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나이스 컷

in #kr-poem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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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로데오거리. 나이스 커트 유리문을 밀었다.

‘셀프 샴푸실’이란 팻말은 처음이다. 머리를 감겨주지 않는다는 공표다. 50즈음으로 보이는 원장과는 생면부지. 앞머리는 앞으로 뒷머리는 뒤로 넘긴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앞뒤로 바글바글 파마다.

예약한 시간을 말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새 어떻게 무슨 견적을 냈던지 그녀가 가위를 들었다. 상한 머리 좀 치고요, 옆머리도 쳐낼 겁니다. 하고 말한 직후였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하고 그녀는 묻지 않았다. 본인의 주관 없이 고객의 주문을 우선하는 여타의 미용사와는 판이하다.

내 머리카락은 거듭되는 파마와 염색으로 상할 대로 상해 옥수수수염을 떠올리는 수준이었다. 커트머리도 단발도 아닌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꼴은 스스로 외출 불가를 선언하고 두문불출할 정도였다. 어떤 형태의 머리든 지금보다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 나는 잠자코 눈을 감았다. 우리는 미용공부보다 먼저 관상을 공부합니다. 어떤 두상에 어떤 머리가 어울리는지를 공부하지요. 가위질을 시작하면서 그녀가 말했다.

앞으로 파마는 금지입니다. 아주그냥 신생아 머리카락이잖아요……… . 대꾸할 말이 없어 못들은 척한다.

귀를 덮은 옆머리에서 쓱싹거리는 가위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이렇게 상한 머리로는 아무 스타일도 안 나와요.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새 앞머리를 싹둑거리고 있다. 나는 착한 어린이처럼 얌전히 앉아 있다. 그녀의 설명과 행위에 대들거나 반박할 뾰족한 의견이나 똑 부러지는 취향도 갖지 못한 터였다. 싫든 좋든 동의할 수밖에 없다. 쓰윽싹 쓰윽싹…… 목덜미쯤 해서는 거침없는 풀 베는 소리다. 이윽고 나는 불안해지지 시작했다. 엎지른 물이었다.

감았던 눈을 뜬다. 쇼크다. 짝 달라붙은 쇼트커트. 얼굴은 더 크게 광대는 더 불거져 보인다. 거울 속 인물은 성별 인식불가다. 고객님, 속상하면 6개월간 저 만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오늘은 고객님보다 나이 적은 친구를 만나세요. 승률은 8;2 내가 이깁니다. 원장의 말은 단호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모처럼 그녀의 커트 본능만을 충동질 하고 돌아선 기분이었다. 점심 약속한 친구에게 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해 갑자기 볼 일이 생겼어. 다시 연락할게……. 화장실로 갔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 좋게 보려 애를 써도 난감 또 난감하다.

잠시 후 가영(둘째 딸) 이 차를 갖고 왔다. 차가 멈추기도 전에 차창을 열고 그 애는 소리쳤다. 엄마아아 ! 괜찮네에에, 괜찮아요 괜찮아요……. 믿지 않았다. 그 애가 싣고 가는대로 따라가 기장 어디쯤에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왔다.

나 어떡해……, 현관문을 열면서 그(남편)에게 하소연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명료 냉정했다. 그 모양으로 자를 동안 니는 어디 갔다 왔노? 그날 밤. 모자를 사러 가까운 쇼핑센터를 헤매고 다녔다.

주말에 큰 딸아이가 애기들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제어미 몰골을 한눈으로 보고는 악! 소리부터 질렀다.

누우우가 노인의 머리를 이 지경으로……. 망연자실이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상견례 자리. 고민이 깊다. 선머슴 같은 헤어스타일이 적잖은 걱정거리였다. 모자를 덮어도 그렇고 스카프로 감싸기도 그렇다. 자꾸 보니 괜찮네요. 커트는 굉장히 세련되었네……. 큰딸아이의 위로가 시작되었다.

점잖기 그지없는 초면의 예비 사돈부부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않았다. 아무도 내 머리 얘기를 들먹이지 않는데 고개를 들 수 없다. 방석에 붙어있는 바늘이 문제다. 엉덩이를 찌른다. 녹차 물에 밥 말아 먹는 보리굴비 맛도 물 건너갔다. 그 헤어엔 빨간 립스틱 하나면 끝나요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히 사는 거예요. 원장의 목소리가 귀 끝에 달랑거렸다. 자신감은커녕 목소리조차 기어든다. 하기야! 기왕에 자른 머리 어쩔 텐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아니했던가. 도리가 없다면 뱃심 좋게 당당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나? 내 머리 스타일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난하고 손가락질이라도 할 정도의 관심 있는 인간이 있기는 있단 말인가? 천만에…… 하고 생각한 건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였다.

한 달 후. 머리는 1cm 가량 자랐다. 그와 큰 딸아이가 ‘좋아요’ 쪽으로 돌아섰다. 친구들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어쩌다 그랬어그래. 얼른 길러야 되겠다…… 나이는 어쩔 수 없네…… 각각 다른 장소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 해댄 친구가 둘. 다른 친구들은 하나같이 원장 손을 들어줬다. 먼저 머리보다 훨씬 좋아, 열 살은 젊게 보여, 과감하게 정말 잘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다음에 원장한테 오렌지 쥬스라도 한병 사들고 가라고 부추기는 친구까지 있었다. 좋다좋다 해주니 내 눈길에도 내 머리 스타일이 익숙해져갔다. 프리렌서 디자이너 같아요 엄마, 앞으로 그 스타일 쭉……! 엄지를 치켜세운 아들의 말은 최고의 찬사였다. 8;2. 원장의 완벽한 승리다. 나이스 컷 예약번호가 불티나게 친구들 폰으로 넘어갔다.

웃자고 써본 글이다. 웃고 보니 씁쓸하다. 꼼짝 못하고 당한 이야기 아닌가. 타인의 결정을 고스란히 믿고 따른 결과에 울다 웃었다. 본디의 나는 어디로 갔나. 삶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지만 단호하지 못한 나는 곧잘 불리하다. 지금껏 성공이랄 것도 큰 실수랄 것도 없이 살아왔지만 고정된 내적 성향 탓에 주저하다가 날아간 기회도 부지기수다. 지나친 진지함도 병이라면 병. 짜장면이 먹고 싶어 들어간 식당에서는 짬뽕을 주문하기 일쑤다. 우유부단한 성격 제대로 타고났다. 따지고 보면 내가 바로 결정 장애자, 유전자를 바꾸기 전엔 참말이지 대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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