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의 인문학 : #미술사 , #매너리즘

in #kr-art6 years ago

Parmigianino and all the artists of his time who deliberately sought to create something new and unexpected, even at the expense of the 'natural' beauty established by the great masters, were perhaps the first 'modern' artists.
선배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했던 파르미지아니노를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미술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가들이었을 것이다.
-곰선생, 서양미술사, 367쪽


•파르미지아니노의 <긴 목의 마리아>
After restoration , Parmigianino, (Madonna with the Long Neck), 1535-40, Oil on wood, 216 cm × 132 cm (85 in × 52 in), Uffizi, Flo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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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아주 작다. 특히 엉덩이에 비하면. 엉덩이는 엄청나게 넓어 보인다. 게다가 또 발은 너무 작다. 그래서 결국 몸매는 거의 다이아몬드 형이 되었다.
마리아의 몸은 엄청나게 큰 아기 예수의 완전한 배경이 된다. 아기 예수는 무척이나 클 뿐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비틀려 있다. 어깨에서 탈골된 것처럼 왼쪽 팔은 아래로 처져 있고.
아기 예수의 자세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떠올리게 한다. 마리아에게 안겨 편안하게 죽은 예수의 오른팔을. 그래서 잠이 든 커다란 아기 예수는 마치 죽음을 예고하는 듯 보인다(예수의 일생을 생각하면 더욱더 강렬하다).

파르미지아니노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참조했으리라고 생각하면 '목이 긴 마리아'의 엉덩이 부분을 저렇게 어마어마하게 부풀려 과장스럽게 그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마리아는 영원한 젊음뿐 아니라 자기보다 더 덩지가 컸을 예수의 주검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몸집을 과시한다. 마음의 크기를 몸의 크기로 드러낸 것일까.
예수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낼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를 가진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마리아. 그렇게 몸은 '자연스러운 형태'에서 메세지를 담은 형태로 변형되었다.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하이르네상스의 균형은 스스로 깨뜨리고 있었다.

완벽하기 위해서는 균형을 깨뜨려야 한다. 지속적인 균형은 끝없는 불안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굴러가지 않는 자전거는 균형이 잡혀 있지만 바퀴가 멈추면(이게 자연스러운 상태다) 곧 불균형 상태가 된다. 넘어지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그런 씨앗은 자주 발견되었다. 의도를 담은 변형. 사실 이상적인 안정감 역시 그런 것이지만.
'목이 긴' 마리아의 모습은 라파엘로가 생전에 그린 것을 복사했다는 줄리아노 디 로렌초 드 메디치의 초상에서,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메디치 채플의 묘지에 세운 줄리아노 디 로렌초 드 메디치의 조각에서 '거의 그대로' 나타난다.
이 조각 아래에는 밤과 낮을 사람의 형태로 표현한 조각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실제 인체비례를 무시해 버린 아주 길고 불가능한 자세를 한 인체를 볼 수 있다. 그 시기가 1536~1531년경이다.

매너리스트들은 그런 방법을 참조하여 극단적으로 과장함으로써 하이르네상스를 패러디한다. 하이르네상스의 그림이 보이는 자연 그대로(사실은 이상화한 자연스러움)를 그려내려 했다면 매너리스트들은 대놓고 변형한다. 모방과 함께 조소를 담았던 것이다. 완벽한 균형은 백조의 쉼없는 다리의 불안한 움직임을 숨긴 채 겉으로만 드러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매너리즘의 한 화가는 다른 매너리즘 화가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왼쪽 팔을 오른쪽 팔에 붙여보면 어떻게 보일까.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재미있지 않겠는가 - 괄호는 인용자의 해석).
어쩌면 그런 재미를 위해 형태들을 뒤섞어 놓지 않았을까. 천사의 허벅지는 그 천사가 들고 있는 꽃병을 닮았고, 마리아의 다리 아래에는 미니어처 크기의 성 제롬이 서 있다.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기둥이 열을 지어 서 있고.

이 열주도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저 한 개의 기둥이나 벽처럼 보인다. 기둥 아래의 받침대 부분을 눈여겨보아야 겨우 열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충 보는 사람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둔한 감각 탓이라고 쏘아붙일 것 같다.
미켈란젤로라는 하이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예술가를 ‘참조’하고는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묻는 듯하다(전통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묻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안다면 형태를 어떻게 일그러뜨렸는지도 읽어보라는 식이다.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뼈가 없어 보이는 길쭉한 손가락이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이 자세는 그저 ‘우아함’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보여주려는 듯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그림으로는 ‘가능하다’는 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그림 전체가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매너리즘 화가들은 하이르네상스의 완벽한 자연주의적 환각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 혁명적으로 다른 형식(현대미술처럼)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완벽한 조화라는 엄격한 전통에 기대어 바로 그 전통을 비틀어 조소하면서 새로운 예술에 대한 갈망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매너리스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지적인 안목을 가져야 했다. 그런 의도의 결과 자주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게임 같은 수준의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한 좀 더 다양하고 자세한 이미지는 강의 시간에 보여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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