적인 환원이다. 포르노 특유의 유물론은 성적 흥분을 극대화하여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추구된다. 실재의 의도적 왜곡과 편집은 포르노가 성립될 수 있는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포르노의 이념적 구호는 다음과 같다."삶은 반드시 축소되어야 한다!" 포르노가 만들어내는 '부분'은 삶 전체의 복합성을 암시하는 흔적을 정성껏 제거한 결과이다. 포르노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인 양 행세해야 한다. 포르노가 '팔리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렇듯 육체적 성관계에 대한 전략적 선택과 과장, 그리고 성적 흥분을 극대화하는 데 불필요한 것들의 생략과 결여의 봉합을 통해 포르노의 외설적 성격이 만들어진다. 이로써 포르노에 특유한 즐거움이 유도되는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포르노를 보며 자위행위를 한 결과 얻게 되는 즐거움이나 시각적/청각적 즐거움과는 상이한 종류의 것이다. 포르노는 분명 특유의 쾌락을 주지만 이 쾌락은 단순히 '더는 누수 되는 것 없는, 양적으로 충만하고 극대화된 쾌락'은 아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포르노가 주는 외설적 즐거움은 노골적 이미지에 있다고, 즉 시청자가 등장인물과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확신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의 성관계를 엿본다는 설정에서 가장 큰 흥분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포르노라는 것 자체가 엿보기의 형식을 가진다고 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엿보기 설정의 포르노는 이와 같은 (일견 보기에 동일시에 대한) '약점'을 반성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누군가가 쾌락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엿보기의 경우 쾌락은 그것이 노골적이어서 매혹적인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직접적으로 성적 관계를 즐길 수 없다는 제한이 만족감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양적으로 많은 쾌락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은 아닐 것이다. 포르노의 쾌락의 의미하는 바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포르노는 성적 흥분만을 집요하게 모아 흠 없고 매끈한 구슬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고 논의했다. 결여와 간극은 생략되거나 메워진다. 이렇게 해서 완벽한 성적 교접이 약속된 유토피아가 상연된다. 이 유토피아 세계가 내거는 슬로건은 부정(否定)의 작업들을 통해 포르노가 제공하는 공상적 즐거움을 압축한다. 슬로건은 바로 다음과 같다. "완벽한 성적 관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모든 불화와 결여는 얼마든지 채워질 수 있다!" 신기하게도 그리고 주지하듯이 포르노를 감상하는 우리는 자연스레 그 도식을 받아들여 즐기며 '학습'하는 것 같다(교보재가 아님에도 말이다).

그러나 재차 암시해왔듯이, 우리의 실제 경험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완벽한 성적 결합, 부족함 없는 성적 만족,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파트너와의 성적 만남은 불가능하다(우리는 드디어 포르노의 ‘불가능성’에 대한 정리된 입장을 만나게 된다). 육체적 교접에 국한해서든, 그 이상의 수준에서든 말이다.

그렇다면 포르노는 성적 관계의 필연적 어려움을, 나아가서는 완벽하게 조화된 관계의 근원적 불가능성을 암암리에 은폐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은폐함으로써 유발되는 효과야말로 포르노가 제공하는 외설적 즐거움의 핵심이다. 황홀하게 연출된 육체의 반복적 마찰과 교차 속에서, 포르노는 완성된, 완벽한, 결여 없는 성적 관계가 가능하다고 속삭인다. 그렇기에 포르노는 유토피아의 ‘약속’이다. 포르노가 약속하는 것은 바로 틈새 없는 쾌락이라는 환상인 것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작중 인물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사랑의 기원에 관한 신화적 설명을 제시한다. 우리의 맥락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는 매우 주목함직한데, 사랑을 그 기원에 있는 '완벽한 조화의 상태'를 되찾으려는 시도로 해석하는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마침내 언제나 바라왔던 것을 찾아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로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일이지요. 그리하여 두 사람으로부터 한 사람이 탄생합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왜냐하면, 제가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본성상 완전한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완전함에 대한 추구이자 완성되고자 하는 욕망인 것이지요."(192e~193a)

기원에 대한 모든 설명들은 전도시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기원은 본래 신화적이다. 기원에 대한 적극적 주장은 언제나 기원으로부터 한참 후에, 특정한 이념이나 전제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는 사랑과 더불어 성의 문제를 도입하며 그 목표에 두 사람 사이의 완전성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니, 사실 완전성이 목표라면 문제는 되지 않는다. 문제의 요점은 완전성이 기원에 위치하여 인간의 본성이고 당연히 성취될 수 있으며 또한 성취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포르노는 어떤 점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를 극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완벽한 성적 관계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실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비틀어야만 했다. 오히려 실재는 균열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상 불화와 갈등은 결코 근절될 수 없다. 사랑이란 오히려 그 모든 균열들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견디며 함께 나아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같은 균열에 사랑과 포르노는 상이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포르노는 사랑의 패러디이자 아류이며 환상적 대리충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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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ngjjangman 태그 사용시 댓글을 남깁니다.)
호출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조금만 일찍 읽을걸. 벌써 페이 아웃이 되었네용 :D

사랑이란 오히려 그 모든 균열들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견디며 함께 나아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든 균열들'이 여기저기 나타날 땐 사랑의 몇 곱절은 고통스러운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팔로우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균열을 안고 가는 사랑이라는 게 무작정 이상향일 수는 없고, 균열을 다루는 '기술'이 참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이건 저는 연륜이 짧아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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