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인이 목숨을 구할 줄은

개성만점 우리 남편은 까칠한데 허투르다.

남편은 노인을 싫어한다. 소싯적에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로 3가를 지나 인천까지 10년을 통근하고 다니면서 노인들에게 넌덜머리가 났다고 한다. 냄새나고, 자리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자기네끼리 싸우고 별 꼴을 다 봤다고 한다. 그러고 오늘 노인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남편은 또한 지독하게 물건을 잘 흘리고 다닌다. 그 역사 또한 유구한데 혼자 이동을 시작한 초딩 때 연필, 지우개, 필통 문방사우 부터 생명과 직결된 도시락, 신발주머니, 리코더, 실로폰 악기류까지 남편의 물건은 블랙홀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블랙홀을 무수히 찾으러 다니시고 혹은 사러 다니셨다고 한다. (그 유전은 우리 아들에게로.. 미안하다.)

2024년 50을 바라보는 중년에 애아버지가 된 남편은 바로 오늘, 아이스크림을 사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과업을 완수한 후 산책을 다녀왔는데 지갑이 사라지는 사고를 당했다. 펄펄 뛰며 온 집안을 뒤지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다녀오고 산책로도 몇번이고 오갔지만 지갑은 없었다. 잔뜩 화가 난 남편은 씨씨 거리면 집을 오가며 분을 삭히지 못해 우리는 어디로 피신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본인의 부족함이 드러나면 더욱 발광을 하는 부류와 자책을 하며 찌그러지는 부류가 있는데 후자인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로직이다. 내가 정신 머리가 모자라서 내 지갑을 내가 흘렸는데 왜 주변 사람에게 화를 내지? 우리가 물떠놓고 고사 라도 지냈냐? 신혼 초부터 저런 걸로 많이 싸우고 이야기도 해봤지만 결론은 그냥 성장과정의 결함이라고 치고 순간을 피하자 밖엔 수가 없다.(또 미안하다 아들아.)

그리하여 씩씩대고 저녁도 안 먹고 방에 들어가버렸는데
“띵똥”
누구세요 하니 어느 노부부가 지갑을 흔든다. 아니 저것은? 전광석화와 같이 현관으로 튀어 나가니 머리가 하얗게 성성한 자그마한 할아버지와 캡 모자를 쓰신 할머니가 지갑을 들고 계신다.

너무 놀라서

“어머. 저희 지갑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찾으셨어요!!! 너무 감사해요!!”

나 울 뻔….

“안에 한 번 확인해봐요. 산책하다가 뭐가 떨어져있어서 주웠더니 이거야.. 내일 아침 택배로 부칠까하다가 오늘 밤 잠 잘 자라고 가지고 왔어.”

“어머 어떻게 아시고.. 이 아파트에 사세요?”
“아니야. 지하철 갈아타고 왔지. 찾았으니 다행이우, 우린 갈게.”

어머나 세상에! 이런 생각지 못한 기쁨이 있나.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고 세상 각박하고 인간에 대한 환멸을 노래하며 살았다. 봐도봐도 시커먼 새 소식만 쏟아내는 티브이와 유튜브 속에 우리는 세상에 평범한 좋은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입고 살았다. 노인들은 긴 세월을 살며 닳고 닳아 능구렁이처럼 이익에만 밝은 속물로 생각하고 살았던 남편. 그는 오늘 그 ‘노인’ 덕분에 생명같은 지갑을 지켰다. 지갑에는 가난한 남편의 전재산과 신분증, 카드가 있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갑이었다. 남편이 회사 출장으로 몇 년을 해외로 뒹굴 때 면세점에서 큰 맘 먹고 장만한 유일한 사치품, 페라가모 지갑. 낡아서 광이 죽고 볼품은 없지만 (그래서 아까 잠깐은 내가 생일 선물로 하나 사 줘야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남편의 지나보니 청춘이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바꿀 수 없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사례라도 해야겠는데 그 분들은 벌써 돌아서 엘레베이터를 타셨고 나는 지갑을 찾아 돈을 꺼내 남편에게 빨리 쫓아가라고 했다. 남편은 한참만에 그냥 돌아왔다.

나는 얼마나 젊은이들에게 모질게 살아왔나. 엊그제 지하철에서 아이가 근처에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양보하겠지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다른 사람이 양보하자 ‘에구 잘 됐다.’ 아싸를 외쳤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이런 건 좀 젊은이가 해주었으면 하고 눈치를 살핀다. 그런 꼰대가 주제에 노인은 무시하고 ‘혐오’라는 생각을 하다니. 너는 안 늙냐. 초라하지 않게 품위있게 늙기가 얼마나 어려우냐.

손잡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지갑을 찾아주는 저들의 여정에 나는 저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안했다.
나는 나를 무사히 지금, 여기까지 살게 해 준 세상에 충분히 감사하고 있는지. 운좋게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 다른 사람의 수고를 빌려 살고 있다. 애들이 어릴 때 회사와 집을 오가며 정신없을 때 우리 식구 굶어 죽지 않게 저녁마다 밥을 배달해준 수많은 라이더들. 적은 돈으로 따뜻하게 애들이랑 먹고 살게 해주었지만 돈내고 받는 서비스에 큰 감사는 없었다. 애들 어린이집, 유치원의 수많은 선생님들. 그들에겐 일이지만 그것은 일을 떠나 사랑이었다. 애들을 조금이라도 이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 이 사회는 거미줄처럼 사랑과 감사가 뒤엉켜 있어 오늘에 온 것이다.

내가 이 호들갑을 떠는 와중에도, 참 다른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딸아, 아빠는 살면서 언제나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단다. 운이 참 좋았지. 아빠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지만 돌아보면 주변엔 좋은 사람이 많았어. 못 알아본 게 미안하지.”

와… 이걸 이렇게 해석한다고? 이게 된다고??

내가 범우주에 감사하며 할렐루야 임마누엘하는 동안, 남편은 역시 난 멋진 놈을 세상에 외친다.

Mbti 가 한 글자도 안 맞는 우리. 역시 mbti 는 과학이다.

그렇게 서로 보완하면 산다고, 우리를 만나게 한 신께 감사라도 올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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