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09 강원도 정선군 고한, 사북, 태백에서 <침묵의 뿌리>와 더불어

in #kr-travel7 years ago (edited)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어느 순간 누군가가 말했다. “넌 천 개의 베개를 가졌어.” 그 문장이 시참(詩讖)이 되어 나로 하여금 길 위에서 숱한 밤을 보내게 했던 것일까? 참 많은 곳에서 잠들곤 했더랬다.

봄날의 호숫가에 침낭을 펴고 누워 잠든 적도 있고, 야간열차 우편물 화차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잠든 적도 있고, 사막 한 가운데서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잠든 적도 있고, 바다를 향해뻗은  방파제 위에 차를 세우고 파도에 내 영혼을 싣고 밤새 대양을 떠다니기도.

‘천 개의 베개’ 운운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천 개의 베개를 채우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같은 장소를 굳이 다시 찾아가서 잠든 경우는 드물었다. 아니, 딱 한 군데 싸리재를 제외하면.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싸리재는 오르는 방향에 따라 두문동재라고도 하는데 태백~고한간 국도 38번이 지나가는 고갯길이다. 아니, 옛 국도 38번이 지나가는 고갯길이다. 태백~고한간 두문동재터널이 뚫리면서 해발 1,268미터 싸리재를 넘어가던 옛 국도는 폐도가 되었고, 그로 인해 싸리재는 이제 백두대간을 넘나들거나 함백산을 오르내리는 등반객들이나 오가는 길이 되었다. 하긴 연탄 소비량의 감소로 석탄 채광산업의 몰락으로 이미 이 길은 이미 한적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나는 여러 시간대에 걸쳐 여러 가지 이유로 서울에서 싸리재까지 오가곤 했다. 국도가 지나가던 가장 높은 고갯마루에서 마주하는 어둠은 나만의 동굴이었다. 돌담불 위로 초승달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차량 실내등을 켜고 흑맥주를 마시며(왠지 그곳에 가면 검고 씁쓸한 맥주가 먹고 싶어졌다) 책을 읽거나, 기억 속의 책을 떠올리곤 했다, 김하돈의 <고개를 찾아서>로부터 조세희의 <침묵의 뿌리>에 이르기까지.    

내가 싸리재를 알게 된 것은 작가 김하돈 덕분이지만 그보다 먼저 국도 38번이 지나가는 태백, 고한, 사북지역의 탄광촌으로 나를 이끌었던 것은 조세희였으며, 사북이란 지명을 알게 해준 것은 고교시절 L선배였다. 나는 그가 쓴 <어둠 소리>라는 시를 좋아했었다.

    
모든 잘, 잘못

하늘 깊고 땅 얕은 탓이거늘

거친 땅 걸어온 길부르튼 발바닥을 지닌 그대

그림자 나마 쓸쓸히 보아 주렴

(중략)

그 오월, 온 천지에 뿌린 그  피

영원한 자, 영원하지 않은 자

그건 또 뉘 그어놓은 선인가

우리들 슬픔하늘 깊고 땅 얕은 탓

우리가 던진 돌멩이가 억만 겁 쌓일 때

나는 

겨울의 어둠소리를 듣는다 

그때 내가 고교 1학년, 그는 3학년. 졸업하는 그에게 고교시절 3년 동안 읽은 책들 중 가장 인상적인 책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조세희의 <침묵의 뿌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저자 조세희는 이미 알고 있던 이름이지만 <침묵의 뿌리>란 제목은 낯설었다. 그가 쓴 작품 중에서 그런 제목의 소설이 있었던가?

곧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고 서점에서 그 책을 찾아보았다. 절판되었는지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나는 시립도서관을 뒤져 <침묵의 뿌리>를 캐낼 수 있었다. 사진-산문집. 표지를 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전율했다. 무심한 듯 처연한 소녀의 흑백 사진.  

<침묵의 뿌리>를 읽고 나자 강원도 탄광촌이 가고 싶었고,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을 보고 나자 태백, 고한, 사북에 대한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치 그곳이 내가 태어난 고향이기나 한 것처럼. 

결국 나는 태풍이 이 땅을 지나가던 어느 여름 사북으로 갔다. 만 열 여섯의 소년이 시립 도서관에서 처음 사북을 만난 날 잿빛 탄가루가 소년의 머리칼 위로 쌓였고, 책갈피를 넘기는 동안 소년의 심장도 잿빛 풍경처럼 새카맣게 변했으며, 소년이 청년이 되는 동안  끊임없이 콜록거려야 했으며, 청년이 되자 콜록거리게 만든 진원지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1992년 이 땅을 지나간 태풍의 이름은 재니스, 나는 삼척, 태백, 고한을 거쳐 처음으로 사북엘 갔다.   그 후 사북은 KBS 드라마 <에덴의 동쪽>을 비롯해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이 되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 1962년 광산지역개발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한 사북읍의 역사는 해방 이후 한국사의 축약판 같다, ‘산업역군’과 ‘카지노’로 집약되는. 

2004년 또 다시 사북을 찾았다. 읍을 관통하는 개천가에는 <정든님>이란 이름의 술집이 있었다. 폐가였다. <침묵의 뿌리>의 표지, 처연한 눈빛의 소녀를 보았을 때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스카라가 번진 여자의 검은 눈물자욱 같은 건물이었다. 

문득 ‘우리가 버려두고 돌보지 않은 것’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류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절의 희망, 열정 같은 것들. <정든님>의 문을 활짝 열면 광장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던 옛 친구들이 '왜 이제야 돌아왔느냐!'며 반겨줄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사북을 찾았을 때 <정든님>은 재건축을 하느라 사라지고 없었다, 2009년 서울 용산 <남일당>에서 죽어간 사람들처럼. 

글/사진 @roadpheromone 로드 페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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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마음이 따스해 옵니다 감사합니다.

@dreamer777님이 따뜻한 사람이라서 그래요 ^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보팅하고 팔로우 합니다.~^^

반갑습니다 @jinbok 님 스팀의 바다에서 고래로 성장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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