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탈 게임

in #kr-art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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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학창시절 작업한 작품을 해체한 단편들로 이전 작업실을 모델로 삼아 작업한 하지원의 카리스마 넘치는 ‘짜집기 놀이’를 보고 다시 로리킴의 환상적인 ‘아트 게임’을 거쳐 2전시실로 향했다.

거대한 전시장 바닥에는 둥근볼록형 거울들이 그리고 벽면에는 그 둥근 볼록형 거울들을 서로 연결시켜 마치 ‘섬’처럼 보이는 조각들이 설치되어 있다. 오잉? 그런데 그 거울들에 한결같이 금이 간 것이 아닌가.

난 궁금한 나머지 그 거울들로 한걸음 더 들어갔다. 헉!!! 그것은 유리거울(mirror)이 아니라 원형의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이 아닌가. 더욱이 그 둥근 스테인리스 스틸의 표면은 평평하지 않고 볼록하게 제작되어 있다.

그리고 그 볼록한 원형의 스테인리스 스틸 표면에는 ‘금(crack)’이라기보다 차라리 ‘홈(groove)’이 파진 것처럼 표현되어져 있다. 따라서 그 홈이 파진 볼록형 스테인리스 스틸의 표면에 반영된 필자가 모습은 왜곡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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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훈은 볼록형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을 <홈(HOM)>으로 명명했다. 볼록형 스테인리스 스틸의 볼록거울에 비친 나의 몸은 돼지 같은 뚱뚱한 몸에 난도질까지 당한 모습이다. 오잉? 그런데 스테인리스 스틸의 볼록거울에 비친 필자의 모습이 미끄럽지 못하고 미소하지만 울어있는 것이 아닌가?

머시라? 볼록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울게 된다고요? 아니, 공장에서 버핑(buffing)된 볼록한 스테인리스 스틸의 볼록한 표면은 전혀 울음 없이 미끄럽게 제작되잖은가? 그런데 김지훈의 <홈>은 표면이 미끄럽지만 울음이 있다.

그렇다! 김지훈의 <홈>은 단조(鍛造)기법으로 작업된 것이다. 단조는 한 마디로 쇠를 망치로 두드려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단조는 쇠를 불에 달구어 모루(Anvil)와 망치(Hammer)를 사용하여 달구어진 쇠에 수십 차례 힘을 가해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단조 작업은 고된 노동을 피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단조기법으로 작업하는 조각가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김지훈은 오래된 성형기법 중의 하나인 단조를 고집한다. 왜냐하면 단조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기계 맛’과는 달리 ‘손맛’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지훈의 <홈>에는 미소하게나마 손맛이 남아있다. 그 손맛이 다름아닌 표면의 울음이다. 그는 스테인리스 스틸의 볼록한 표면을 망치로 두드리면서 미소하게나마 울음을 주었다. 때문에 스테인리스 스틸의 볼록한 표면이 시각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미소하게 우글쭈글해져 있는 것이다. 왜 스테인리스 스틸의 볼록거울에 비친 모습이 일그러져 있는지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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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김지훈의 <홈>은 2007년 유리상자에 전시했던 <웅덩이(HOLE)>와 문맥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의 <웅덩이> 작품은 협소한 지하공간(凹)을 모델로 삼아 작업한 것인 반면, 이번 그의 <홈>은 요철(凹凸)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홈>은 무엇을 모델로 삼은 것일까?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홈(HOM)’ 작업의 시작은 어머니의 손바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시작되었다. 오목한 손바닥은 손금이 강조되며 볼록한 덩어리들로 구분되고 나눠진다. 어느 덩어리에 내가 속해있고 어떤 경계에 내가 닿아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손금에서 인생의 기록을 찾고 예측하려고 시도한다. 손금이 만들어낸 홈은 길이 되어 손바닥의 영역들을 분리한다.”

김지훈에게 손바닥의 손금은 인생의 기록이다. 그는 마치 누군가의 인생 기록을 남기듯 스테인리스 스틸을 망치로 두들겨 볼록한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그는 볼록한 스테인리스 스틸의 표면을 버핑 처리한다. 따라서 스테인리스 스틸의 볼록한 표면은 거울처럼 빛난다.

그런데 그는 그 볼록거울에 ‘홈’을 만들어 놓는다. 그 ‘홈’은 일종의 ‘미끼(lure)’이다. 난 바보처럼 그 ‘미끼’를 그만 덥석 물었다. 이를테면 필자는 볼록거울의 ‘미끼’를 통해 (일그러진 모습을) 응시했다고 착각한다고 말이다.

와이? 왜냐하면 시선(eye)은 필자의 것인 반면, 응시(gaze)는 대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선과 응시는 서로 일치할 수 없다. 말하자면 주체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은 이미 늘 주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응시하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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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내가 바라보는 것은 사실 내가 진정 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대체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 대체물은 상징계 안에서 ‘홈(빈 구멍)’처럼 결여된 실재이다. 김지훈은 그 ‘홈’을 메우고자하는 나의 욕망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홈’을 관객은 물론 그 자신도 메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홈’을 통해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은 관객이 그의 작품을 보고서 뒤돌아서고자 할 때, 즉 작품에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타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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