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심장] 3화 - 기회

in #kr-pen7 years ago (edited)

햇살이 뜨겁다.
'어디서 햇볕이 들어오는 거지? 기분은 또 왜 이런 거지?'
왠지 무슨일이 나도 모르게 벌어져 있다는 찜찜한 기분이 든다.

이제 남은 후반기 리그의 몇 경기. 그 시간이 나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충격에
맥주를 연거푸 들이킨 것 같다. 아니 확실하다. 맥주를 마셨다.

술을 먹은 적은 있었다. 내가 원했던 서울 스카이 팀에 스카웃된 기념으로
파티가 벌어졌었다. 계약금 5억. 고교 최대어.
나를 위한 수식어들이 신문 1면에 실리던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그 때.

첫 건배 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맥주를 들고선
그 동안 감사했다고, 가서 잘해내겠다는 다짐을 외치고 들이켰다.
그리고 바로 쓰러졌다. 놀란 친구의 눈을 본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일어나보니 친구 집 침대 위였다.
그 뒤로는 아무리 기뿐 일이 생겨도(거의 없었지만)
슬픔에 잠겨도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오늘은 침대 위에서 햇살을 받고 누어있다.
머리가 띵하다. 당연히 맥주를 마신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힘들게 일어나 물을 마셨다.
내 모든 행동들이 x0.5 정도의 느림 Play로 재생되고 있는 듯 하다.
지금 내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다른 누가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따뜻한 물에 오래도록 샤워를 했다.
정신을 좀 차려야 할 것 같다. 이미 계획된 스케줄이 늦어져 마음이 무거워진다.
샤워를 마치고 몸을 닦았다.
그런데 오른손에 빨간 자국이 보였다. 두 줄로 선명하게.
이상한 일이다. 야구공의 실밥의 형태는 분명 아닌데.. 무슨 자국일까?

당연한 것이지만 투수에게 손은 생명과도 같다.
항상 다치지 않게 조심해 왔다.
어떤 훈련을 하더라도 손은 안전하게 보호했다.
나의 그런 면은 몸 관리에 완벽한 어느 에이스 못지 않았다.
신경이 쓰여 정훈에게 전화를 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듯 오랫동안 신호가 걸린 뒤에야 연결이 되었다.

"훈아 나야."
"어..혁이냐?"
"자는 걸 깨웠나보네?"
"어..모처럼 쉬는 날이잖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게.. 일단 많이 속상했지? 내가 괜한 말을 한 거 같아..
우리 대화는 기억나는 거지?”
"응 그것까지는 기억하고. 뭐.. 괜찮아~"
"그래.. 맥주를 니가 들이키더니 바로 그 자리에 쓰러졌어.
이제야 기억나네.. 니가 술을 먹고 쓰러진 적이 한번 더 있었다는 것을 말이야.
오래 전일이니 뭐 나도 쉽게 기억하지 못했어. 말렸어야 하는 건데.
근데 정말 빨리 쓰러져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어."
"아.. 미안하네"
"괜찮아 그저 건장한 남자를 업고 택시를 타고, 죽을 힘으로 집에 데려다 논 것뿐이니까.
여자한번 못 업어 봤는데.. 남자를 업고 다니다니..씁슬하다 야"

"그냥 쓰러지기만 한 거지 정말?"
"그럼?"
"뭐.. 일어나기 싫다고 완력을 행사하거나, 너랑 몸싸움을 했다던지, 그런 거."
"전혀그런일은 없었어~"
"어쨌든 미안해."
"신경 쓰지 마. 그럴 수도 있지. 난 괜찮아. 오늘 오후에 출근할건데 유연성 훈련이나 하자.
오늘 1군 후반기 개막일이라 너만 케어할 수 있으니까. 준비하고 나와."
"그래. 이따 보자."

손에 난 자국이 신경이 쓰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밧줄을 힘껏 쥔 자국처럼 보이기도
하고.. '쓰러졌다 일어나서 밧줄로 쉐도우 피칭이라도 한 건가?'
뭐..기억나지 않음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냥 넘어가자.

아무렇지 않게 곡물 빵과 토마토주스를 먹고, 비타민과 단백질 보충 제를 먹었다.
머리를 간단히 말리고 땀 흡수가 잘되는 트레이닝 복을 입고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좋은 성적을 내서 기회를 살려야 한다.
내 고마움이 친구의 보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트레이닝 복과 오더글러브, 스파이크, 트레이닝슈즈를 챙겨 넣은 가방을 들고,
집 앞에 주차된 차의 트렁크를 열어 짐을 넣었다.
평소엔 자전거로 출근하지만, 자전거는 훈련장에 그대로 있어 어쩔 수 없이 차로 가야 했다.
트렁크에 가방을 넣는 순간 뭔가 거슬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 차 왼쪽 뒷 타이어가 주차 선을 밟고 있었다?
  2. 트렁크에 흙이 군데군데 보였다?
  3. 트렁크에 있어야 할 훈련용 밧줄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 평소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들이다.
아주 깔끔히 정돈되어 있는 내 삶에 무언가 침입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긋나있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물건이든 계획이든 흐트러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심장이 심하게 요동친다. 쓰러진 후의 일들이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
그렇지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가방을 도로 꺼내 어깨에 메고 트렁크를 닫았다.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꼈다.
훈련장 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햇볕은 침대에서 느꼈던 것보다 뜨거웠다.
머리를 식히고 잡생각을 지우기에는 몸을 혹사시키는 게 제일 좋다.

한결 가뿐해지는 좋은 느낌으로 훈련장에 들어가 옷을 벗고 물로 간단히 땀을 씻어냈다.
옷을 갈아입고 유연성 트레이닝 방으로 갔다.
정훈이는 아직이다.

소파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역시나 다시 떠오른다.
주차 선을 밟고 있는 내차. 흙. 없어진 밧줄.
다행히 자꾸 떠오르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 뭍일 뻔한
나를 2군 감독이 구해주었다 .

"우혁 여기 있었군?"
"아 안녕하세요? 오늘 나오셨군요?"
"그래 우리 팀도 반등이 필요한 시점이야. 후반기에는 치고 올라가야 해. 준비할게 많아.
자네도 그 대상이지. 1군 콜 업이야. 지금 바로 1군에 합류해. "
"네? 지금요? 1군에서 누가 말소됐나요?"
"미스터 한."
"유한 선배요?"

김유한. 명실상부 우리구단 최고의 에이스이자. 전국구 최고 인기투수.
1군콜업을 예상은 했지만, 유한선배 대신이라는 말에 좀 충격을 받았다.
전반기 7승에 방어율 2.12. 올스타 최다득표. 올스타전 2이닝 무실점.
올스타 전에 홈런 2개 친 데이비스가 아니었다면 MVP도 노려볼 만 했다.
유한선배는 팀의 1선발로서 당연히 첫 경기에 선발로 내정되어 있었다.
도저히 2군으로 말소될 만한 상황은 전혀 없다.

"혹시 선배가 부상당한 건가요?"
"아니. 그게 말이지..잠적."
"네?"
"사라졌어. 연락두절이야. 당장 내일 경기 전에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어.
자네는 신경 쓰지 말고 1군에 합류할 준비나 해. 바로 실전에 투입될 수 있어."

선배가 사라지다니..대체 어디로?
스타이지만 몸 관리에 철저해 후배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선배였다.
무뚝뚝하고 예민한 성격 탓에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했지만,
나에게 심리적인 부분만 중점적으로 준비하라고 충고도 해주었다.

"우혁. 너는 가슴이 문제야."

어쨌든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구단 차량을 통해 1군 구장으로 바로 합류했다.
투수코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펜 20구. 준비해."

불펜에는 백업포수 두 명과 롱 릴리프 역할을 하는 성진 선배가 있었다.

"지금 상황이 좀 급하게 돌아가고 있어. 우혁이가 내일 경기에 선발투수야.
성진! 혁이가 흔들리면 바로 투입될 거야. 몸 적당히 풀고 휴식해."

불펜 투구를 준비 하는 동안 1군 감독도 찾아왔다.
20구를 던졌다. 연신 좋아!. 파이팅!을 외쳐대는 백업포수의 구호가 기분이 좋다.
한결 몸이 가벼운 상태여서 더 잘되는 느낌이다. 평소보다 더 좋은 느낌.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이는군. 몸을 잘 만들었어. 이렇게만 해. 부담 가지지 말고."
감독의 칭찬까지..뭔가 잘될 것 같다. 이번엔.

어제 술을 먹고 깊게 잔 것 같다. 나른하거나 잠이 부족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불펜 투구를 했을 때 좋은 느낌, 기분 좋은 예감이 그대로 이어질 것 같다.
드디어 등판이다. 내가 선발로 올라간다!


강심장 1화 https://steemit.com/fiction/@kyungduck/1
강심장 2화 https://steemit.com/fiction/@kyungduc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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