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한남은 누구인가
<한남이라는 단어>
한남 혹은 한남충은 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속어이다. 본래 남성 혐오 사이트의 효시인 메갈리아에서 탄생했다가 이후 메갈리아에서 파생된 여러 커뮤니티에서 사용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특정 남성 혐오 집단안에서 사용되는 것을 넘어서서 일상대화에도 종종 등장할 정도로 보편성을 갖춘 어휘로 자리잡아 가는 중이다.
비속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한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 몇년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넓혀오고 있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사고방식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키워드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의 부상과 함께 한남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필연적으로 등장하였고 남성 혐오 조장의 도구로 이용되는지를 조명하는 것은 이제 음지를 벗어나 양지에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남성/여성을 가리지 않고 퍼져나가고 있는 남성 혐오 이데올로기의 논리를 이해하는데에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한남은 억압자이다>
한남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억압자이다. 페미니스트들이 만악의 근원이라 여기는 가부장제를 강제해온 주체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연약하게 만들고, 여성에게 외모를 가꿀 것을 강요하고, 여성을 경제적으로 차별해왔고, 여성의 자아실현을 막아온 억압자인 것이다. 한남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독점하고 유지하기 위해 수세기에 걸쳐 한국의 여성들을 차별해왔다. 결과적으로 한남이 강제해온 가부장제는 오늘날까지 그 잔재가 남아 여성들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지 못하며, 임금 차별을 받고 있으며, 외모라는 기준으로 자신들을 평가하게 되었으며,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해야 하며, 남성보다도 더 가사일을 더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급진적 페미니스트가 그려내는 한남은 바로 이렇게 여성을 억압해오고 차별해온 주체인 것이다. 가부장제라는 원죄를 품은 주제에 현시대에서까지 사회적, 경제적 파워를 독점하고 있는 이 집단은 현재에서는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자 최종적으로는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 쳐부숴야 마땅한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이다.
<한남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한국남자는 과연 어쩌다가 가부장제라는 십자가를 짊어진 한남이 되었는가? 한남이라는 어휘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집결소이자 극심하게 편향된 정체성 정치의 산실인 메갈리아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찾을 수 있다.
정체성 정치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인종, 성 정체성, 종교 등등) 으로 인해 자신이 사회적/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는 신좌파주의와 그 궤를 같이 하는데, 마르크스주의가 제창한 부르주아 (자본가) 와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의 이분법을 계승해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는 억압자-피억압자 (피해자) 의 이원론을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적 강자와 약자는 분명히 나뉘어져 있으며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한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은 급진적인 형태의 정체성 정치를 내재화 한 상태로서 스스로는 피억압자이며 한남은 억압자라고 극단적인 피아 구분을 하고 있는 상태다. 오늘날 대한민국 페미니스트 무브먼트에 있어 한남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인데, 이것은 억압자-피억압자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데 있어 극악무도한 압제자, 즉 한남의 존재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극단적 이분법은 두가지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첫째는 개개인을 개개인의 특성으로 평가하는 대신 속한 정체성 그룹의 특성을 바탕으로 평가하게 되고 둘째는 피억압자는 항상 억압을 받는 위치에 있고 억압자는 항상 억압을 하는 위치에 있다고 단정하게 된다.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얘기해보면, 남성은 누가 되었든 개인이 품고 있는 생각과는 상관없이 한남이라는 그룹으로 묶어 비난할 수 있고, 한남인 이상 억압자로서의 횡포를 부렸으면 부렸지 피해자는 절대로 될 수 없으며 여성인 자신은 여성이기 때문에 항상 피해자였지 가해자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성재기는 한남이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여자 외모 따지기 좋아하던 고지식한 전 남친은? 아마 그도 그럴 것이다. 그러면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전까지 이십여년을 키워내는데 소요되는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수많은 기회비용을 노동으로 지불한 아버지는 어떠한가? 그도 어차피 집에 오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가사분담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낱 한남인 것이다. 여자에게 말도 한번 못걸어보고 손 한번 못잡아본 부끄럼 많은 남학우는 어떠한가? 그도 어차피 전세계에서 유달리 유흥문화가 발달하고 변태/몰카 천국이라는 대한민국의 남성의 일원이기에 잠재적 성범죄자인 한남의 자질을 이미 다 갖춘 것이다. 이렇듯 특정 남성이 누구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남자이기 때문에, 가부장제라는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한남이라는 레이블이 안성맞춤인 것이다.
맨스플레인, 젠더감수성 그리고 “공부좀 더 하고 오세요”는 무슨 표현일까? 그것은 한남은 억압자인 스스로의 죄를 알고 입을 다물라는 얘기다. 자신들이 저지른 원죄에 대해 모르는 상태, 즉 계몽이 되지 않은 상태라 하는 말은 일절 들을 가치가 없다는 얘기인 것이다. 한남은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거니와 피해자가 되는게 애시당초 불가능 하기 때문에 여성의 아픔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임은 물론 2차 가해이기에 스스로의 생각을 검열해야 마땅한 것이다. 여성은? 여성은 피억압자로서 항상 피해를 받는 입장이며 억압하는 위치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성은 이유없이 성추행/성폭행 고소를 할 리 없고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진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미러링과 성체훼손은 극심한 차별과 억압에 반대하는 울부짖음이므로 그들은 여전히 피해자이지 절대로 가해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머릿속에서 한국 여성은 무조건적으로 82년생 김지영인 것이다.
<한남은 억압자가 맞는가?>
앞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논리에 있어 억압자로서의 한남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남이 수세기에 걸쳐 여성에게 가부장제를 강제해 그들의 사회진출/자아실현을 막으며 경제적, 사회적, 성적 착취를 일삼아 왔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그들이 묘사하는 억압자-피억압자의 관계는 얼마만큼의 타당성/현실성을 갖추고 있을까?
먼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가부장제의 폐해를 들여다 보자. 여성은 가부장제로 인해 연약함을 강요받게 되었으며, 경제활동을 하지 못해 한남에게 의지하게 되었으며, 고정된 성역할 (남성은 바깥일 여성은 육아/가사 전담) 을 강요받게 되었다는 것이 그 주요 골자 이다.
이러한 일련의 주장들은 몇가지 중요한 가정에 의거하는데 첫째는 남성과 여성간 생물학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과 둘째는 그로인해 성 역할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일뿐 애당초 생물학적 특성은 성 역할에 아무런 영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과 여성은 애당초 동일한 신체적, 정신적 특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나 사회적 문화적 압력으로 인해 성차별/성역할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과연 이 가정들은 얼마만큼의 일리가 있을까?
학술적 근본이 전무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통계자료 체리피킹을 일삼고 불리한 통계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기울어진 시각으로 만들어진 차별성 가득한 데이터라고 치부해오며 학문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철저히 고립된 포지션을 유지해온 까닭인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아주 기초적인 생물학적 사실과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의 형태로 처음 등장한 시점과 피임약이 보편화되며 여성 사회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1960년대 사이에 벌어진 무려 수십만년 어치의 진화론적 역사를 깡그리 망각하거나 부정하고 있다.
진화적 역사의 대부분이 몰려있는 농경 이전의 수십만년의 선사시대를 살펴보자. 남성은 사냥/수렵을 통해 종의 생존을 위한 영양분 공급의 책임을 다해야 했기에 동물에게 공격받거나 상처를 입어 감염에 의해 죽는 위험에 노출되었다. 반면 여성은 초경에 도달하는 나이부터 임신과 출산을 통해 인구수를 유지해 종의 종속을 도왔다. 따라서 종의 종속을 위해 남성은 근력과 남성호르몬을 증가해 생산성 증가를 유도하고, 여성은 인구수 증가를 위해 임신/출신과 육아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방향으로, 즉 역할분담식의 진화론적 압박이 가해진 것이다. 하지만 산모사망율도 높아서 인구수 증가는 커녕 유지만 하기에도 급급했으니 사람 목숨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파리목숨과 매한가지 였던 셈이다. 자연재해에 인구수가 반으로 토막나고 질병에 부족이 멸절하는 마당에 경제활동이 무엇이고 자아실현이 무엇이란 말인가? 페미니스트들은 마치 인류출현 이래로 남성이 여성을 착취해 온 마냥 묘사하는데 선사시대 남성은 그럴 여유는 커녕 아무리 뇌가 작다고 해도 여성들 보고 나가서 사냥을 하라고 할 정도로 무식하지는 않았다. 생식기능이 없는 남성 대부분이 죽는다 해도 여성만 온전하다면 종은 지속 될 수 있지만 여성이 떼죽음을 당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종말을 의미하니까.
농경시대를 맞이했다고 다르고 심지어 근대라고 달랐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경제 활동의 대부분은 긴 시간의 고된 육체적 노동을 요구했고 인류는 자연재해와 질병의 피해로부터 그다지 자유로워 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보릿고개 한철만 넘어가도 굶어죽는 인구가 속출하는 마당에 남성은 여전히 생산성 증가를, 여성은 여전히 인구수 증가를 요구받았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주어진 성 역할에 충실 한다고 해도 생존이 위태로운 마당에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했다고? 그렇게 억압을 당했다고 불평을 하고 싶으면 차라리 종의 생존을 이토록 어렵도록 만든 장본인, 즉 신에게 불평을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마치 인류 출현 이래로 여성은 경제활동과 자아실현의 가능성이 존재했으나 남성의 차별로 인해 가사/육아로 대변되는 성역할을 배정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상 이러한 고민들은 자본주의 등장 이후로 인구의 상당수가 극심한 경제적 궁핍을 겨우 벗어나고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피임약이 보급되어 여성의 성생활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필연적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60년대, 즉 아주 잘 쳐줘야 고작 60년전에 대두되기 시작한 문제로서 그 이전 수십만년 동안 남녀 모두 각자 진화론적 메커니즘을 통해 결정된 성역할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태동함에 따라 과학 기술 의학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함은 물론이거니와 민주주의와 현 시대의 보편적 인류 가치관이 정립 된 찬란한 인류 발전의 결과가 고작 생물학적, 진화론적 인류의 역사는 완전히 망각한 채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girls can do anything,” “이 모든게 가부장제 탓, 한남 탓” 이라고 읖조리는 20대 페미니스트 꿈나무라니 아주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한남은 어떻게 생명을 이어 가는가?>
이와 같이 억압자로서의 한남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묘사이며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남성 혐오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비논리성, 비과학성을 반영한다고 볼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왜곡된 한남의 정의를 확대 재생산 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한남은 비록 메갈리아의 손에 의해 태어났을지 모르나 남성 혐오주의를 조장하고 남성 전체를 검열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 어휘의 영속을 가능케 하는 주체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다. 바로 자신이 도매급으로 비하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모종의 이유로 인해 자신이 억압자 였음을 인정하고 여성에게 사죄하려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남성들이다. 바로 이런 남성 말이다.
EBS 까칠남녀에 출연한 바 있고 유튜브에서는 “차별은 비용을 치른다” 라는 제목으로 남성의 역차별이라 부르는 손해들 (생명의 위협에 노출, 경제적 책임/의무) 은 남성이 여성에게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가한 선행차별의 대가, 즉 “차별 비용” 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 손아람 작가이다.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에서 데이트 비용, 군대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위의 토크에서 그는 남성들이 감내해야하는 불리한 성역할들은 죄다 남성들이 여성들을 차별하기 위해 스스로 자발적으로 짊어진 차별비용, 즉 자승자박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남성만이 군대를 가는 법을 제정한 것은 남성이라는 주장과 경제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남성의 이기심, 즉 손아람 작가 본인의 상상력에 기반한다. 두 주장 모두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길고 긴 진화론적 역사 동안 남성과 여성의 확연한 역할분담이 종의 종속에 필연적이었다는 사실과 현대 사회에 들어서도 수십만년간에 걸쳐 완성된 성역할이 완전히 재정립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음을 상기해 볼때,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결국 가부장제이고 결국 한남이다 라고 외치고 있는 손아람 작가는 스스로에게 비유적 거세를 행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은 풍부한 인물이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한계, 즉 기본적인 과학적 소양과 비판적 사고력 미달, 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급진적 페미니즘이 영향력을 넓혀가는 동안 단결하여 페미니스트들의 남성 혐오를 완강히 부인해도 모자랄 판에 시류에 편승하고자 하는 가짜 지식인의 허위논리에 매료되어 근거 없는 지적 우월감을 향유하거나 스스로를 한남과 차별화함으로서 데이트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젊은 한남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가부장적인 대부분의 한남과는 달리 여성을 차별하지 않으며 열린 마음과 깨어 있는 마인드를 가졌고 불알 두쪽이 달렸으나마 최대한 여성의 아픔을 이해하고자 하는 젠더 감수성, 즉 탈한남이라는 어필을 함으로서 여성의 선택을 받으려 한다. 이미 대학가에는 고지식한 한남이 아니라 열린 남자를 자처하며 남자로 태어나 가부장제라는 원죄를 짊어진 사실에 대해 열심히 사죄 중인 남성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젠더감수성이 없느니 한남이니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원죄가 너무나 죄스러운 나머지 기꺼이 군대에 가고 데이트 비용도 내면서 비이성적, 비논리적, 비과학적 광기에 치닫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히스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입장을 열심히 이해하려 한다. 비단 20대 뿐만인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은 남성들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며 “Girls can do anything,” “Girls do not need a prince.” 를 외칠때 여자들도 군대에 가고 어선도 타 보고 막노동도 하고 원유시추도 해 보라고 자신있게 말한 남성들은 얼마나 되는가? 남성혐오의 온전한 책임은 페미니스트들에게만 있지 않다. 시류에 편승 해 보고자, 근거 없는 지적 우월감을 향유하고자, 여성의 마음을 얻어 보고자 본인의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남성성을 사죄하고 거세하는 소위 깨어 있어 보이려 하는 남성들이 문제인 것이다.
<맺음말 - 한남은 정체성은 어디로 가는가?>
최근들어 급부상하고 있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물결에 밀려 한남들은 역차별의 피해자로서 페미니스트들이 휘두르는 폭력 - 가부장제에 대한 사죄요구, 역차별 수용, 스스로의 검열 - 에 터무니 없이 노출되어 갈수록 입지가 좁아져 가는 상황이다. 젊은 한남들은 여성을 두고 서로간의 경쟁을 해야하는 생물학적 지령 때문에, 또 나이가 있는 한남들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가 너무 고된 나머지, 젊은 한남들도 똑같이 군대나 사회에서 고생좀 해봐야 된다는 보상심리때문인지 다음 세대 남성의 희생과 아픔이 웃음거리로 전락해도 관망만 하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행동력과 응집력에서 판이한 우월함을 보이며 정계/사회문화 면에서 영향력을 키워온 페미니스트들과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오늘날 한남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억울함과 페미니스트들의 모순을 말해줄 대변인이다. 저 넓은 운동장이 왜 남자아이들의 전유물이여야 하냐는 비상식적 질문을 하며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하고 “오죽하면 저랬을까” 하며 여성은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한남은 무조건적으로 죄악시하고 이 모든 것은 남성들 탓이다 라며 차별비용을 운운하는 가짜 지식인들에 맞서 한남들의 억울함과 한남들의 희생을 말해줄 대변인은 과연 언제 어디서 등장할 것인가? 한남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고 성제기 님이 그립네요. 시원시원하게 남성의 목소리를 외쳐주셨는데
네 했던 말 모두에 동감을 하진 않지만 시원시원하게 표현을 해주는게 참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었는데
아쉽게 먼저 가버렸네요. 우울증도 있었도 가정 불화도 있고 개인적으로 힘든점이 많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런 가짜 페미니스트들 때문에 진짜가 같이 욕먹죠.
요즘같은 시국에서는 다들 말을 않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요.
진짜 페미니스트는 이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위 제 4물결 페미니즘이라고 일컫어지는게 결국 신좌파주의적 과격/급진 페미니즘이고 이게 어차피 주류로 안착이 된 상태라 페미니즘의 정의 자체가 남성혐오를 기본전제로 하는 방향으로 완전히 바뀌었지요.
따라서 90년대/2000년대의 페미니스트들, 즉 온건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하던 분들은 이제 아예 이퀄리스트라고 레이블을 바꿔 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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