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minism] 가스라이팅
가스라이팅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여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
가장 강력한 예시는 성범죄를 당한 여성에게 향한 남성들의 의심.
"그건 성추행이라고 보기엔 좀 그렇지 않아?"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한 것 같은데."
(= 얘 좀 오버하네.)
"그런 식이면 ~한 것도 다 범죄겠네?"
가스라이팅이 꼭 여남 사이에서 혹은 성범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권력과 통제에 있다. 권력은 갑의 의도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권력관계, 위 아래가 있는 관계라면 불가피하게 발현된다.
사내 단톡방에서 "네"라고 보낼지 "넵!"이라고 보낼지 망설이는 그 순간, 당신이 왜 고민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답장을 받는 상대가 상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조차도 통제를 갖는다.
살면서 가스라이팅을 단 한 번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텐데, 여성은 특히 그럴 것이다. 일생에서 성범죄를 단 한 번도 당하지 않은 여성은 없거든. 여성에게 그 어떤 권력이 주어진다 한들 젠더권력은 작용한다. 예시를 들라하면 인류의 역사를 들겠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신들도 알 테니까 말이다.
가스라이팅에 대해 생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비교적 최근 사건인데, 약 2~3달 전 쯤의 일이었을 것이다. 개인 SNS에서 여러 글을 쓰면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었는데 그 중 30대 초중반의 남성이 있었다. 그의 언어는 상당히 감각적이었고 또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런걸 좋아한다. 그런 사람과 어울리고 여러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걸 즐긴다. 혹시나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적는 거지만, 좋아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좋다는 의미이지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런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졌었다. 새벽에 전화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와의 대화는 뮤지컬 같았다. 현실세계와는 동떨어져 있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이 된 것 같았다.
섹스와 연애, 배움, 삶, 가족, 과거, 수 없이 많은 주제로 한 번의 통화에 2-3시간 이상을 쏟았다. 그만큼 그와의 시간은 내게 굉장히 즐겁고 중요했다.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몇 달 전 쯤에 웹하드 카르텔이 터졌을 때 일이다. 불법촬영 범죄와 그것을 소비하는 남성들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을 때 그가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폰허브인지 뭐시기인지, 사이트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는 한 포르노 사이트를 언급하면서 나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다.
그 통화 내역 녹음본도 있었는데 지금은 지워져서 정확한 대화 내용을 적을 순 없지만 그는 확실하게 가스라이팅을 시도하고 있었다.
"야동을 안 보면서도 자위를 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건 마치.. 맛 없는 라면을 먹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내가 당시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의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게 여성들이랑 무슨 상관이죠? 남성의 자위를 위해서 여성이 성적으로 소비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성은님, 남자가 야동을 볼 때 그게 합법적인건지 혹은 그렇지 않은 건지 모르고 보는 경우도 있잖아요?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런 것도 전부 혐오스러워요. 피해 여성에게는 그걸 알고 봤는지 모르고 봤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어쨌든 유통이 됐고 그걸 본 남성들은 지금까지 그 수많은 몰카영상들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거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실제로 나는 이렇게 말을 똑부러지게 하지 못했다. 대충 이런 내용으로 얼버무리며 말했음.
그는 이외에도 여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한테 '남성들이 몰카 영상을 본 것은 꼭 남성들만의 잘못만은 아니다'를 어필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여성들의 입장과 도의적 측면을 이야기했고, 그는 마침내 자기가 잘못했다고 인정하기는 했었다. 이 때가 아마 새벽 5시였을 것이다. 내가 기분이 씨발 좆창이 났다는걸 그도 눈치를 깠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나는 그에게서 공포감을 느꼈다. 왜냐면, 그와의 불법촬영물 건에 대한 대화를 하기 이전에 그가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드러냈었기 때문이다. 그와 몇 번의 통화를 하고 난 후부터 그는 내게 "성은님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것에 개의치 않고 그와의 친분을 유지해 나갔었다. 그와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였으며 나는 그와 연인 관계가 될 마음이 정말 요따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호감을 드러낸게 공포심과 무슨 상관이 있냐면, 그는 마치 나를 '잠재적 연인 상대'로 보면서 잠재적 연인 상대인 내게 이해심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랑 나랑 이전까지 사이 좋았잖아. 이 정도는 당신이 이해해 줄 수 있는거 아닌가요?" 그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와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내일 다시 통화해요." 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피로감이 느껴져서 바로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에게서 장문의 카톡이 와 있었다. 사과의 말을 전하는 거였지만, 정말 기분이 몹시 나빴다. 나는 당신때문에 착잡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잠에 들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천연덕스럽게 "미안하다"며 내게 메세지를 남긴 그가 괘씸했다.
기분이 좆 같아서 답장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후에도 카톡이 왔고, 한참 늦게 답장을 했다. 그리고 그의 답변에 더는 대꾸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대로 무시하고 SNS에서 그를 차단했다. 차단했더니 그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무섭고 짜증나서 그의 전화를 바로 끊었다. 그리고 전화도 차단했다. 그랬더니 또 장문의 카톡이 왔다. 그래서 카톡도 차단했다.
그와의 모든 연결 수단을 다 끊고 나서도 때때로 불안하다. 그가 내 SNS를 염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지금도 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에 내게 "우리 서로 대화했던 내용들은 다른데서 이야기하지 말아요." 라며 자신의 죄책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역겹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몇 가지 있다.
- '이건 범죄라고 보기엔 어렵지 않나요?'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범죄를 합리화하려고 한 점
- 내가 그에게 똑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하고 자신감 없는 태도로 문제를 제기한 점
- 싫다는 사람에게 끈질기게 연락하려고 했던 그의 태도
1번에서 그는 명백히 가스라이팅을 했다. 한국 남성들의 집단적 범죄행위를 '그럴 수도 있는 것' 쯤으로 넘겨버리려고 하며 그것에 반기를 든 내게 언짢은 태도로 계속해서 "하지만"을 시도했다. 명백한 가스라이팅.
내가 그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응한 것은 일단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권력이 작용함과 동시에 나이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띠동갑 이상이 차이가 났으니까. 그와 나는 서로 존댓말을 사용했지만 위계는 분명히 작용했다.
또 본인이 이 관계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고 내가 자신에게 실망했음을 알면서도 내게 끝까지 질척거렸던 그 태도. 이 모든 것들은 놀랍게도 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존재했다.
여성들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나서 늘 죄인이 되었다.
남성들의 말을 듣고 "아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걸까? 너무 예민했던 걸까?" 하며 사과한다. 내가 마치 잘못된 생각을 했던 사람인 양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당신이 당신의 여자친구에게, 이성 친구에게, 혹은 여동생에게 "너가 그렇게 하고 다니니까 ~ 당하는거야." 라는 말을 함으로써 여성들은 또 다시 스스로에게 죄인이 된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 죄수복을 벗고 세상에 나와서 남성 사회에 의문을 던지기를 오래 전부터 반복 해왔다. 이제는 그 돌들이 모여서 탑을 이루게 되었다. 당신은 그 앞에서 더욱 초라해져만 갔고 가부장제라는 썩은 동아줄을 잡고 빌빌거릴 뿐이다.
당신들도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것들을 보면서 무언가 사회가 틀어져 있음을 알긴 알거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또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방법은 하나다. 그 더러운 남성연대에 반기를 들고 여성들과 연대하라. 잘못된 것들에 대해 반성하고 또 반성하라. 그리고 사과하라. 그리고 당신의 친구들에게 말해라, 우리들은 잘못 됐다고.
덧. 무고죄나 남성이 피해자인 경우를 들며 한국 페미니즘은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당신이 결국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지 잘 봐라. 수 많은 피해자들의 피눈물을 애써 외면하고 자신을 피해자라고 칭하며 되려 여성들을 꽃뱀 취급하는 당신의 추태를 가까운 미래에 후회하게 될 걸.
그리고 사실 본문에 써 놓은 내 경험은, 세 명의 지인에게 털어놓았었다. 일부러 남성 지인들에게 말했었는데, 그 새끼가 얼마나 이상한 새끼인지 확인하고 싶었거든. 통화 녹음본을 받은 지인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저새끼 30 넘게 쳐먹은 새끼 맞아요? 왜 자기 멋대로 성은님의 의견을 정리하려고 들고 가르치려고 들어요? 왜 범죄를 옹호해요?"
"얘 뭐하는 놈이에요? 가스라이팅에 남의 의견 넘겨짚기에... 가관인데요. 많이 무서우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