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30(월)역사단편252 장수왕이 '薨[훙]'세상을 떠났다?
지난 글에서, 김부식이 삼국사를 쓸때
항상 대륙의 나라에 조공한 것 외에는 기록한 것이 없다는
지적을 했다.
장수왕의 연대를 다시 살펴본다.
장수왕 76년(488)과 77년(489)에는 사신을 각각 세번씩이나 보냈다.
북위[고조때]의기록을 읽어본다.
太和十三年[488년]
二月壬午,高麗國遣使朝獻。
2월 임오일, 고구려국高麗國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月, 高麗國遣使朝貢。
6월, 고구려국高麗國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冬十月甲申,高麗國遣使朝貢。
겨울 10월 갑신일, 고구려국高麗國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의 사신파견에 대한 김부식의 기록을 보자.
七十六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76년(488)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출처: 삼국사기, 장수왕76년]
남에 나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入) 라는 글자를 사용한다.
이건 일단 넘어간다.
왜 2년간 갑자기 자주 사신을 파견했을까?
당시 북위의 기록을 읽어보면,
485년 무렵부터 전지역에 가뭄이 심각했다.
관련기록중 일부를 읽어본다.
[487년]6월 신사일, 진주秦州의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계미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봄 가뭄이 지금까지 이어져 들에 풀이 없다.
하늘이 경고를 내린 것은 덕이 없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죄가 없는데 굶주림을 겪게 되었다.
밤낮으로 생각해도 해결책을 알 수 없다. [이하생략]"
<출처: 帝紀(제기9)高祖(고조)>
고구려가 북위가 심각한 위험에 처한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도와준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
491년 12월 장수왕이 붕어했다.
이때의 기록을 본다.
十有二月, 帝為高麗王璉舉哀於城東行宮。
십이월, 황제가 고구려왕高麗王 련璉을 위해 성 동쪽의 행궁에서 애도하였다.
< 출처: [위서]고조, 太和十五年[491]태화 15년>
위나라의 황제가 행궁에가서 애도하였다는 해석인데.
여기에 '舉哀(거애)'라는 문구가 있다.
검색을 해보면
라고 되어있다. <출처: 바이두>
이것을 번역하면
"舉哀"는 한자어로, 병음은 "jǔ āi"이다.
이는 장례식을 치를 때
큰 소리로 울며 애도를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황제가, 행궁에 가서
큰소리로 울며 장수왕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라고 자신들의 기록에 적어놓았다.
김부식은 뭐라고 적어놓았을까?
七十九年, 冬十二月, 王薨(훙).
〔79년(491)〕 겨울 12월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98세였는데, 시호는 장수왕長壽王이다.
위나라 효문제魏孝文이 이를 듣고, 흰 옷을 입고 동교東郊에서 애도하며,
알자복사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어
책봉하여 차기대장군, 대교감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
장수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인상적이다.
- 김부식은 붕(崩)이 아니라 제후의 죽음을 의미하는 훙(薨)이라 썼다.
- 국사편찬위 이놈들은 이것을 또 "세상을 떠났다"라고 썼다.
김부식이 죽고 1천년이 지난 지금
이런 놈들이 이 나라의 '국사교육'을 책임지고 있다.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당을 차지하고 수많은 탄핵을 했지만
어째 나라의 역사에는 아무 관심이 없을까?
국민도 자극적인 정치이슈에나 혈압을 올리지
우리 역사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에는 관심없다.
독도같은거 줘버려도 상관없다.
정신만 제대로 박히면..