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싸운다는 것

in #kr-science7 years ago

가끔 나를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너도 나도 곧 죽는다. 그게 언제인지 모를 뿐이다. 죽음은 인생의 의미를 만든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종교를 만들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공평함으로 우리 사이에 언제나 있다.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의 본능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릴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죽음은 인생의 의미를 만들고, 인간은 그 의미를 따라 삶을 살 때에야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그 의미가 무엇이던 상관 없다면 세상은 진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무제한적으로 발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이는 데서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네 인생의 의미를 존중한다고 말할 수 없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이 기본적인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자와 같은 수천년전 성인들의 황금율에도 나타난다. "네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己所不欲勿施於人"의 형태다. 이 언명은 인간의 본성, 즉 인간됨의 기저를 신뢰한다는 전제가 깔려야 성립된다. 만일 내가 살인을 욕망한다면 타인을 죽여도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위계질서나 권위주의가 없이도 인간은 사회를 이루어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는 신념이다. 아나키즘을 개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로 분류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인간은 사회를 이루어 살아야 한다는 점을 기본으로 전제한다. 사회는 각 개인의 위에 존재하지 않지만, 개개인은 사회를 구성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 두 이념은 언제나 부딪혀왔다.

삶의 의미의 기저에 사회가 있다. 따라서 누구나 죽기 때문에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은 사회와 연결되어 고민되어야 한다. 그 의미를 찾는 과정은 평화롭지 않다. 세상은 아나키스트로만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다. 그 싸움의 과정을 개인화해서도 지나치게 사회화해서도 안된다. 싸움이 개인화되면 이기적 욕망이 그 싸움에 개입해, 싸움의 목적이 개인의 입신양명으로 귀결된다. 싸움이 지나치게 사회화되어도 지나친 거대담론이 등장해 주변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건 마찬가지다. 아나키스트들은 그 해답을 지역공동체에서 찾았다. 나를 둘러싼 가족, 혈연이라는 생물학적 연결체인 가족 바로 위의 공동체, 그것이 지역공동체다. 바로 거기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 된다.

싸움이 거칠어지면, 누군가는 말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해치지 말라고. 거대한 권력을 상대할 때, 부패한 조직의 비리를 고발할 때, 평화를 사랑하는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거기에도 사람이 산다고. 그러니 적당히 하라고. 인간이 현실적으로 변하는 건, 바로 그런 주위의 언명에 노출되면서다. 사람을 상대할 수록, 비판의 칼은 무뎌진다. 그렇다고 사람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싸움은 그렇게 힘들다.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서 주인공 아버지는 섬으로 피하면서 딸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비겁한 어른은 되지마.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되새기며 사는 말이다. 권력을 상대하면 할 수록 외로워진다. 고독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이해해주는 사람은 있다. 아나키스트는 그렇게 싸워야 한다. 사람을 믿으면서,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삶의 의미로 상쇄하는 싸움이다. 그것이 아나키스트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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