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봄날|| #25 김밥 꽁다리가 더 맛있는 이유

in #kr-essay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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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만들어주신 @anysia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어릴 적 엄마가 김밥을 싸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김밥 만드는 모습을 구경하고는 했다.
까만 김 위에 간을 한 흰밥을 펴 놓고 햄과 계란, 시금치, 단무지, 게맛살 등을 올리고는 돌돌 말면 길고 까만 김밥이 만들어졌다.

엄마는 이렇게 만든 김밥을 바로 썰지 않고 참기름을 한 번 바른 후 약불로 프라이팬에 잘 돌려가며 구웠다. 이렇게 하면 밥을 감싸고 있는 김이 탱탱해져 잘 터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참기름이 김밥에 잘 배어 더 고소해진다, 는 게 엄마의 주장이었다. 정작 먹는 나는 그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잘 구워진 김밥은 다시 도마에 옮겨 칼면을 김밥에 쓱쓱 문질러주고 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썰어냈다. 엄마의 칼질에 단면을 드러낸 김밥은 꼭 오색 저고리를 입은 것처럼 알록달록 했다.

다 썬 김밥은 이제 도시락에 하나씩 옮겨 담는데 김밥 꽁다리는 항상 도시락이 아닌 내 입 속으로 들어갔다. 김밥 꽁다리는 제아무리 잘 썬다 해도 정리되지 않은 속 재료들 때문에 들쭉날쭉하다. 그래서 김밥을 층층이 쌓아야 하는 도시락의 특성상 꽁다리는 넣지 않기 마련이다. 제조공정 결과로만 보자면 불량품인 셈이다.

불량품일지라도 나는 김밥 꽁다리를 더 좋아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꽁다리가 더 맛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라면 할 수는 없지만 잘 썰어진 김밥과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다. 김밥 꽁다리만 따로 팔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힘들겠지?


*


예전 김밥이 갖는 이미지라고 하면 특별한 날 먹는 특식 같은 느낌이 있었다. 계란은 잘 부쳐 가지런히 잘라놓고 시금치는 삶아서 무쳐 놓아야 하고, 당근도 채 썰어 볶고, 햄도 미리 적당한 크기로 잘라야 한다. 밥도 갓 지어 소금과 참기름 넣고 잘 버무리고 나서야 비로소 재료 준비가 끝난다. 후에도 재료를 넣고, 말고, 썰고, 싸고. 먹긴 쉽지만 만드는 건 손이 여간 많이 가는 게 아니다. 그래서 김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은 고작 소풍날 정도였다.

이런 김밥의 위상도 요즘은 많이 떨어졌다. 어디 가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사대용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다. 끼니를 못 챙겨 급하게 먹는 음식 정도.
뷔페에서도 김밥은 영 인기가 떨어진다. 개인적으로도 초밥이나 샌드위치를 먹었음 먹었지 김밥을 먹진 않는다. 배는 확실히 부르겠지만 뷔페는 오히려 배가 차면 곤란한 곳 아니던가.
게다가 요즘은 김밥천국이 천지에 널렸다. 천오백 원만 내면(가게마다 다르겠지만) 5분만에 김밥을 뚝딱 만들어낸다. 출근시간에는 미리 만들어 은박지에 포장해 놓아 그마저도 안 걸린다. 김밥천국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고 예전과 달리 이제는 쉽게 먹을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맛이 떨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희소성이 떨어지니 김밥을 먹고 있으면 특별하다는 느낌보단 어쩐지 처량 맞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점심 뭐 먹었냐는 물음에 김밥 먹었다 대답하면 왜?라고 반문해오는 걸 보면 처량한 게 맞다. 부정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김밥을 먹는 경우가 많으니 딱히 내세울만한 변명거리도 없다.

각설하고, 김밥 꽁다리가 더 맛있는 이유를 굳이 찾자면 한 줄에 두 개만 나오기 때문 아닐까. 원래 귀한 건 더 맛있는 법. 이래나 저래나 희소성 문제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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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용기내어 꺼낸 말
#19 어른이 된다는 게
#20 안녕. 나의 작은 카페들아
#21 걱정이더라
#22 아빠가 오빠
#23 힘내라 서툰 내 인생
#24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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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을 작게해서 양끝을 느낄수 있게 파는곳도 있더군요

그런 곳이 있군요. 왜 저는 처음 알았을까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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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너무 맛있어요. 특히 집에서 싸먹는 김밥은 재료가 적어도 갓 지은 밥에 재료 몇개만 넣어도 맛난 것 같아요. 소풍 날 아침 엄마가 싸주신 김밥이 정말 맛났던 것 같아요. 며칠 전 조카와 싸 먹은 꼬마김밥 사진도 같이 올려봅니다.

김밥은 평소에 먹어도 맛있지만 그래도 뭐니뭐니해고 소풍날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먹는 김밥이 최고인 거 같아요. :)

올려주신 김밥도 참 먹음스럽네요. ㅎㅎ 급 김밥이 먹고 싶어지는. :)

유치원 때 소풍갈때마다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 싸주시던 김밥이 그립네요

엄마가 싸주는 김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이는 김밥이지요. 제아무리 김밥천국 김밥이 맛있다 하더라도요. :)

생일날만 먹을수있었던케이크
소풍에나먹을수 있었던 김밥
휴게소에서먹을수있었던 호두과자
그런특별함때문에 찾게되는게 있는것같아요.
뭐든 의미를담고 추억을담는다면 본연의가치보다 특별해지고 가치있어지지요
그래서 전 스팀잇을 믿어요.
제 추억과 생각을 가득담고있으니까ㅋㅋ

오랜시간 글로 남겨 놓으면 아마 스팀도 추억이 될 거 같아요. 일기를 보듯이 스팀엔 그간 모든 기록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 :)

난 김밥 꽁다리 안좋아함. 맛의 밸런스가 깨어진. 이건 헛소리고 밥이 적어서 짬 ㅋㅋ

그럼! 앞으로 꽁다리는 날 주는 걸로. :)

초코님 저 자다깨서 아 글 봤더니 넘 배고파졌어여...ㅋㅋㅋ

그래도 밤에 뭐 드시면 안 됩니다. :)

그러고보니 경아님 4월 땔깜에 김밥이 종종 보였던 거 같은데. :D

아 완전 들켰네요ㅋㅋ 저 요새 김밥에 빠졌거든요ㅋㅋ
동네에 맛있는 김밥집을 발견해서ㅎㅎ

김밥과 라면이면 천국이죠!ㅋㅋ

그쵸. 집에서 먹는 맛과는 많이 다르죠. :)

김밥 꼬다리가 맛있는 이유는 밥보다 재료가 더많이 들어가있어서 그런거 같아요 초코님 ㅎㅎ

그런 거 같긴해요. 아무래도 밥은 적고 속재료는 많으니까요. :)

엊그제 김밥싸먹었는데
전 꽁다리가맛있는이유가 ㅎㅎ재료들이 더 튀어나와있어서 양이 더많아서 그런게아닐까 생각도 들어요 ㅎㅎㅎ 김밥썰고나면 꽁다리는 이미 제입속으로 들어가고 없어지던데 ㅎㅎㅎㅎ 그냥 먹었을때는 아무생각없이먹었는데 글로보니 ㅎㅎ김방꽁다리에 ㅎㅎㅎ대한생각이드네요

사실 맛있는 반찬 먹는 기분이랄까요. 말씀처럼 재료들이 밥보다 더 많이 들어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
근데 아무래도 한 줄에 두개밖에 안 나오니깐 전 항상 아쉬웠고 그래서 더 맛있다는 생각도 들었던 거 같아요. :D

어릴적 소풍가는날 아침 일찍 일어나 엄마가 김밥을 쌀때 옆에 쪼그려앉아 꼬다리를 주워먹었던 기억이.. 지금 곳곳에서 파는 김밥도 맛있지만 그때 추억의 맛을 따라가진 못하는것 같아요 ㅎㅎㅎ

음, 아무래도 요즘엔 소풍을 안가서 그런 거 아닐까요? 어른이 되고 나서 소풍간다고 굳이 김밥을 싸지도 않으니까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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