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영화-1

in #korealast year

한국 영화의 최초의 작품은 1919년 김도산(金陶山)이 연극의 한 부분으로서 만든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라는 연쇄활동사진극(連鎖活動寫眞劇)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진극이 단성사에서 상연되어 장안에 화제를 뿌렸지만, 역시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파연극(新派演劇) 도중에 스크린을 내리고 연극 장면의 일부를 그 속에 옮겨놓은 방편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최초의 극영화 작품은 1923년에 윤백남(尹白南)이 만든 《월하(月下)의 맹세》이다.

그 후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스토리 위주의 영화가 등장하였는데, 이경손(李慶孫)의 《장한몽(長恨夢)》, 왕필렬(王必烈)의 《해(海)의 곡(曲)》 등이 곧 그것이다. 초창기의 영화는 제목이 말하듯이 대중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야담이나 통속소설을 필름에 담는 정도의 것이었다. 일제의 탄압을 무릅쓰고 민족의 울분과 저항정신이 담긴 영화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나운규(羅雲奎)였다. 그는 1900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나 1936년에 요절한 불운의 예술인이었지만, 그가 첫 감독과 주연도 겸한 《아리랑》(1926)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작품이다.

그는 《아리랑》의 주인공을 광인(狂人)으로 설정, 교묘히 일제의 검열을 피하였다. 주인공은 일제의 앞잡이인 악덕지주를 낫으로 찔러죽이고 일경을 구타하는 등 광인의 행위를 통해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과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는 또 《풍운아(風雲兒)》, 《아리랑》 1·2편 외에 최초의 문예영화인 《벙어리 삼룡(三龍)》 등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 무렵의 영화는 무성영화(無聲映畵)로 꼭 필요하다고 느낀 대사(臺詞)는 화면에 자막(字幕)으로 넣기도 하였지만, 변사(辯士)가 영화의 내용을 이해시키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 영화가 무성영화시대에서 토키시대로 전환한 것은 1935년의 《춘향전》부터이다. 나운규 이후 두각을 나타낸 감독은 이규환(李圭煥)과 최인규(崔寅奎)였다. 이규환 역시 민족정신이 투철한 영화인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1932) 《나그네》(1937) 등을 통해 민족의 비애를 표현했고, 최인규는 《국경(國境)》 《수업료》 등을 발표하였다.

1935∼1939년에 청구영화사, 고려키네마사 등 20여 영화사가 설립되면서 영화제작에 대한 의욕은 대단했으나, 제작 편수는 미미하여 1935년에 17편, 1936년에 5편, 1937년에는 4편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부진은 영화사의 영세성과 일제의 검열 강화가 그 원인이었다. 일제는 1940년에 조선영화법을 제정·공포하고, 1942년에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발족시켰는데, 이것은 영화제작을 극도로 억제하고 그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일련의 조치였다.

1945년 8·15광복과 함께 그동안 뿔뿔이 흩어진 영화인들이 속속 모여들어 일제강점기의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인수, 조선영화건설본부(위원장 尹白南)를 설립하고 미군정하의 뉴스영화제작을 맡았다. 이 무렵 좌익계열은 따로 조선영화동맹을 조직하였다. 1946년 고려영화사에서 《자유만세》를 제작, 조국광복의 감격을 마음껏 구가하면서 이구영(李龜永)의 《안중근사기(安重根史記)》, 윤봉춘(尹逢春)의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 이규환의 《민족의 절규》, 김영순(金永淳)의 《불멸의 밀사》, 최인규의 《독립전야(獨立前夜)》 등이 잇달아 나왔다.

한국전쟁과 전쟁 이후
6·25전쟁의 와중에도 영화인들은 《태양의 거리》 《낙동강》 《고향의 등불》 등을 제작하였다. 정전 후인 1955년 15편에 불과한 제작 편수도 1959년에는 108편으로 증가했는가 하면 전후세대의 새 감독들이 등장, 영화가 본격적인 예술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김기영(金綺泳)의 《십대의 반항》, 유현목(兪賢穆)의 《오발탄(誤發彈)》,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강대진(姜大振)의 《마부(馬夫)》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영화인들은 시야를 해외로 돌리기 시작, 1955년 제2회 아시아영화제에 옵저버로 처음 참가하고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는 이병일(李炳逸)의 《시집가는 날》이 특별희극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많은 한국 영화가 샌프란시스코·베를린·베니스·칸 등 해외 영화제에 속속 출품되었다. 이리하여 1960년대는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누린 셈이었다. 1960년대의 문제작으로는 김수용(金洙容)의 《갯마을》, 박상호(朴商昊)의 《비무장지대》, 이만희(李晩熙)의 《만추(晩秋)》, 정진우(鄭鎭宇)의 《초우(草雨)》, 이성구(李星究)의 《장군의 수염》 그리고 최하원(崔夏園)의 《독짓는 늙은이》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등장과 정부의 대중문화 탄압으로 인하여 한국 영화계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해외 영화제에서 변변한 수상 기록도 거의 없는 부진의 늪을 헤매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별들의 고향》의 이장호(李長鎬), 《영자의 전성시대》의 김호선(金鎬善), 《바보들의 행진》의 하길종(河吉鍾) 등 전후 감독들의 활약은 다행한 일이었다.

1980년대
198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영화는 1970년대의 침체기를 벗고, 유수한 국제영화제에 출품하는 등 그 활동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한국 영화의 국제무대 진출에 앞장선 감독들로 《피막(避幕)》 《여인잔혹사(女人殘酷史)》 《물레야 물레야》의 이두용(李斗鏞), 《만다라》 《길소뜸》의 임권택(林權澤), 《바보선언》의 이장호, 《땡볕》의 하명중(河明中), 《깊고 푸른 밤》의 배창호(裵昶浩)를 들 수 있다.

이들이 기울인 노력은 마침내 1980년대를 빛내는 몇 개의 수상 기록을 남겼다. 배우로는 강수연(姜受延)이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와 제9회 낭트3대륙영화제에서 《씨받이》(임권택 감독)의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1989년에는 제16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임권택 감독)에서의 연기로 최우수여우상을 받았으며, 신혜수(申惠琇)가 1988년 제12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아다다》(임권택 감독)의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감독으로는 이장호가 1987년 제2회 도쿄 국제영화제에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배용균(裵鏞均)이 1989년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당당히 어깨를 겨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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