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minism] 코르셋

in #kr-feminism6 years ago

<코르셋>

  1. 코르셋 글을 쓰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몇 번이고 실패했다. 애초에 나는 스스로 코르셋을 벗지 못한 사람이라고 정체화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감히 내가 이런 글을 써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검열을 끊임없이 해 왔다. 괴로웠다.
    (본인이 개념화하고 있는) 탈코르셋과 본인 스스로가 너무나 맞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러했는데, 이제는 코르셋에 대해 입을 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2. 수 없이 많은 글들을 읽었다. 개인으로서 느끼는 코르셋, 사회적 압박, 코르셋이란 단어의 모순, 페미니즘 후발주자로서 한국의 지향점, 주체적 성적 대상화, 교차성 개념 등, 읽을수록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나는 이 혼란스러움의 원인을 교차성을 배재한 흐름에 두고 있다. 현 k-탈코르셋 운동의 major가 교차성을 무시한 채 코르셋의 개념을 일반화 내지 획일화 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란 것이다.

  3. 현 k-탈코르셋 운동은 확실히 그 양상은 진보적으로 보인다. “여성스럽지 않은” 숏컷을 하며 “여성성을 강조하지 않은” 헐렁한 옷을 입고, “여성은 아름다울 필요가 없기에”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여성들이 요구 받아 온 꾸밈노동에 대한 저항이란 면에서 나는 탈코르셋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으로 드는 찝찝함은 이 ‘획일화’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말 할 수 있다.

  4. 현재 탈코르셋 운동은 숏컷, 노메이크업, 와이드 팬츠를 외치고 있다. 나는 이것에 대한 여러 반례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 반례에 해당하는 이들은 대개 꾸밈노동을 함으로써 남성사회에 저항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었다.

  5. 내 첫째 이모는 저번주 토요일에 결혼식을 올리셨다. 이모의 외모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외모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머리는 짧았고, 화장을 안 하며 뚱뚱하다. 얼핏 보면 이모는 현 k-탈코르셋 운동이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숏컷, 노메이크업,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살집 있는 몸매.
    그러나 이모는 결혼식 당일, 평소 같았으면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욕을 먹을 만한 새하얗고 예쁜 웨딩 드레스를 입고 신부화장을 했다. 이 날 내가 본 이모의 미소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것이었는데, 여성스러운 옷과 메이크업은 어쩌면 (이모의 입장에서) 탈코르셋이 아니었을까.
    이모는 본인의 외모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다. 주변에서의 외모에 대한 수 많은 야유와 오지랖, 살에 대한 충고(를 가장한 고나리)는 이모를 괴롭게 한 코르셋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6. 내 친구 A는 집안이 매우 엄하다. 화장도 못하게 하고, 치마도 못 입게 하며 반바지도 입을 수 없다. 그런 A가 대학생이 되면서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A는 나풀거리는 원피스에 곱게 화장을 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k-탈코르셋 운동의 주축이 외치는 것들과는 정 반대의 것들을 하는 A는 그 “정 반대의 것들”을 함으로써 코르셋을 벗어 던질 수 있었다.

  7. 5번에서 언급했던 사례는 비록 ‘결혼식’이라는 상황 하에 꾸밈노동을 한 것이지만,
    어쩌면 ‘신부가 예뻐야 한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여성 혐오를 반복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모의 입장에서) 탈코르셋이라고 생각한다.
    뚱뚱한 여성이 감히 ‘여성스러운’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예뻐 보이려 주제 넘게 화장을 하면 우스꽝스럽게 보인다고 말하는 남성 사회에게 저항하는 행동으로 비춰졌다. 그날 이모의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것이었다.

  8. 5번과 6번에서 언급했듯, 꾸밈 노동은 누군가에겐 코르셋이 되며 다른 누군가에겐 탈코르셋이 될 수 있다.
    다만, 나는 꾸밈노동이 절대다수의 여성들에게 코르셋이라는 것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특히 10대, 20대 여성들에겐 더욱 그렇다.)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이 꾸밈노동으로 고통받고 인간 그 자체로서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9. 너무 많은 여성들이 같은 것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k-탈코르셋 운동이 획일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일 어떻게 꾸밀지, 어떤 옷을 입을지, 살을 얼마나 더 뺄지에 대해 고민하니까. 이 경험은 너무 많은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획일화는 반대한다. 여성들의 경험에는 수 많은 교집합이 있고 나 또한 그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자유롭지 않다고 해서 본인들(k-래디컬들)이 정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여성을 불링하는 것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다.

  10. 내가 생각하는 탈코르셋은, 궁극적으로 ‘여성이 무엇을 하든 남성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여성이 한 사람으로서 대우받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탈코르셋 운동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현 k-탈코르셋 흐름에게 묻는다. 남성처럼 머리를 자르고, 남성처럼 옷을 입고, ‘여성’인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행동하면 무엇이 남는가? ‘여성성’이 드러나는 것을 코르셋이라고 하면 그 뒤엔 무엇이 있는가? 여성들이 모두 똑같이 ‘남성화’가 되면 그것이 페미니즘인가?


이런 글을 어제 개인 SNS에 올렸었는데,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도 있는 것 같아 보충설명을 하자면

숏컷, 노메이크업, 편한 옷 (O)
탈코르셋 획일화 (X) (ex: 뚱뚱한 여성에겐 크롭탑을 입는 게 탈코르셋)
본인이 생각하는 탈코르셋과 맞지 않는 여성 불링 (X)

정도가 될 것 같다.


친한 지인분이 내 글을 읽고 코멘트를 남겨주셨는데, 칸트주의자인 그의 글에서 나는 자율적 자유타율적 행동을 보고 페미니즘의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의 초반부에서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의무로부터 나온 행동Handlung aus Pflicht과 의무에 맞는 행동pflichtmaessige Handlung을 구분한다. 이 둘은 외연상 큰 차이는 없으나 무엇이 의지를 규정했는지에 대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의무에 맞는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일 수는 있어도 결코 도덕적인 행동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의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행위에 의한 결과를 기대하며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는 가언적이다. 그러나 오직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만이, 오직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에 행동할 경우에만 무조건적인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칸트 윤리학에서는 오직 스스로 입법하여 세운 도덕법칙에 따르는 행동만이 자유로운 행동이며, 이를 칸트는 자율적 자유Freiheit als Autonomie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다른 목적이나, 욕구나 경향성에 의해 행동하는 것은 결국 타율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코르셋은 사실 "어떠한 기준에 맞는 행동이나 꾸밈"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무엇에 의해 규정된 행동이냐에 따라 설명되어야만 한다. 이는 칸트 윤리학의 맥락과도 매우 맞닿아 있다. 만약 특정한 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할 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의무에 맞는 행동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의무로부터 나온 행동일 수는 없다." 이는 또 다른 타율을 불러일으키며, 이는 또 다른 코르셋을 생산할 뿐이다.

그 어느때보다도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철학이 바로 페미니즘이 아니었던가. 여성의 주체성은 바로 자기 자신의 자율성Autonomie으로부터 비롯된다. 여성 각자가 자신이 스스로 세운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꾸미기 시작할 때, 다시 말해 여성이 자율적으로 어떻게 꾸미고 행동할지를 결정하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여성의 주체성이 정립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최소한 나는 페미니즘은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마워요 ㅈㅈㄱ님! :D


우리의 목적지는 남성성 숭배도 아니며, 남성을 따라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서열화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스스로를 어떤 방식으로 정체화 할지, 여성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끈임 없는 담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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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탈코르셋 논리를 보면 의아한 부분이 많습니다.

  1. 여성이 스스로를 꾸미고자 하는 동기가 과연 남성으로 부터 온다고 할 수 있나요? 화장을 하고 스스로를 예쁘게 꾸미는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여성들이 아니구요?

  2. "꾸밈노동" 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안하면 되지 않나요? 자발적으로 하면서 왜 남 때문에 한다고 남탓을 하지요?

  3. "뚱뚱한 여성이 감히 ‘여성스러운’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예뻐 보이려 주제 넘게 화장을 하면 우스꽝스럽게 보인다고 말하는" 것을 "남성 사회" 라고 표현하셨는데... 이런 토크는 여성들이 못생긴 여자를 두고 하는 뒷담화의 대표적 예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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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숏컷,노메이크업,와이드팬츠)같은 것들은 남성을 따라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남자도 장발에 메이크업을 스스로 하는 사람도 있고 트렁크팬티를 즐겨입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흑백논리로 이런건 남자거야 이런건 여자거야 라고 단정지어서 나누기 보다는 자신이 하고싶은 것은 하면 된다입니다.
남성도 여성도 자신이 꾸몄을 때나 운동하고 몸매를 가꿨을 때의 스스로의 만족감 때문에 신경쓰는게 아닐까 생각해요
이모님같은 경우는 평소에 이런데 신경쓰기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에 신경쓰느라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잠시 미뤄두었던 부분을 결혼식 때는 우선순위가 위로 올라온 것이 아닐까요?
-PS. 코르셋 이야기라고 해서 흐뭇하게 왔다가 물만먹고가지요-

맨박스에 대한 이해가 없으신 상태라서 이야기 진행이 어렵습니다.
장발에 메이크업을 하는 남성이 현 사회에서 어떤 시선을 받는지 생각해보세요.

이런건 남자거야 이런건 여자거야 단정지어서 나누기 > 현 사회의 상황
페미니즘의 지향점 > 저 경계를 없애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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