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무용-1
한국무용을 대별하면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으로 나눌 수 있다. 전통무용에는 궁중정재와 민속무용이 있고, 창작무용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신무용과 1980년대에 발전한 창작무용이 있다. 이 모든 무용은 시대에 따라 서로 관련을 맺고 변화·발전해왔다. 거기에는 흥과 멋과 우아함이라는 우리의 미적 정신이 담겨 있으며, 가(歌)·무(舞)·시(詩)가 일체를 이루는 종합적 예술창조로 오늘날까지 거듭 발전해오고 있다. 상고시대의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비롯한 한국의 무용은 당초 음악과 무용이 미분화 상태에 있어서, 이를 아울러 ‘악(樂)’이라 불렀다. 고구려 무용의 단편(斷片)을 무용총(舞踊塚) 벽화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중국 측의 사적(史籍)에도 고구려의 호선무(胡旋舞)·광수무(廣袖舞)·지서무(芝栖舞) 등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백제 무용에 관한 국내의 기록과 자료는 아직 전무하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면, 백제인 미마지가 오(吳)에서 기악무(伎樂舞)를 배워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악지(樂志)에도 중국의 《통전(通典)》을 인용하여 백제의 무용 의상 등에 관해 기록한 대목이 있으나, 그 춤의 형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전혀 헤아릴 길이 없다. 신라의 무용은 무악(舞樂)을 장려한 진흥왕(眞興王) 시대에 융성기를 맞았다. 552년(진흥왕 13)에는 가야국(伽倻國)의 우륵(于勒)이 신라에 돌아와서 국원(國原:충주)에서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에게 가야금과 노래와 춤을 각각 가르쳤다. 또한 신라 때 당(唐)의 악제(樂制)를 채용한 일도 무용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특기할 만한 무용으로는 검무(劍舞)를 비롯하여 무애무(無imagefont舞)·도솔가무(兜率歌舞)·처용무(處容舞)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신라 고유의 무용 외에도 서역과 중국에서 전래된 가면극(假面劇)인 오기(五伎)가 있는데, 그 모습을 최치원(催致遠)이 한시로 묘사한 향악잡영5수(鄕樂雜詠五首)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고려시대로 접어들자 신라의 유풍을 이어받은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가 국가적인 행사로 거행되고, 이와 함께 가무도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가무의 종류도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향악)으로 나누어졌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1073년(문종 27) 2월에 여자 무용수 진경(眞卿) 등 13인이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를 추었으며, 또 그 후에 포구락(抛毬樂)과 왕모대무(王母隊舞) 등을 추었는데, 이것은 모두 중국에서 전승된 당악정재(唐樂呈才)에 속하는 가무이다. 고려시대 무용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나타난 무용의 종류는 상당히 많다. 일무(佾舞)에는 무무(武舞)와 문무(文舞)가 있으며, 정재(呈才)는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로 구분된다. 조선시대에는 종래의 예능을 계승함과 동시에 부흥을 시도하였다. 궁중의 여러 행사에는 가무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무악을 관장하는 곡악서(曲樂署)가 설치되었다. 조선의 무악은 세종·세조에 의해 정리 발전되고 성종 대에 집대성되었으며, 익종은 김창하(金昌河)와 수십 종의 정재를 새로 창안하였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춘앵전(春鶯傳)》이 대표적 작품이다. 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 등의 일무의 동작과 곡을 수록한 《시용무보(時用舞譜)》가 약 200년 전에 편찬되었으며, 홀기(笏記) 등에 의해 조선시대 후기의 무용 내용을 알 수 있다. 《악학궤범》 《진연의궤(進宴儀軌)》 《정재홀기(呈才笏記)》 등에 궁중무용 51종과 남무(男舞)·무당무·무동춤·사자무·살풀이·승무·소고무·장고무·한량무·강강술래 등의 민속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향악무에는 꽃을 어르고 꺾으며 추는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심향춘(沈香春)》, 풍년을 기원하는 《경풍도(慶豊圖)》, 태조의 건국을 축하하는 《몽금척(夢金尺)》, 왕조창업의 공덕을 칭송하는 곡에 맞추어 추는 《문덕곡(文德曲)》 외에도 첩승무(疊勝舞)·초무(初舞)·박접무(撲蝶舞)·무산향(舞山香)·아박무(牙拍舞) 등이 있으며, 당악무에는 수명명(受明命)·성택(聖澤)·하성명(賀聖明)·하황은(荷皇恩)·수보록(受寶) 등이 있다.
민속무용의 예
민속무용의 대표적인 예로는 농악과 강강술래가 있으며, 승무·살풀이·한량무·남무·탈춤 등이 있다. 강강술래는 전라도 지방에서 밝은 달밤을 가려 부녀자들이 즐기는 향토적인 군무(群舞)이다. 농악은 상고시대부터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농사의 능률을 올리고 유사시에는 군인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사자무는 조선 고종 때에 궁중에 들어와 처음으로 추었는데 이는 탈춤에서 유래한 것이다. 탈춤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춤으로 가면(탈)을 쓰고 춤을 추며 대사가 있는 극형식을 띠고 있다. 탈춤의 명칭은 지방별로 다른데, 황해도 지방은 강령탈춤·봉산탈춤이고, 경기도 지방은 산디놀이, 경남 지방은 야유(野遊) 또는 오광대(五廣大)로 각각 불러왔다. 남무는 남자와 여자로 분장한 두 사람이 서로 교태를 부리는 민속무인데 주로 기녀 사이에서 성행한 것이다. 한국의 무용은 오랜 세월 동안 종교의식으로, 또는 궁중이나 민간에서 전승되어 오다가 1905년 국립극장 격인 원각사(圓覺社)가 개장함으로써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이 함께 무대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무용 (두산백과 두피디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SNU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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