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enough history

in #kr-hero5 years ago

영국의 소아정신과 전문의이었다 후에 정신분석가가 된 도널드 위니캇은 대상관계이론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꼽는 인물이다.

위니캇의 유명한 개념 중 가장 유명한 개념이 바로 Good enough mother이다. 그럭저럭 괜챦은 엄마 라는 의미인데, 아기가 출생한 후

엄마가 그 아기를 사랑하되 서서히 독립할 준비를 시켜주는 엄마를 의미한다.

Good enough mother와 반대되는 개념은 perfect mother 이다. 즉 아기를 너무 사랑하여 완벽한 엄마가 되려는 엄마야말로 아기가

감당할 수 없는 Bad mother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완벽이 아기를 위한 듯 하나 사실은 엄마 자신의 완벽하려고 하는 자기애적 성향이

드러난 육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완벽주의 양육은 과잉보호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자란 아이는 현실 인식이 부족하고 공감 능력도

떨어지며 나중에는 반사회성 성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Good enough mother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 중 정신분석에서 활발하게 강의와 저술을 하신 교수 중 홍준기 교수라는 분이 있다. 홍교수는 최근에 라캉에서 비온과

클라인 정신분석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홍교수는 왜 Good enough mother만 말하느냐고 역설한 적이 있다.

쉽게 말하면..아기가 불행한 건 엄마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엄마가 불행한 건 그 엄마가 속한 가족관계에 불행함이 있었을 것이며, 그 엄마가

속한 가족관계가 불행했다면 가족 자체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그 엄마와 가족이 속한 사회제도가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사회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 사회제도를 움직여나가는 그 당시의 정부(government)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홍교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시절 Good enough mother였겠지만 이제는 Good enough government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매우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이다.

나는 박정희 시대 때 태어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과 박근혜 그리고 지금의 문재인 정부에서 살아가고 있다.

과연 그들은 Good enough government를 만들어 가려고 했을까? 그것은 분명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 믿는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슬프게도 Good enough history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난 5천 년 역사는 기쁠 일도 잠시

있었지만 너무나 아프게 5천년을 살아온 역사이다. 그 아픔 중 일본과의 적대적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진이 많아서인지 불안도가 높은 나라이다. 화산위에 만들어진 나라가 일본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일까..만만한 게 한국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무의식적으로 보면) 역사적으로 살기위해 한국을 침략한 적이 많았다.

문제는 외교력을 동원해 우리나라에 이러저러한 도움을 구했다면 마음 고운 우리 민족이 그런 요구들 거절하였겠는가.

그들은 오로지 힘으로 약한 나라를 짋밟고 자기들만의 태양의 제국을 이루려고 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군부 외에는 죽여도 그만이고 강간해도

그만이고 외국 사람들 끌어와 강제 노동시켜도 아무런 가책이 없었다. 그들에게 자기들 외에는 물건 이상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 강한 자 앞에서는 굽신댄다. 그들의 논리는 철저하다. 강자 앞에서는 고개 숙이고 약자 앞에서는 고개를 쳐든다. 약육강식(弱肉強食)이다.

그런 정신구조를 갖고 살아온 사람들이 대다수 일본 정치인들이었고 군부에 있는 자들이었다.

1970년 12월7일 아침 7시 폴란드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의 유대인 위령탑. 초겨울 비가 눈물처럼 위령탑을 적셨다.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그 앞에 섰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맞서 28일간 봉기했다가 5만6000여명이 참살당한 일을 기리는 탑이다. 잠시 고개를 숙인 브란트가 뒤로 물러섰다. 의례적 참배가 끝났다고 여긴 일부 기자들도 따라 몸을 뺐다. 그때 브란트가 위령탑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듯이 터졌다. 브란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독이 폴란드와 관계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조약을 맺는 날 아침, 브란트는 나치 독일의 잘못을 온몸으로 사죄한 것이다.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수상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는 말했다.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 그 뒤 폴란드인은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을 만들어,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을 담은 기념비를 세웠다. 사죄와 용서와 화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늘 저 사진 한 장을 기억한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얼굴을 보라. 저 얼굴이 퍼포먼스로 보이는가..

그런 걸 보면 우리는 너무나 이웃이 나빴다. 나는 우리나라가 유럽 어딘가에 있었더라면 우리의 국민성도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지정학적으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 참 슬프고 고되다. 가장 가깝다는 외국이 일본인데 남의 나라에 그토록 가학적이었음에도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없다. 그저 "유감" 이라나..사람 죽여놓고 유감입니다..

그리고 일본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던 친일파 후손들은 지금 우리나라 모든 곳곳에서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마음껏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이미 지난 역사는 이제 정리하자. 그리고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가 되자.

누군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살해하고 내 아버지 어머니를 망가 뜨리고 형제 자매들을 죽였는데 나는 그런 피해없으니 같은 또래의

가해자 후손이 이제 잘 지내자 미래지향적으로! 그러면 미래지향적으로 그 고통스러운 과거가 사라지겠나?

독일은 매년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한다. 왜 그럴까?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과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인정할지 안할지 모르지만 기독교라는 종교가 전제되어 있다. 종교는 그 나라 그 민족에 강력한 영향을 주는 가치이니

말이다.

일본에 기독교적 가치가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민족이 우선이고 천황이 우선이며 자기들의 안전이 우선인 나라다.

하나님? 양심?..그런 가치가 자기들이 추구하는 가치 이상으로 높아지지 않는다.

통일이 언제 될지 그게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의 슬픈 역사가 아니라 우리만의 Good enough history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Good enough government도 가능하고 Good enough mother도 생겨날 것이다.

전세계에 200개 이상의 나라가 있다고 한다. 그 많은 나라들 중 하필 분단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우연이라 보는가.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면 일본인답게 살아야하고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면 한국인답게 살아야 한다. 그 "답게"는 민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같은 인간으로서 공유되어야 할 가치인 공감과 인권, 그리고 양심이라는 보편가치를 전제한다.

과연 일본정치인들에게 그리고 우경화된 자들에게 그런 공감과 인권의식과 양심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원숭이가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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