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2

in #korealast year

스포츠 보급 및 역사
초창기의 한국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1920년 4월에 조선체육회(朝鮮體育會)가 창립되면서부터이다. 그해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가 스포츠를 보급시켜 젊은이의 체력과 기력을 양성할 것을 역설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지(有志)들의 발기로 조선체육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체육회는 창립기념사업으로 7월에 배재고보 교정에서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와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개최하였다.

축구대회 중학단부에는 경신·휘문·배재·중앙·보성의 5개 고등보통학교 팀이 출전하여 배재고보가 우승하였고 청년단부에서는 배제OB·YMCA·천도교·경신OB·삼한(三韓)클럽의 5개 팀이 겨룬 끝에 배재OB가 우승하였다. 야구대회 참가 팀도 축구대회 참가 팀과 같았는데 중학단부·청년단부 모두의 패권을 역시 배재 YB(young boy:재학생)와 OB(old boy:졸업생)팀이 휩쓸었다. 이같이 YMCA는 초기 스포츠 보급에 크게 이바지하였는데 서울에 이어 1921년에는 평양에서 YMCA 주최로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가 열렸고, 이것을 계기로 평양에 축구가 유행해 서울·평양 간 경평축구전(京平蹴球戰)이 열렸으며 이에 일본 유학생팀이 가세하여 지방 순회 경기 등을 벌임으로써 축구를 중심으로 한 서구 스포츠는 전국에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스포츠를 한국에 완전히 정착시킨 것이 연희(延禧)전문과 보성(普成)전문의 두 사학(私學)이다. 1924년에 양교 축구부가 동시에 탄생하자 그때부터 양 팀 간의 대결은 서울의 화제가 되었다. 강력한 축구부를 먼저 구성한 것은 연희전문으로서 1926년에 이영선(李永善)·이영민(李榮敏)·김윤기(金允基) 등으로 강팀을 이루어 전국 축구를 휩쓸자, 보성전문은 이듬해 김화영(金化永)·김원겸(金元謙)·임용업(林龍業) 등으로 팀을 구성하여 연희전문과 맞섰다. 이때부터 연보전·보연전(延普戰·普延戰)은 열기를 높여갔으며 이것이 자극이 되어 중등학교 축구의 질이 높아졌다. 당시의 축구소년들은 누구나 연희전문·보성전문 진학을 열망하였고 진학 후 기술을 더욱 연마하였으므로 양교 재학생을 중심으로 1935년에 구성된 경성축구단(京城蹴球團)은 동양 최강의 실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다.

농구는 이보다 늦게 1930년에 연희전문 농구부가 강화되고, 보성전문 농구부는 이듬해 팀이 구성되었다. 그 결과 축구의 연보전과 더불어 농구 연보전도 스포츠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또 다른 행사가 되었다. 선의의 경쟁에 의한 양교 농구 수준의 급격한 향상에 따라 연희전문 농구팀이 1936년 전일본 종합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이성구(李性求)·염은현(廉殷鉉)·장이진(張利鎭)의 세 선수는 이 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올림픽경기대회에 출전한 일본 대표 농구팀의 선수로 선발되었다.

연보전은 축구·농구뿐만 아니라 육상경기·아이스하키·스피드스케이팅·유도·연식정구 등의 경기도 공통적으로 장려하였으며, 그 밖에도 연희전문에서는 야구를, 보성전문에서는 럭비·배구·역도·탁구 등을 장려하여 한국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축구·농구에서와 같이 양교의 육상경기 장려는 양정·배재고보를 비롯한 전국 중등학교 육상경기 발전에 자극제가 되어 그 산물로서 권태하(權泰夏)·김은배(金恩培)·손기정(孫基禎)·남승룡(南昇龍) 등 우수한 장거리 및 마라톤 선수가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손기정·남승룡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1회 올림픽경기대회에 출전, 1위와 3위를 차지하여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자랑하였다. 그리고 김원권(金源權)·김유택(金裕澤)은 1939년에 멀리뛰기와 3단 뛰기 및 100m 달리기에서 그 해의 세계최고기록을 세웠다.

한국의 스포츠는 조선체육회의 주도로, 또 연보전의 경쟁 아래 해가 거듭할수록 널리 보급되었고 수준을 높여갔으나, 군국주의 일본이 일으킨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조선총독부가 1943년에 이르러 외래 스포츠의 금지지시를 내림에 따라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침체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체육인들이 광복의 감격을 발현(發現)하기 위하여 그해 10월 광복 경축 종합경기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독립국가로서의 한국 스포츠는 국제무대에도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1947년 4월 19일 서윤복(徐潤福)이 제51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에 한국 대표 축구팀은 중국 상하이(上海)에 원정하였고, 9월에는 역도선수단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였다. 또 그해 여름에 대한올림픽위원회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을 얻음으로써 한국도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 런던에서 거행된 제14회 올림픽경기대회에 한국선수단은 독립된 대한민국팀으로 첫 출전을 하였다. 대회에서 비록 금메달은 하나도 차지하지 못했으나 성적은 비교적 좋아 역도 75kg급(미들급)의 김성집(金晟集)과 복싱 플라이급의 한수안(韓水安)이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국내적으로 모든 스포츠가 활발히 펼쳐졌고 국제적으로 한국 스포츠가 세계에 진출하여 그 전도는 밝았지만, 38선으로 국토가 남북으로 갈리면서 한국 스포츠는 통일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자유를 찾아 월남한 체육인들이 상당한 활약을 보였는데 최윤칠(崔崙七)은 마라톤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950년 제54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한국이 1~3위를 차지할 때 3위에 입상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한국 스포츠는 다시 수렁에 빠졌다. 그러나 해병대를 포함한 국군 4군이 다투어 장병의 사기 앙양책으로 스포츠를 장려함에 따라 다행히 명맥은 유지되어 전쟁 후의 혼란기에 올림픽(1952년 헬싱키)과 아시아대회(1954년 마닐라)에 출전할 수가 있었다.

1961년의 5·16군사정변 이후 정책적으로 스포츠를 장려하여 많은 실업팀이 창단되었는데 이에 따라 대학스포츠도 활성화되었다. 그 영향은 하부구조로 경기 인구를 증대시켰다. 정부의 스포츠 장려와 맥락을 같이하여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 제22대 회장에 취임한 민관식(閔寬植)은 체육행정 기구를 근대적으로 개편한 후 체육발전을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태릉에 선수촌을 건립하여 국가대표급 선수의 전천후 강화훈련이 가능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외 인공 스케이팅 링크도 지어 태릉을 한국 스포츠의 메카로 만들었다.

이어 민관식 회장은 소년체육대회를 기획하여 1972년 6월 서울에서 제1회 대회가 열리도록 하였다. 한국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1976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올림픽경기대회에서는 레슬링의 양정모(梁正模)가 건국 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고, 여자 배구선수들은 3위에 입상, 올림픽 무대에서 구기종목에서 첫 메달을 획득했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자신감을 얻은 한국 스포츠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회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은 김성집을 단장으로 284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해 금메달 6, 은메달 6, 동메달 7개를 획득해 세계 140개국 중 처음으로 10위에 입상하였다. 유도의 안병근(安炳根)·하형주(河亨柱), 레슬링의 김원기(金元基)·유인탁(柳寅卓), 복싱의 신준섭(申俊燮), 양궁의 서향순(徐香順)이 금메달을 따내 일약 한국 스포츠를 세계 10위로 끌어올렸다. 이 밖에도 여자 농구와 여자 핸드볼이 각각 올림픽 구기종목에서 처음으로 은메달을 차지하여 한국 스포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83년 6월 4~21일 멕시코에서 벌어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는 이른바 박종환(朴鍾煥) 사단이라 불리던 청소년축구 대표팀이 한국 축구사상 처음으로 세계 4강에 진입하였다. 이에 앞서 한국은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名古屋)를 52:2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1988년의 제24회 올림픽 개최권을 획득하였다.

이어 11월 26일에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경기연맹(AGF:현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임시총회에서 1986년의 제10회 아시안게임 개최권도 획득하였다. 양 대회의 서울 유치는 긴장이 감도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훗날 한국의 북방외교의 교두보를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이 세계에서 16번째로, 아시아에서 2번째로 올림픽대회를 유치하게 된 것은 국민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는 사건이었으며, 국민 화합에 힘쓰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86·1988년 분위기에 편승, 국가적 차원에서의 체육 정책이 수립되면서 진해 선수촌을 비롯해 온양온천 수영장 등 국가대표 훈련시설이 대폭 확충되었으며, 스포츠과학연구소(현 한국체육과학연구원)가 설립되는 등 스포츠 과학화에도 열기가 확산되었다.

1986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93, 은메달 55, 동메달 76개를 따내 사상 처음 일본을 제치고,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어 2년 후 역시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올림픽대회에서도 금 12, 은 10, 동 11개 등 모두 33개의 메달을 따내 소련·동독·미국에 이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4위를 차지, 국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 특히 이 대회에서는 남자 100m 우승자인 캐나다의 벤 존슨이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을 발견해, 한국 스포츠과학도 세계적인 수준임을 동시에 인증받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25회 올림픽경기대회에서는 남자 마라톤의 황영조(黃永祚)가 금메달을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여자 핸드볼이 서울올림픽에 이어 우승함으로써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였다. 이 대회에서 금 12, 은 8, 동메달 12개를 획득하여 7위에 오름으로써 스포츠 강국의 위상을 굳혔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제26회 올림픽대회에서 한국은 10위의 성적을 거둠으로써 연속 4번째로 세계 10위권에 들었고, 2000년 호주 시드니올림픽대회에서는 12위, 2004년 그리스 아테네올림픽대회에서는 9위, 2008년 중국 베이징올림픽에서는 7위, 2012 런던올림픽에서는 5위,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는 8월, 2020 도쿄올림픽에서는 16위를 기록하였다.

한국 스포츠는 여름 종목뿐 아니라 겨울 종목에서도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여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 올림픽에서부터 쇼트트랙을 중심으로 금메달을 따기 시작했다. 1992년 대회에서는 종합 10위, 1994년 릴레함메르대회에서는 종합 6위, 1998 나가노올림픽에서는 9위, 2002 솔트레이크시티올림픽에서는 14위, 2006 토리노올림픽에서는 7윌, 2010 밴쿠버올림픽에서는 5위, 2014 소치올림픽에서는 13위, 2018 평창올림픽에서는 7위를 기록하였다.

2002년에는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가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으로 개최되었고,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4강에 오르는 쾌거를 올렸을 뿐 아니라 전국적인 거리 응원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2003년에는 대구광역시에서 하계유니버시아드가 열렸고, 2011년에는 역시 대구에서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렸다. 2018년도에는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을 열어 한국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4대 스포츠 이벤트(하계올림픽, 동계올림픽, 월드컵축구대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모두 개최한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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